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라의 비밀 약방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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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런던의 뒷골목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약방. 손님은 살의를 지닌 여자들이며, 약제사 넬라가 파는 것은 ‘남자를 죽이는 독’입니다. 오래 전 연인의 지독한 배신 이후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넬라는 엄마에게 물려받은 약방에서 ‘남자를 죽이는 독’을 팔아온 것입니다. 어느 날 심부름 온 12살 하녀 엘리자를 만난 뒤로 넬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현재의 런던.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캐롤라인은 결혼 10주년 여행을 위해 잡아놓은 런던의 호텔에 홀로 투숙합니다. 템스강에서의 유물 찾기 이벤트에 참가했다가 하늘색 약병을 주운 캐롤라인은 역사학도다운 호기심에 약병의 사연을 알아내려 애씁니다. 그리고 그 약병이 200년도 훨씬 지난 과거에 한 약제사에 의한 연쇄 독살살인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유물을 매개로 하여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잇는 방식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넬라의 비밀 약방’은 과거의 연쇄살인사건을 현재의 인물이 추적한다는 미스터리와 함께 ‘여성문학’의 서사가 묵직하게 깔려있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남자에게 배신당한 뒤 ‘남자를 죽이는 독’을 만들게 된 약제사 넬라가 18세기 런던의 주인공이라면, 남편의 불륜 때문에 삶 자체가 뒤흔들린 것은 물론 지금까지 자신이 결혼이란 제도에 묶인 채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된 캐롤라인이 21세기 런던의 주인공입니다. 200년도 넘는 간극이 있지만 넬라와 캐롤라인은 남자, 사회, 제도라는 공적(共敵)을 둔 여자이자 자신을 옭아맨 것들과 과감히 싸우거나 그것들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한 투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절망과 배신감에 휩싸인 여자들에게 독약을 팔던 넬라의 일상을 뒤흔든 건 12살 하녀 엘리자입니다. 독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약제사 넬라에 관한 궁금증에 사로잡힌 엘리자는 비밀약방의 모든 것이 그저 매력적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제 막 초경을 시작했지만 그것을 (자신이 배달한 독을 먹고 사망한) 귀족의 유령이 내린 저주 때문이라고 여긴 엘리자는 혹시라도 넬라가 그 유령을 퇴치할 약을 제조해줄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엘리자의 지나친 관심을 냉정하게 밀어내면서도 오래 전 뱃속 아기를 잃은 기억이 있는 넬라는 엘리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복잡 미묘한 관계는 결국 비밀약방을 큰 위기에 빠뜨리고 맙니다.

 

원래 역사학도로서 런던 유학까지 계획했다가 결혼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던 캐롤라인이 공교롭게도 템스 강가에서 발견한 작은 약병 하나 때문에 다시금 역사학도의 열정을 불태운다는 점,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억누르고 포기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과정 역시 무척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캐롤라인이 모든 구속과 관습을 깨고 진정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된 성장 스토리라고 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불분명하긴 하지만 약제사 넬라에게서 닮은 느낌 혹은 연대감까지 느끼는 캐롤라인의 행보는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시선을 끕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넘나들며 공명하는 세 여성의 고통과 환희와 비밀스러운 연대. 런던의 화려한 외양 뒤에 가려진 어둠으로 입장하는 초대장.”이라는 알라딘 소설MD 권벼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핵심을 잘 압축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틀은 무척 단순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넬라와 캐롤라인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전개되고 막판에 거듭된 반전까지 곁들여진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금세 완독할 수 있습니다. 영상미를 강조한 설정도 많아서 영화로 제작된다면 원작 이상의 매력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넬라의 비밀 약방’을 18세기 런던을 멋지게 구현한 대형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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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차가운 일상 ㅣ 와카타케 나나미 일상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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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와카타케 나나미는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이치노세 다에코라는 여성을 만납니다. 화려하고 거침없는 인상의 다에코는 와카타케에게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내자고 제안하지만, 정작 얼마 후 자살을 시도한 끝에 의식불명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날, 와카타케는 다에코가 우편으로 보낸 ‘수기’를 받습니다. 거기엔 마음속에 차가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한 독살범의 고백과 함께 다에코가 기록한 충격적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단 하루, 그것도 몇 시간 만난 게 전부지만 다에코의 수기를 읽은 와카타케는 그녀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탐정’ 역할에 뛰어듭니다.

