데몰리션 엔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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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능한 폭탄전문가 캐롤 스타키는 3년 전까지만 해도 LA경찰국 폭발물처리반에서 근무했지만, 그녀의 연인이자 파트너였던 슈거의 목숨을 앗아간 폭발사고 이후 범죄음모수사과에서 근무하는 중입니다.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스타키는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을 못 이기고 술 담배에 찌든 채 냉소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어느 날, 폭발물처리반의 한 요원이 LA 실버레이크에서 폭탄 제거 중 폭사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스타키는 폭탄에 대한 조사와 함께 주변 탐문을 벌입니다. 그러던 중 ATF(주류-담배-화기 단속국)에서 파견된 잭 펠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사건은 ‘미스터 레드’라 불리는 폭탄 사이코패스의 범행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데몰리션 엔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7년에 읽은 로버트 크레이스의 ‘L.A. 레퀴엠’ 때문입니다. ‘L.A. 레퀴엠’은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못잖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조연이 바로 이 작품의 히로인이자 폭탄전문가인 캐롤 스타키입니다. 다른 독자의 서평을 통해 캐롤 스타키가 로버트 크레이스의 스탠드얼론 ‘데몰리션 엔젤’의 주인공이란 걸 알게 된 뒤 빨리 읽고 싶은 조바심이 일었지만, 게으름을 부리다가 결국 5년 만에 캐롤 스타기를 만나게 됐습니다. (참고로 원작 기준으로 ‘L.A. 레퀴엠’은 1999년, ‘데몰리션 엔젤’은 2000년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의 구도를 갖춘 ‘데몰리션 엔젤’은 간단하게 요약하면 “폭탄에 환장한 사이코패스와 화이트 사이코패스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괴의 쾌감과 돈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미스터 레드’가 희대의 폭탄살인마라면, 캐롤 스타키는 유능한 수사관이자 폭탄처리전문가지만 동시에 폭탄과 단 둘이 있을 때면 자신을 폭탄의 일부로 느끼며 안도감을 느끼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두 사람의 대결에 끼어드는 세 번째 주인공은 ATF 요원 잭 펠입니다. 그는 7건의 폭탄사건을 일으킨 ‘미스터 레드’를 집요하게 쫓고 있으며, LA 실버레이크 사건 역시 그의 짓이라고 확신합니다. 안 그래도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스타키가 볼 때 사건을 빼앗으려는 듯한 잭 펠은 눈엣가시입니다. 하지만 잭은 수사의 주도권을 스타키에게 넘긴 채 조력자로 남습니다. 스타키를 못미더워하는 경찰 상부는 여차하면 사건을 강력과로 넘길 태세지만 스타키와 잭은 사소한 단서들을 통해 점차 진실에 다가갑니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대표작인 ‘엘비스 콜 & 조 파이크 시리즈’에서도 여러 번 맛봤지만 그의 액션 스릴러는 단순명쾌하고 시원한데다 엄청난 속도로 폭주합니다. ‘데몰리션 엔젤’은 그런 미덕에 더해 캐롤 스타키라는 주인공의 트라우마까지 더해져 더욱 눈길을 끕니다. 3년 전 연인 슈거를 폭발사고로 잃은 정신적 트라우마는 말할 것도 없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줄 없는 전신의 끔찍한 상처는 그녀로 하여금 절망 이상의 심연에서 허우적대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스타키는 당시 2분 45초 동안 심장이 멈추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맞닥뜨린 ‘미스터 레드’ 사건은 스타키에겐 한편으론 동료를 죽인 범인을 잡겠다는 절실함을 발동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론 3년 만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싶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해직과 징계를 각오하면서까지 ‘미스터 레드’를 잡기 위해 수사에 집착하는가 하면, 잭 펠 때문에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는 스타키의 캐릭터는 사건 자체보다 더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임에 분명합니다.

 

제가 잘못 아는 게 아니라면 캐롤 스타키의 다음 이야기를 그린 작품은 없습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데몰리션 엔젤’ 자체가 단 한 방에 그녀의 매력과 에너지를 모조리 소진시킨 탓에 더 이상 강렬한 이야기를 자아낼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지만, 아직 시리즈 전체(19편) 가운데 단 4편만 한국에 소개된 ‘엘비스 콜 & 조 파이크 시리즈’에서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스타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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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교실 - 젠더가 금지된 학교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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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소설뿐이지만, 나는 쓰는 동안 이런 일이 언젠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들은 매우 이상하지만, 내게는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전작인 ‘살인출산’ 소개글에 실린 무라타 사야카 본인의 말입니다. 10명의 아이를 낳으면 합법적인 ‘살인권’을 얻게 되는 세상, 세 사람의 사랑에서만이 쾌감과 정화를 느끼는 사람들, 섹스리스 부부의 ‘섹스 없는 임신’ 도전기, 의학의 발달로 자살만이 유일한 죽음의 방편이 된 세상 등 다소 불편하고 불쾌한 주제들을 상상을 초월하는 설정과 스토리를 통해 다뤘던 ‘살인출산’이 무척 인상 깊게 남았는데, 그 덕분에 ‘무성 교실’이라는 역시나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새 단편집을 찾아 읽게 됐습니다.

