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딱 한 개만 더 ㅣ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가 형사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입니다. 편당 50페이지 안팎에 불과해서 복잡하거나 정교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수록작 모두 가가 형사의 매력과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미스터리를 잘 담아냈습니다. 또한 등장인물도 가가 외에 극소수라 대부분 가가와 범인의 ‘2인극’이라 할 수 있고, 범죄 역시 흉악함보다는 그 이면의 사연들이 더 강조되는 ‘일상 살인미스터리’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수록작들의 얼개를 대략 살펴보면, 사회적 명성 때문에 저지른 치명적인 거짓말 하나가 어떤 비극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모두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지만 실은 그 이면에 가족 혹은 부부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가가의 추리를 통해 폭로하는 ‘차가운 작열’,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건 어머니의 비극이란 소재 때문에 범행의 진실이 드러났을 때 더욱 더 소름을 돋게 만든 ‘제2지망’(개정판 제목은 ‘두 번째 꿈’), 남편의 학대에 절망한 아내가 마지막 탈출구를 모색하지만 아이러니한 비극에 마주치고 마는 이야기를 다룬 ‘어그러진 계산’, 친구의 교통사고에 의심을 품은 가가가 자신이 목격한 작은 단서들을 통해 친구 부부의 내밀하고도 서글픈 사연을 파헤치는 ‘친구의 조언’이 수록돼있습니다.

 

사회적 명성이라는 허상을 다룬 표제작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를 제외하곤 모두 가족 혹은 부부의 갈등이 범죄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살인을 야기한 갈등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이슈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에다 육아의 책임까지 떠맡은 전업주부의 일탈이라든가 아내를 도구로 여기는 남편의 폭력과 학대,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려는 집착에 가까운 교육열 등이 갈등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트릭 자체를 강조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작품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경향이 상대적으로 짙어보였습니다.

 

언제나처럼 가가는 “사소한 힌트를 바탕으로 범행에 쓰인 도구와 방법을 밝혀내는 예리한 관찰력”(역자 후기)을 발휘합니다. 결정적인 단서와 증거보다 담배 냄새나 샴푸 냄새, 싱크대의 유리컵이나 벽에 걸린 초등학생의 그림 같은 일상 속 흔적들이 더 큰 추리의 단초들입니다. “모든 건 현장에 있다.”는 교훈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셈인데, 덕분에 마치 일선 형사들을 위한 ‘교과서’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반전도, 복잡한 미스터리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감을 풍성하게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장편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이 작품을 통해 가가 형사와 처음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일본 미스터리 마니아지만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카무라 후미노리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일곱 편 가운데 ‘쓰리’와 ‘왕국’을 읽었고 ‘교단 X’는 도중에 포기했는데, 비교적 쉽고 선명한 서사의 ‘쓰리’ 외에는 읽을수록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고 혼돈만 가중되는 경험을 거듭했습니다. 그런 탓에 책장에 보관 중인 ‘악과 가면의 룰’은 도저히 읽어낼 자신이 없어 기약 없이 방치해 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미궁’이 8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약간의 기대를 품고 읽어보기로 결심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절반,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절반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엄마와 그런 아내를 광적으로 감시하는 아빠, 사춘기의 성적 욕망을 여동생에게 푸는 아들과 오빠를 피해 다니는 딸. 묘하게 뒤틀린 가족이 집에서 죽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22년이 흐른 지금, 살아남은 딸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라는 설정만 보면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미스터리로 예단하기 쉽지만, 늘 ‘악’을 테마로 인간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그려온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단순히 “누가 범인? 진실은 무엇?”을 넘어 한껏 일그러진 여러 인간의 심리와 그들이 느낀 출구 없는 미궁의 공포에 방점을 찍습니다.

 

어릴 적부터 음울함에 휩싸인 채 내면에 또 다른 인격을 만들기도 했던 신견은 30대 법률사무소 직원이 된 지금, 겉으로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 온통 위악만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바에서 만나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나에가 22년 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걸 알게 된 신견은 미궁에 빠진 그 사건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사건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추리로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밀실상태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이 신견의 추리로 해결될 리는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견은 사나에로부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그녀의 가족사와 함께 범행 당일의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언뜻 앞뒤가 잘 맞아 보이긴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위화감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사나에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을 만난 이유를 듣곤 충격과 안도감이라는 이질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낍니다.