 

‘나의 차가운 일상’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로 유명한 와카타케 나나미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한국에서 세 번째 개정판으로 나온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이 1991년 3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나의 차가운 일상’이 그해 10월에 출간됐으니 불과 7개월 만에 연이어 나온 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 이름이 작가와 동명인 와카타케 나나미인데, 그래선지 한국에선 ‘와카타케 나나미 일상 시리즈’로 명명됐습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이 12편의 단편을 통해 사보 편집자인 와카타케 나나미와 익명의 작가 사이에 벌어지는 추리의 향연을 그리고 있다면, ‘나의 차가운 일상’은 직장을 그만둔 와카타케 나나미가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만난 미지의 여인 때문에 탐정 역할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지금까지 읽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그 어느 작품과도 뚜렷이 차별될 정도로 형식과 내용 모두 독특한 작품입니다. 2중 3중의 서술트릭과 밀실트릭이 등장하고, ‘진범 찾기’ 자체보다 수기를 남긴 채 의식불명에 빠진 다에코의 삶을 역추적하는 이야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와카타케 나나미 특유의 냉소적이거나 돌발적인 서사는 여전한데, 특히 오지랖 넓은 좌충우돌 탐정 하무라 아키라를 꼭 닮은 ‘아마추어 탐정 와카타케’의 캐릭터는 다소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도 수시로 독자의 웃음을 자아내는 매력적인 요소입니다.

 

다에코는 왜 이 ‘수기’를 쓴 것일까? 왜 나에게 이 ‘수기’를 보낸 것일까? ‘수기’ 속 무자비한 독살범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일까? 이 ‘수기’는 다에코의 유서일까, 아니면 그녀를 살해될 운명에 빠뜨린 흉기일까?

 

여러 의문에 휩싸인 가운데 “누가 다에코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하려 했나?”, “수기에 등장하는 독살범은 누군가?”가 와카타케의 1차 미션이지만, 정작 그녀의 집요한 탐문이 얻어낸 결과는 팩트보다는 “다에코의 삶 이면을 지배해온 어둡고 차가운 그 무엇”이 대부분입니다. 덕분에 시간이 갈수록 다에코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 그녀가 정말 살해된 건 맞는지, 만일 자살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수습할 수 없는 혼란이 와카타케를 괴롭힙니다.

또한 억압과 폭력에 의해 일그러진 가족, 바보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한 한 독살범의 증오와 살의, 진심인지 허언인지조차 모호한 왜곡된 사랑, ‘제대로’ 이어진 거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인간관계 등 다에코를 둘러싼 심리적인 요인들이 워낙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와카타케는 명쾌한 탐정소설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복잡 미묘한 심리 미스터리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막판에 와카타케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긴 하지만 이런 설정들 때문에 독자로서는 개운함과는 거리가 먼, 무척이나 씁쓸한 여운을 맛보게 됩니다. 마치 여러 사람의 심연을 한꺼번에 들여다보다가 스스로 괴물이 될 뻔한 순간에 가까스로 발을 뺀 느낌이랄까요?

 

전부는 아니지만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은 메모가 필요할 정도로 무척이나 복잡하고 산만한 구성을 지닌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 복잡함과 산만함을 해독하고 해석하는 게 ‘와카타케 나나미 읽기’의 진짜 매력이긴 하지만 때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독자의 호불호를 가르는 경계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의 차가운 일상’은 팩트나 단서보다 심리적 요인들이 많이 개입돼서 그런지 같은 페이지를 두세 번씩 되읽은 경우가 더 많았는데, 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어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뒤에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좀더 확실히 맛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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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ㅣ 와카타케 나나미 일상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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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사보 편집자가 된 와카타케 나나미는 “딱딱한 훈계성 기사보다는 재미있는 단편소설을!”이라는 상부의 요구를 받고 작가인 선배에게 의뢰하지만 그는 사양하며 대신 단편 미스터리를 잘 쓰는 후배를 소개해줍니다. 창작보다는 자신이 겪은 일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든다는 그 후배의 유일한 요구조건은 자신의 이름과 신상을 철저히 감춰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익명의 작가’의 단편 미스터리 연재는 1년에 걸쳐 이어집니다. 미스터리, 호러, 괴담, 유머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가까운 사람의 하소연이나 부탁을 받은 주인공 ‘나’가 추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들입니다. 1년의 연재가 종료된 뒤 와카타케 나나미는 12개의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치명적인 비밀을 눈치 챕니다.

 

개정판 덕분에 세 번째 읽게 된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일본에서 1991년에 발표된 와카타케 나나미의 데뷔작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본 딴 주인공을 사보 편집자로 등장시킨 점도 재미있고, ‘익명의 작가’가 기고한 12편의 단편 속에 그려진 크고 작은 일상 미스터리도 흥미롭지만,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연재가 끝난 뒤 ‘익명의 작가’와 와카타케 나나미가 벌이는 추리의 향연입니다.

