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하우스
피터 메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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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아들을 사고로 잃고 절망감에 빠져있던 에든버러 경찰서 형사 핀 매클라우드는 상부의 지시로 18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 루이스 섬에 파견됩니다. 한 달 전 에든버러에서 벌어진 것과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데다 피살자가 핀의 지인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붕괴된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던 고향에 돌아온 핀은 어떻게든 과거와 마주치는 걸 회피하려 하지만 피살자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망령과도 같은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게 됩니다. 지독한 상처만 남긴 첫사랑, 애증으로 뒤얽힌 절친, 따돌림과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 그리고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런 절해고도에서의 2주간의 잔혹한 전통 집단사냥 등 핀에게 있어 루이스 섬은 모든 게 악몽일 뿐입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한 스릴러는 더 북쪽에 있는 북유럽 배경 스릴러와는 또 다른 서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과 분리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가 스릴러의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땐 특유의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그 서늘함을 더욱 강조하곤 합니다. 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루이스 섬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자연환경과 그에 맞서온 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일 경우에는 (작가 본인의 설명대로) “휘몰아치는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깎아지른 절벽과 매서운 파도,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섬사람들의 가혹한 삶”이 서늘함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맨 뒤에 실린 ‘영국 및 루이스 섬 지도’를 보면 주인공 핀의 고향이 얼마나 척박하고 거친 환경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폭풍우가 몰아치고, 본토와의 거리 탓에 생활양식마저 유폐된 루이스 섬은 지리적‧기후적‧심리적 고립감을 자아내며 폐쇄된 공간 특유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사실상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루이스 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섬 자체가 사람들의 삶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한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블랙하우스’의 중심서사는 ‘범인 찾기’가 아니라 과거의 참혹한 유령들과 18년 만에 정면으로 마주선 핀의 고통과 회한으로 보입니다. 분량으로 봐도 핀이 태어나 섬을 떠나기까지의 시간들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 보이는데, 독자에 따라 그 대목들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핀이 맞닥뜨려야 할 극적인 엔딩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설정이므로 작가가 집요하리만치 세세하게 그려낸 디테일들을 놓치지 말고 차분하게 읽어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루이스 섬에는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이 있습니다. 육지에서 80km나 떨어진 절해고도 ‘안 스커’에서 12명의 사냥꾼이 2주에 걸쳐 가넷새의 새끼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수천 마리의 새끼 새를 잡아 목을 자르고 내장을 꺼내고 염장을 하여 육지로 돌아오는 이 참혹한 전통은 루이스 섬에서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단 한 번 이 사냥에 반강제로 끌려갔던 핀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의 삶을 불안하게 뒤흔드는 악몽입니다. 아들을 잃은 상태에서 영원히 잊고 싶었던 고향에 돌아와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핀의 캐릭터를 더욱 심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 ‘새끼 새 사냥’은 왜 표지에 “스코틀랜드 호러 스릴러”라는 문구가 인쇄됐는지를 120% 공감하게 만드는 설정입니다.

 

핀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주력하던 이야기는 막판에 이르러 약간은 막장에 가까운 코드들이 터지면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급선회합니다. 동시에 살인사건을 놓고 제각각의 태도를 보여 온 섬사람들의 수상쩍은 행태의 이면도 속속들이 파헤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핀이 마주한 건 미친 듯이 날뛰는 바다와 그 너머에서 자행될 예정인 또 하나의 살육극입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 것만 같은 최악의 상황이 핀을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핀의 과거 장면이 다소 장황하게 이어질 때는 기대했던 스릴러 서사와 많이 달라 보여서 이른 실망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대목을 견디고 마지막 장에 이른다면 이 작품의 깊이와 무게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이스 섬 3부작’의 첫 편인 이 작품의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거친 자연, 폐쇄적인 공간, 잔인한 관습, 그리고 거기에 순응하거나 저항해온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이 한데 빚어낸 독특한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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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미스터리 키친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진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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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혹은 요리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은 기타모리 고의 ‘가나리야 시리즈’입니다. 단번에 시선을 잡아 끈 제목에 홀려 읽은 시리즈 첫 편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포함 모두 세 작품이 출간됐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뒷골목 맥주바 가나리야의 마스터 구도 데쓰야가 단골손님들의 삶의 비애와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여섯 가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딱히 음식이나 요리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잔혹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부드럽고 달달할 게 99% 확실한 소프트 미스터리를 멀리 했던 탓으로 보입니다.

 

그런 제가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을 읽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전적으로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직전에 출간된 ‘절벽 위에서 춤추다’는 별 3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줬지만 그 전에 읽은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와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각각 4.5개, 5개의 높은 평점을 준 바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겐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라는 뜻입니다.