 

“나답지 않은 짓을 하자고 생각했다. 내 존재의 경향과 반대되는 짓을 해보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항상 건전하게 살라고? 뭘 위해서?” (법률사무소 직원 신견)

 

“나를 소유해줘. 당신 것으로 만들어. 나를 좀 더 사랑해줘. 죽여도 좋아.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좋아.” (22년 전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나에)

 

위악에 사로잡힌 채 22년 전 사건에 집착하는 신견과 사건 이후 내면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사나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시종 기묘한 공포와 섬뜩한 이물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타인의 일그러진 마음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거기엔 희망이나 긍정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의심, 증오, 욕망, 비관, 공포,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온통 오염된 듯한 두 사람에게 해피엔딩이란 가당치 않은 일로 보이고, 미스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어느 새 관심사에서 멀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길고도 긴 악몽 한 편을 꾼 듯한 으스스함이 전신을 지배합니다. 24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몇 배는 되는 듯한 서사에 억눌린 기분도 함께 말입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기승전결이라는 평범한 구조와도 거리가 멀어 독자 입장에선 결코 편하게 읽힐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독특한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 어느 작품보다 높은 몰입감과 만족도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반의 만족과 절반의 아쉬움을 느낀 제 경우엔 책장에 방치된 ‘악과 가면의 룰’을 읽을 일이 더더욱 기약 없는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저 언젠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가 그를 죽였다 ㅣ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명 소설가와 신예 시인의 결혼식을 앞두고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신랑의 집에서 한 여성이 자살한다. 신랑은 매니저와 함께 시체를 그녀의 집으로 옮기는 등 필사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감추려 한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그 자신이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독살당하고 만다. 여동생을 향한 뒤틀린 사랑으로 인해 질투에 눈이 먼 신부의 오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살로 몰고 간 신랑에게 증오심을 불태우는 신랑의 매니저, 한때 죽은 신랑과의 결혼을 꿈꿨다가 배신당한 편집자. 이들 모두 그를 죽이고 싶어 했고, 스스로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독약을 건넸는지가 모호한 가운데, 가가 형사는 특유의 냉정하고 빈틈없는 추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인 ‘내가 그를 죽였다’는 전작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남녀의 애정 문제가 살인사건의 저변에 깔려 있고, 용의자는 극소수(전작은 2명, 이 작품은 3명)이며, 마지막까지 범인이 누군지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아 “독자와의 추리대결! 궁극의 범인 찾기 소설”로 불린다는 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말미에 추리과정을 설명하는 ‘봉인 해설’이 수록돼있지만, 후룩후룩 읽은 독자라면 그 ‘해설’을 읽고도 범인을 바로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어느 대목을 다시 읽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가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교묘하고도 감쪽같이 매복시켜놓았습니다.

 

자살로 추정되는 사건과 독살이 분명한 사건 등 두 개의 죽음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유명 소설가이자 각본가인 호다카 마코토가 결혼식장에서 독에 의해 사망하자 경시청 수사1과가 수사에 나섭니다. 그러던 중 마코토와 연인관계였던 준코가 자신의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자 관할서인 네리마 경찰서의 가가 형사가 투입됩니다. 용의자를 세 명으로 압축시킬 수 있었던 건 마코토를 죽인 독약이 평소 그가 지니고 다니는 필 케이스(휴대용 알약통)에 들어있었고, 결혼식 당일 그 필 케이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게 단 세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용의자 세 명이 한 챕터씩 1인칭 화자를 맡아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마코토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 심정을 자신이 화자를 맡은 챕터에서 절절하게 풀어놓습니다. 또, 마코토가 죽은 뒤에는 모두 “내가 그를 죽였다.”라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내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그를 죽였다.” (담당편집자, 유키자사 가오리)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나는 꼭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매니저, 스루가 나오유키)

“내가 준 독에 의해 그 녀석이 죽어가던 광경은 지금도 눈꺼풀에 낙인처럼 찍혀 있다.” (신부 미와코의 오빠, 간바야시 다카히로)

 

말하자면 세 명의 용의자는 자신이 마코토를 죽였다고 확신하면서도 가가의 집요한 탐문을 이겨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처지에 처한 셈입니다. 누가 범인이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가는 집요한 탐문을 통해 세 용의자의 허점을 정확하게 포착해냅니다. 한때 모든 가설이 장벽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가가는 누구든 허투루 여겼을 게 분명한 작은 단서를 통해 범인을 특정합니다. 그리고 “범인은 당신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이 작품의 막을 내립니다.