 

네 편의 수록작은 ‘살인출산’ 소개글에 실린 작가의 말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동일한 세계관을 그립니다. 27년 전 만화를 보고 따라 하기 시작한 마법소녀놀이를 36살이 된 현재까지 지속하며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용해제로 사용 중인 여성, 초등학생 때 품기 시작한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기 위해 첫사랑 당사자를 실제로 파괴하기로 결심한 여성, 성인이 될 때까지 학교에서 성별 노출을 금지시킨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은 물론 사랑의 방법에 관해 큰 혼란을 겪는 여고생,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느끼지도, 알지도 못 하는 젊은 세대에게 큰 충격을 받은 40대 여성의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건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라는 생각입니다. 공교롭게도 출판사 소개글에도 바로 이 문구가 등장하는데, 매 수록작마다 초반엔 비정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갈수록 정상처럼 느껴지거나 반대로 정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점차 비정상으로 느껴지는 전개가 거듭됐기 때문입니다. 36살에도 마법소녀놀이를 그만두지 않는 여성이나 첫사랑의 환상을 파괴하기 위해 첫사랑 당사자를 실제로 파괴하는 여성이 전자라면, 성별이 금지된 학교에서 홀로 정상처럼 보이던 여고생이나 분노가 사라진 이상한 세상에서 홀로 정상적인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중년여성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감정이입의 대상인 주인공들이 이렇듯 정상과 비정상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독자는 그들보다 더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곤 “이런 일이 언젠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리얼리티 충만한 판타지’라는 역설적인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살인출산’이나 ‘무성 교실’은 일반적인 독자에겐 쉽고 편하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까지 얻은 걸 보면 그녀의 ‘전공’은 (그녀 표현대로라면) “매우 이상하지만,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인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미쓰(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 취향과 일정 부분 맞닿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작품을 계속 찾아 읽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도발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개글을 읽게 된다면 찜찜함 속에서도 관심을 갖게 될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무라타 사야카의 ‘이상한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라면 ‘살인출산’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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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마땅한 자
마이클 코리타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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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주 북부 대자연에서 전문 가이드로 살아가고 있는 리아 트렌턴. 하지만 그녀의 진짜 이름은 니나 모건이며, 공식적으로 니나는 10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사악한 민간 군수기업 라워리를 상대로 살인 목격증언을 할 예정이던 니나는 라워리가 고용한 킬러들에게 살해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이름과 가족을 버리고 ‘죽은 자’가 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지 10년 만에 리아는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여전히 라워리의 살해 위협이 남아있었지만, 리아는 딸 헤일리와 아들 닉을 찾아가 자신을 ‘이모’라고 소개하곤 메인주로 데려옵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라워리는 리아를 찾아냈고 두 명의 킬러를 보내 10년 전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합니다.


 

대략의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는데, 반쯤은 맞는 말이고, 반쯤은 잘못 넘겨짚은 ‘선입견’입니다. 이름과 가족까지 버린 채 ‘죽은 자’로 살아온 어머니 리아가 자식들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들과 싸우는 이야기란 점 때문에 ‘반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독특하고 매력적이고 예측불허인 킬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잘못 넘겨짚은 선입견’이라는 뜻입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라워리가 자신을 추적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리아가 헤일리와 닉 남매 앞에 ‘이모’로 나타나는 걸 주저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모성애 하나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워리의 킬러들의 추적을 감지한 리아는 메인주의 대자연 속으로 남매를 피신시키며 동시에 목숨을 건 반격을 준비합니다. 숱한 위기를 넘기며 리아의 ‘미션’이 성공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런 점에서 상투적인 서사인 건 부인할 수 없지만, 리아의 악전고투에 끼어든 세 명의 킬러들 때문에 이 작품은 여느 할리우드 액션물과 비교할 수 없는 독창성을 갖게 됩니다.