단편집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아무래도 “‘익명의 작가’가 기고한 독특한 단편 모음집”으로만 여기기 쉬운데, 혹시라도 설렁설렁(?) 읽는다면 추리 대결이 펼쳐지는 ‘조금 긴 듯한 편집후기’라는 후반부 챕터에서 꽤나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12편의 단편을 꼼꼼히 읽으며 그 안에 숨겨진 작은 단서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담아두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반드시 두 번은 읽어야 제대로 진가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막판의 거듭된 반전에 감탄하고도 두 번 읽는 걸 내켜하지 않는 독자 역시 꽤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12편의 단편 가운데 다소 모호하거나 비약이 심하거나 “그래서 뭐?”라는 반문이 들게 만드는 수록작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사보 편집자인 와카타케 나나미가 12편의 단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낸다는 설정은 너무나도 흥미롭지만, 정작 12편의 단편 자체의 매력이 조금은 미약하다고 할까요? 고백하자면, 서평을 쓰지 않던 10여 년 전에 처음 이 작품을 읽었고, 그때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지만 실은 다시 읽는 동안 “내가 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다 읽은 뒤에 그 좋은 기억의 근거가 막판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 때문이란 걸 깨닫긴 했지만 말입니다.

 

10여 년 전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이후 와카타케 나나미와는 단편집 ‘어두운 범람’ 외엔 만날 일이 없었는데, 2020년 출간된 ‘이별의 수법’ 덕분에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시리즈 주인공인 하무라 아키라의 캐릭터에 홀딱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루 48시간도 부족한 열혈 탐정 하무라 아키라의 활약은 읽는 사람조차 숨을 헐떡이게 만들 만큼 초고속 폭주 미스터리의 마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 같은 매력적인 주인공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미스터리를 그린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독자에 따라 살짝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면 데뷔작부터 심상치 않아 보이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저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껴 읽겠다는 핑계로 책장에 방치해놓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문득 떠오른 건 세 번째 책읽기에도 불구하고 데뷔작의 저력에 다시 한 번 반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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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
하야미 카즈마사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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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살 다니하라 교코는 중간급 규모인 도쿄 무사시노서점의 6년차 계약직 직원입니다. 오래 전부터 서점직원을 꿈꿨던 그녀는 7㎡에 불과한 자취방의 네 면 중 세 면을 책으로 채울 정도로 소설을 좋아하고, 박봉인 탓에 월급날 직전이면 지갑이 텅텅 비는데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소설을 사들이지 않곤 배기지 못하는 마니아 독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점 환경도 불만스럽고, 서른이 코앞인 계약직이라 미래도 불안하고, 무엇보다 하나같이 이기적이기만 한 소설가, 출판사, 영업사원에다 책에 대한 애정 하나 없으면서 진상만 부리는 고객은 말할 것도 없고, 너무나도 바보 같아 수시로 분노를 유발시키는 서점의 사장, 점장, 동료들 때문에 속을 끓이는 가운데 다니하라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둔다”와 “계속 다닌다”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일본 역시 출판계가 불황이라곤 하지만 가끔 책을 만드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읽고 나면 여러 가지로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꿈의 사전(事典)을 제작하는 겐부쇼보 출판사 사전편집부의 분투를 그린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와 인쇄업계를 무대로 “인쇄는 책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 이상주의자와 “인쇄는 책을 찍어내는 일”이라고 단언하는 합리주의자의 이야기를 그린 ‘책의 엔딩 크레딧’(안도 유스케)입니다. 이 두 작품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진심을 진지하고 묵직하게 그린 정극이라면 계약직 서점직원을 주인공으로 앞세운 ‘점장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는 경쾌하고 코믹하면서도 서점이란 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상과 애환을 코끝 찡하게 그려낸 밝은 톤의 작품입니다.

 

6년째 1엔도 오르지 않은 박봉에 암울한 미래가 걱정되는 주인공 다니하라는 “이딴 직장, 진짜 정말로 그만둘 테다!”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발하면서도 끝내 서점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저 “좋아하는 책에 둘러싸여, 좋아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작가에게서 받아 애정 어린 고객에게 고이 전달한다.”는 서점직원으로서의 사명감과 행복을 차마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만큼 책 혹은 책과 관련된 사람들 때문에 느끼는 절망과 좌절도 깊습니다. 다니하라가 보기에 너무나도 바보 같은 존재들 – 점장, 소설가, 서점 사장, 출판사 영업사원, 손님 - 은 진정 책을 사랑한다기보다 젯밥이나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계약직 서점직원에 불과한 다니하라는 수시로 돌직구 같은 직언을 날립니다. 오로지 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믿고 말입니다.