 

근친상간, 증오, 배신감 등 어둡고 음습한 감정을 품은 용의자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라든가 사소한 단서들과 평범한 진술 속 허점을 파고들어 범인을 찾아내는 가가의 매력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단번에 완주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빠른 템포와 함께 독자의 자발적인 추리를 이끌어내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필력도 여전합니다.

다만, “독자와의 추리대결!”이란 형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진범 찾기에 참여하겠지만,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숨겨놓은 단서는 너무나 미시적인 것이라 알고 나면 다소 허탈해질 수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독자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홀려놓곤 약간 모호한 정보를 결정타 삼아 범인을 특정한 건 ‘반칙’으로 여겨질 여지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가가 형사 다시 읽기’ 가운데 이제 절반을 마친 셈인데, 3편인 ‘악의’를 제외하곤 오래 전 기억과 마찬가지로 다소 평범한 미스터리로 읽혔습니다. 가가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발휘됐다고 기억하는 작품들이 대부분 후기작들(구체적으로는 시리즈 7편 ‘붉은 손가락’부터 마지막 편까지)이라 지금까진 예열 단계라고 생각해왔는데, 다음 작품인 ‘거짓말 딱 한개만 더’는 단편집이라 기억이 더욱 애매모호해서 ‘예열의 마지막 편’이 될지 ‘진면목의 첫 편’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대감을 갖고 조만간 달려볼 예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ㅣ 첩혈쌍녀
소피아 베넷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9월
평점 :
절판


아흔 살 생일을 앞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윈저성에서 열린 연회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충격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다분히 변태적인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시신의 상태 때문에 철저한 보안 하에 보안정보국과 경찰이 비밀리에 내사를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일 방문객과 성의 직원들까지 샅샅이 조사하지만 좀처럼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 수사책임자인 보안정보국장이 러시아의 암살 음모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여왕의 혼란은 더욱 깊어집니다. 여왕의 선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캐는 것. 여왕은 신참 보조비서 로지를 비롯한 측근들을 지휘하여 사건의 진상을 하나둘씩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올해 9월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주인공인데다 그녀 자신이 ‘왕관을 쓴 미스 마플’, 즉 미스터리 해결사로 등장한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끈 작품입니다. 노인이나 주부 등 아마추어 탐정이 활약하는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윈저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현직 여왕”은 저 같은 취향의 독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자칫 “러시아 남자, 여왕의 파티에서 섹스에 탐닉하다 사망해!”라는 기사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 철저한 보안이 이뤄진 가운데, 사건 전날부터 윈저성에 묵은 50여 명의 방문객과 수백 명에 달하는 성의 직원들을 상대로 벌이는 수사는 초반부터 난항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수사의 두 주체는 명확히 다른 관점을 드러냅니다. 보안정보국의 수장 개빈 험프리스가 “푸틴의 지시를 받은 내부 스파이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반면, 여왕의 직감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직감을 입증하기 위해 측근들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여왕이 측근들을 고르는 기준은 좀 독특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수족과 같은 자라 해도 자신을 그저 ‘블로그가 뭔지도 잘 모르는 90살 할머니’로만 여기는 자들은 일부러 배제합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자, 자신과 소통이 되는 자들을 선택합니다. 왕실 기마포병대에서 복무한 뒤 여왕의 보조비서가 된 지 고작 6개월밖에 안 된 신참 로즈메리 그레이스 오쇼디(이하 로지)가 선발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과거 경호팀에서 일하다 은퇴한 빌리 매클라클런 역시 이런 맥락에서 여왕의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직접 수사에 뛰어들 수도, 관련자들을 탐문할 수도 없는 여왕을 위해 로지와 빌리는 분주하게 발품을 팝니다. 특히 로지는 여왕의 최측근이자 자신의 직속상관인 사이먼 경마저 속여야 하는 것은 물론 비밀리에 대포폰까지 마련하는 등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스파이’ 역할에 때론 당황하기도 때론 묘한 흥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왕관을 쓴 미스 마플’을 보좌하던 전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측근들을 활용하여 미스터리를 풀어내긴 하지만 정작 여왕 자신이 해결사란 점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측근들이 모아온 결정적인 단서와 자신이 직접 추리하여 얻어낸 사건의 진상을 티 안 나게 넌지시 던져주고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수사에 가담한 측근 1~2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이런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발산하는 쾌감’을 맛볼 수 없다는 단점도 지니는데, “윈저성에서 펼쳐지는 본격 탐정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여왕이 자기만의 방식 - 능청스럽고 우아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기술 - 으로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을 그린다.”(p389)라는 ‘역자 후기’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못잖게 70년 가까이 왕위를 지켜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소소한 일상들이 매력적으로 읽혔는데, 어쩌면 불과 얼마 전에 그녀가 서거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필립 공과의 소박한 부부생활, 증손녀의 생일을 기다리는 작은 기쁨, 애마(愛馬)에 대한 무한하고도 따뜻한 애정, 그리고 윈저성의 모든 직원들에 대한 푸근한 배려 등 여왕의 일상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난이도나 그 결과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런 미덕들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설원
다이몬 다케아키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3년 교토. 유망한 법대생 야기누마 신이치가 친구인 남녀 두 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10년이 넘는 긴 재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은 신이치는 수기까지 발표하며 무고함을 주장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아버지 에츠시를 포함하여 그 누구와의 면회도 결단코 거부합니다. 전단지까지 돌리며 아들의 무죄를 호소하던 에츠시는 어느 날 충격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을 메로스라고 칭한 자가 “신이치는 무죄이며 진범은 자신.”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더구나 자수의 대가로 5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요구하자 에츠시는 혼란에 휩싸입니다.