 

우선 라워리가 리아를 제거하기 위해 보낸 두 명의 킬러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살상극을 벌이며 리아를 추적합니다. 그중에서도 블리크(Bleak, 황량한)라는 별명을 가진 흑인 킬러 마빈 샌더스가 눈길을 끄는데, 군인 출신인 그는 변화 없는 표정, 땀조차 흘리지 않는 냉철함, 로봇과도 같은 무자비함으로 지금껏 봐온 킬러들과는 레벨 자체가 달라 보이는 인물입니다. 그가 워낙 특별한 캐릭터라 파트너인 랜달 폴라드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지만 역시 살인을 소소한 유희로 여기는 끔찍한 인물입니다.

 

라워리의 두 킬러를 능가하는 희대의 캐릭터는 젊은 킬러 댁스 블랙웰입니다. 리아와 함께 실질적인 투톱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리아의 지인의 요청을 받고 리아를 돕기 위해 메인주로 향하지만, 정작 현지에 도착해선 예측불허의 행보를 보입니다. 정말 아군인지, 혹은 돈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예비 적군’인지조차 불분명해 보입니다. 더구나 피와 살이 난무하는 총격전 속에서도 쾌감과 희열을 느끼고 사소하거나 자기중심적인 이유로 인명을 빼앗는 순도 100%의 소시오패스이기도 합니다.

댁스 블랙웰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그가 증인 청부살해의 명문(?)인 블랙웰家의 후손이며, 14살부터 실적을 쌓았다는 점, 또 그를 킬러로 키운 아버지 잭과 삼촌 패트릭이 마이클 코리타의 전작인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에서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투입된 킬러로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캐릭터나 출신성분, 그리고 이 작품에서의 맹활약을 감안해 보면 마이클 코리타가 ‘댁스 블랙웰 시리즈’를 내놓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입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마이클 코리타가 직접 시나리오를 맡아 영화로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 산악지대의 대형화재라는 볼거리를 제공했다면 ‘죽어 마땅한 자’는 메인주의 대자연, 특히 리아와 킬러들의 숨 막히는 대결이 벌어지는 숲과 강과 호수가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건 각오로 싸우는 리아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킬러 댁스 블랙웰의 카리스마 역시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영화로 개봉된다면 꼭 한 번 다시 맛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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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무음에 한하여 ㅣ 아르테 미스터리 14
오리가미 교야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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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속 명탐정을 동경해 탐정 사무소를 연 아마노 하루치카. 그에겐 영혼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은 전능하기는커녕 약점 투성이입니다. 흐릿한 윤곽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용모도, 성별도, 연령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대화는 100% 불가능합니다. 그야말로 ‘볼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영능력자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아마노에겐 또 다른 약점이 있는데, 그건 탐정으로서의 자질 부족입니다. 그보다 훨씬 어린 한 등장인물이 “영혼이 보인다는 건 진짜인 모양이지만 추리는 영 글렀네요.”라고 대놓고 지적하듯 아마노는 명탐정과는 거리가 한참 먼 만 2년차 초보탐정입니다. 더구나 표정에 속내가 다 드러나고, 탐정활동 중 사적인 감정이 툭툭 튀어나오는가 하면 너무나도 양심적이라 도대체 돈 벌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심하게 말하면 ‘탐정 부적격자’에 가깝습니다. ‘옮긴이의 말’의 부제인 “2퍼센트 부족한 특수 능력을 지닌 2퍼센트 부족한 탐정의 분투기”는 아마노의 캐릭터를 한 줄로 잘 압축한 표현입니다.

 

이 작품에서 아마노가 맡은 사건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자식들 대신 손자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기고 사망한 자산가 노인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2년 전 실종된 뒤 소식이 끊긴 남편과 사후 이혼이라도 하고 싶으니 죽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거나 시신이라도 찾아달라는 의뢰입니다. 노인의 죽음은 평범한 병사로 처리되어 화장까지 마친 상태이고,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남편은 실종 이후 이미 2년이나 지나 어디에서도 단서를 찾기 힘든 상태입니다. 죽음이든 실종이든 진실은 죽은 자 본인 외에는 알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아마노는 영혼을 볼 수 있는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하여 진실 혹은 그에 가까운 사실을 알아냅니다.