 

일본에서 개최되는 여러 문학상 가운데 미스터리 분야를 제외하고 가장 관심을 갖는 건 ‘서점대상’입니다. 소설가나 편집자가 아닌 전국의 서점직원들이 그해 신간들을 대상으로 ‘가장 팔고 싶은 책’을 뽑는데, 덕분에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들이 상을 받곤 합니다. (이 작품도 ‘2020년 서점대상’에서 9위를 차지했습니다.) 관심도 관심이지만 가장 궁금했던 건 “과연 서점직원들이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요즘은 오프라인 서점에 가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한국의 서점에서 직원이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책을 독자에게 추천하는 일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책을 독자에게 전해주려 애쓰는 서점직원 다니하라는 제겐 무척이나 신기해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직원이 있는 서점이라면 온라인서점이 아무리 할인을 해준다고 해도 일부러 발품을 팔아서라도 찾아가고 싶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장르물 편식이 심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한사람으로서 한 권의 책이 독자의 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바보 같던 주변사람들과 부딪히고 교류하면서 그들의 진심과 속내를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자신도 바보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 다니하라의 이야기는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또 다른 면모를 만끽하게 해줬습니다.

일본 서점의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다니하라의 이야기가 예쁘게 포장된 판타지인지, 현실을 잘 반영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리얼리티의 수준이 50%뿐이라 하더라도 그저 부럽기만 할뿐입니다. 언젠가 한국의 서점에서도 다니하라 같은 직원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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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의 것들 ㅣ 이판사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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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어지는 공포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한...

무섭지만 시선이 빨려 버리는 듯한 그런 공포”(p226)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문예평론가 이케가미 후유키)

 

2017년 출간된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서늘한 기척’은 제목에 걸맞게 수록작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하는 기이한 이야기들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나 남겨 놓은 자취들은 대부분 온기가 도는 것들입니다. 그런 탓에, 좀 이상한 조어지만,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호러’라고 명명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집 ‘이형의 것들’ 역시 전작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수록된 여섯 작품 중 세 편은 고이케 마리코 특유의 ‘따뜻한 호러’이고, 나머지 세 편은 ‘정통에 가까운 호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망자가 품은 어찌할 수 없는 미련과 안쓰러운 집착을 그린 ‘숲속의 집’,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이세계(異世界)를 경험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히카게 치과 의원’, 노년에 이른 여자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과 이웃하고 지냈던 반세기 전의 시절을 회상하는 ‘붉은 창’ 등 세 편은 한 문예평론가의 표현대로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입니다.

반면 질투와 원망이 가득 찬 귀신 얼굴을 본 딴 가면을 쓴 여자와 마주한 뒤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얼굴’, 남편이 죽은 뒤 집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국의 유령 때문에 전율하는 한 여자의 사연을 다룬 ‘조피의 장갑’, 메이지시대부터 온천여관 지하동굴에서 목격된 두 유령 이야기를 그린 ‘산장기담’ 등은 사념 혹은 원념에 바탕을 둔 정통 호러에 가까운 작품들입니다.

 

주제나 소재 자체가 ‘따뜻한 호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고이케 마리코만의 개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달고 찬 민트 같은 냄새가 가득한 겨울 숲”, “(거무스름한 우윳빛 같은) 음울한 안개”, “잘 익은 토마토의 과즙 같은 저녁놀” 등 오감을 자극하는 풍성한 감각적 묘사들입니다. 분명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들’을 다루는 괴담집임에도 불구하고 고이케 마리코가 풀어놓은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시적 혹은 미적 표현들에 빠져들다 보면 정작 무서움보다는 안쓰러움이나 애틋함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데, 그 덕분에 단순히 기괴한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역점을 둔 일반 괴담집과는 전혀 다른 결의 서사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진짜 무서운 괴담을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 있다는 점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 취향의 독자라면 미쓰다 신조나 스티븐 킹을 택해야 하겠지만, 가끔은 고이케 마리코의 특별한 괴담을 간식처럼 맛보는 것도 아주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입니다. 무서움보다는 애틋함이, 소름보다는 온기로 채워진 괴담에 흥미를 가진 독자라면 고이케 마리코의 괴담집을 꼭 찾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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