 

올해(2022) 초 출간된 다이몬 타케아키의 ‘완전무죄’를 무척 흥미롭게 읽어서 2009년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과 TV도쿄상을 수상한 ‘설원’의 출간을 고대해왔습니다.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와 진범 찾기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완전무죄’와 마찬가지로 ‘설원’은 사형제도의 문제를 진범 찾기 서사 속에 잘 녹여낸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원통함을 씻어준다”(雪寃)는 뜻의 제목만 봐도 이 작품의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 신이치의 무죄를 확신하는 전직 변호사 에츠시가 이야기를 이끄는 가운데 신이치에게 사랑하는 언니를 빼앗긴 임상심리사 나츠미, 선대 변호사의 뒤를 이어 신이치의 변호를 맡은 이사와, 무슨 이유에선지 에츠시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듯한 길거리 뮤지션 모치다 등 가해자와 피해자 주변 인물들이 진실 찾기 공방을 벌이며 동시에 사형제도의 문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과연 신이치는 누명을 쓴 것인가? 전화를 걸어온 자는 진짜 범인인가? 그렇다면 그가 두 명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죄를 신이치에게 뒤집어씌운 건 애초부터 계획했던 것인가? 등 여러 겹의 이야기가 빠르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일반적으로 사형제도 논쟁은 “응징이 필요하다.”는 찬성론과 “원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폐지론으로 갈립니다. 하지만 ‘설원’의 주인공인 에츠시의 입장은 좀 독특합니다. “존치(찬성)론자들이 피해자 유족의 원통한 마음을 근거로 드는 건 치사한 짓이야. 누명을 쓰고 잡혀 들어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폐지론의 근거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야.”라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말하자면 사형 역시 살인행위란 관점에서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에츠시조차 진범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그 자를 찾아내 죽이고 말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남의 일’로만, 혹은 논쟁거리로만 여겼던 사형제도가 자신의 일이 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에츠시 외에도 여러 사람의 입을 빌어 사형제도의 존폐에 관한 여러 의견을 소개하는데, 정답 없는 어려운 논쟁이긴 하지만 이만큼 다양한 관점을 접한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엔 여러 차례 큰 변곡점이 등장하는데, 각 변곡점들이 모두 대형 스포일러라 더 이상 자세한 내용 소개는 곤란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지극히 짧게 초반부만 소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다만 독자의 예상이나 기대를 매번 엇나가게 하는 의외의 전개 덕분에 마지막까지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좀처럼 추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작인 ‘완전무죄’와 마찬가지로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아쉬운 점도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형제도에 관한 논쟁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점이 부담스러웠는데, 주요 인물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사형제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설정된 탓으로 보입니다. 더 아쉬웠던 건 막판에 밝혀진 진실이 어떻게 봐도 현실감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진범’으로 드러난 인물의 정체도 정체지만, 과연 저런 생각과 행동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과 함께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엔딩은 독자에 따라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무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 그중에서도 원죄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서 한국에 소개된 다이몬 타케아키의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일본에서 펴낸 것만 30여 편에 이르는 그의 나머지 작품들이 좀더 많이 한국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