 

특수 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아마노로선 그 능력을 영업에 써먹을 수도 없습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뿐더러 영혼을 통해 얻은 정보가 현실에서 증거로 채택될 리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마노 본인조차 그 정보 자체를 정확히 해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혼을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지만 영혼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자면 죽은 자의 시점으로 과거의 일이 무성영화처럼, 그나마도 툭툭 잘리거나 심하게 낡은 영상으로 보이는데,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탐정답게 추리해내야 하는 것이 아마노에겐 꽤나 벅찬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수 능력이든 탐정으로서의 추리력이든 둘 중 하나라도 확실하면 좋겠지만 어중간한 두 개의 능력은 명탐정을 꿈꾸는 아마노에겐 핸디캡 중의 핸디캡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핸디캡이 아마노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그 부족함을 인간적이고 성실한 노력으로 채우려는 아마노의 행보는 처음엔 좀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시점인가부터 응원해주고 싶을 만큼 순수하고 진정성 있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꼼꼼하게 질문을 하고 솔직한 태도로 의뢰인을 대하는 아마노는 비록 명탐정과는 거리가 멀지만 훨씬 더 믿음직한 카리스마를 발휘합니다. 또 좀처럼 그 의미나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영혼을 통해 얻은) 정보들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고민한 끝에 소기의 성과를 내지만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소탈함 역시 그의 캐릭터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독한 미스터리나 명탐정 캐릭터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따뜻함이 배어있는 가벼운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마음에 쏙 들 작품입니다. 읽는 동안 아마노의 이야기가 이 한 편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후속작부터는 (이 작품에 등장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인물과 콤비 플레이를 펼친다고 합니다. 아마노와는 전혀 대조적인 캐릭터인 그 인물이 가세한다면 아마노의 부족한 부분이 많이 채워질 것 같은데, 좀더 성장하고 진화한 아마노가 어떤 사건들과 마주치게 될지, 어떤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키워갈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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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
아시자와 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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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 해에만 네 편의 작품을 한국에 출간해 주목받았던 아시자와 요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누구든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하지만 사소한 실수나 그릇된 대처 때문에 끔찍한 상황으로 돌변하고 마는 서늘한 아이러니가 다섯 편의 작품을 통해 그려집니다.

왜 하필 내가 불치병에 걸렸을까, 라며 자신의 불운을 원망하던 아내가 남편이 고백한 끔찍한 과거 이야기 속에서 ‘운’에 관한 진실을 찾는 이야기(‘단지 운이 나빴을 뿐’), 어이없는 실수로 학교 수영장 물을 유실한 뒤 그걸 모면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지만 결국 더 큰 화를 자초하고 만 교사(‘벌충’), 이웃 남자의 고독사가 치매 초기인 아내와 자신의 실수 때문이라 자책하던 노인이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망각’), 영화감독 데뷔를 코앞에 뒀다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 30대 남자(‘매장’), 요리 책 베스트셀러 작가가 9년 만에 다시 만난 띠동갑 불륜남 때문에 겪게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미모사’) 등이 실려 있습니다.

 

(‘매장’을 제외하곤)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상황들이지만 그것들이 주인공의 사소한 실수나 그릇된 대처 때문에 점차 해결 불가능한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극단적인 설정의 공포물보다 독자의 심장을 더 쫄깃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주인공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걸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평균 5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매 작품마다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톤은 2021년에 출간된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와 비슷하지만, 장르의 다양함이라든가 이야기의 깊이 면에서는 살짝 못 미친다는 생각입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가 일상 속의 공포와 미스터리, 서술트릭, 그로테스크 호러 등 팔색조 같은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면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는 양념이 좀 덜 들어간 싱거운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다섯 편의 수록작 가운데 세 편(‘벌충’, ‘망각’, ‘매장’)은 무척 재미있게 읽어서 절반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목에 관한 설명을 담은 ‘옮긴이의 말’ 혹은 ‘해설’이 실리지 않은 점입니다. 등장인물 중엔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라는 비난을 들을 만한 인물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의 ‘손’이 더러운 건 아니었고, 또 모두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어딘가에 더러운 손을 닦으려 한 것도 아니라서 굳이 수록작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록작을 포괄하는 듯한 비유적인 제목을 단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가만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재미있게 읽은 세 편의 주인공이 이 제목과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런 해석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을 시작으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을 다섯 편째 읽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콤비가 주인공인 ‘나의 신’을 제외하곤 모두 평점 4~4.5개를 줄 정도로 제 취향에 아주 잘 맞는 작가입니다.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연작 미스터리지만 따뜻한 감성의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지금껏 외면 중입니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21년까지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이 모두 13편이니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이 남았다는 뜻인데, 그건 저와 비슷한 취향의 독자에겐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번 독특한 이야기를 선보이는 아시자와 요가 다음엔 한국 독자에게 어떤 놀라움을 안겨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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