 

출판사가 명명한 이 작품의 장르는 ‘미식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 순수한 일상 속 사연들을 다루고 있으니 더 엄밀히 얘기하면 ‘미식 일상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자인 나쓰미와 그녀의 남편 겐타, 대학교수이자 안락탐정인 나가에와 그의 아내 나기사,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초등학생 다이와 사키 등 모두 여섯 명이 등장합니다. 두 부부는 번갈아 자기 집에서 술과 음식을 곁들인 만남을 이어갑니다. 나쓰미-나가에-나기사는 대학시절부터 절친이자 술친구였고 후일 나쓰미가 겐타와 결혼한 뒤에도 이 특이한 술자리는 지속됐습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10여년의 공백이 있었고 이제 예비중년이 된 그들은 다시금 좋은 술과 맛난 음식이 곁들여진 소소한 즐거움을 되찾게 됐습니다.

 

일곱 편의 수록작 모두 같은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와인, 소주, 사케 등 다양한 주종과 함께 로스트비프, 연어 술지게미 절임, 오징어내장구이 등 맛깔난 안주들로 채워진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도중 화자인 나쓰미가 문득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립니다. 그 일들이란 가십거리에 불과한 사소한 것들이지만 모두들 그 뒷이야기 혹은 숨겨진 사연들을 제멋대로 추리하기 시작합니다. 쌍둥이 자매가 서로 다른 날 학원을 다닌 이유, 싱글맘인 후배 여직원이 뒤늦게 ‘이상한’ 결혼을 한 이유, 자녀를 1류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애쓰던 부모들이 맞이한 의외의 결과, 완벽한 스펙을 갖춘 남자가 이혼당한 이유, 감상문 숙제를 하기 싫어한 초등 3학년생의 기발한 노림수 등 일상에서 목격할 수 있는 흔한 사연들이 그 추리의 대상입니다.

 

미스터리의 소재를 제공하는 나쓰미와 그녀의 남편 겐타, 그리고 절친인 나기사는 속된 말로 ‘아무거나 막 던지는’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난상토론이 벽에 부딪힐 때쯤 대학시절부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뛰어난 두뇌를 샀다.”라는 말을 들어온 대학교수이자 안락탐정 나가에가 아무도 생각 못한 기발한 발상을 통해 진실을 추리해냅니다. 물론 사연의 당사자들이 그 자리에 없으니 정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수긍할 법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나가에의 추리는 왠지 심심하고 밋밋할 것만 같던 ‘미식 일상 미스터리’를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놓습니다. 주목할 일 없는 작은 단서에서 진실을 찾아낸다든지 의외의 역발상으로 사연 속 인물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나가에는 그 어떤 범죄 미스터리 속 명탐정보다 뛰어난 매력을 발산합니다. 거기에 읽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술과 안주가 곁들여져 있으니 ‘본격 식욕자극 미스터리’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합니다.

 

저 역시 이번에 알게 됐지만 이 작품에는 전작이 있습니다. 2016년에 국내에 소개된 ‘나가에의 심야상담소’가 그것인데, 화자인 나쓰미와 안락탐정 나가에, 그리고 그와 결혼한 나기사가 대학생이던 시절 자신들의 술자리에 초대된 손님들의 사연에 감춰진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을 먼저 읽은 제겐 프리퀄이 돼버린 작품인데, 그들의 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 역시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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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
나타엘 트라프 지음, 이정은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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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는 없는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아무 정보 없이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8년, 프랑스의 소도시 발미쉬르라크의 마르셀비알뤼 고등학교에 다니는 레오는 6일 앞으로 다가온 학년말 축제 때문에 긴장상태입니다. 짝사랑하는 발랑틴을 어떻게든 축제 파트너로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거리 곳곳에 30년 전인 1988년 축제의 밤에 호숫가에서 사체로 발견된 17살 여고생 제시카를 추모하는 포스터가 걸립니다. 당시 목격자는 제시카의 몸에 폭행의 흔적이 있다고 증언했지만 경찰은 단순사고로 결론을 냈습니다. 그 포스터를 볼 때까지만 해도 레오는 자신과는 무관한 과거의 일로 여겼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믿기 어려운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달력은 제시카가 살해당하기 6일 전인 1988년 6월이었고, 얼굴과 몸도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타임슬립 청춘 성장소설’에 ‘살인 미스터리’가 곁들여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타임루프. 타임리프, 타임워프, 타임슬립 등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작품들이 워낙 많아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지만, ‘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은 나름대로 독창적인 서사를 펼쳐 보입니다.

 

우선 “하루가 두 번씩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1988년, 또 한 번은 2018년.”(p104)이라는 설정이 눈길을 끄는데, 말하자면 1988년의 월요일을 산 레오는 다음날엔 2018년의 월요일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레오가 ‘두 번의 하루’를 사는 건 모두 6일이며, 마지막 날은 1988년과 2018년 모두 축제일입니다. 특히 1988년의 그날은 제시카가 살해든 사고든 죽음을 맞이한 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1988년의 6일 동안 레오가 매일 다른 인물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두 제시카와 관련된 인물인데 때론 여학생의 몸으로 깨어날 때도 있어서 레오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과거를 바꿔도 현재는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타임슬립 서사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입니다. 레오는 매번 다른 인물로 1988년의 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이른바 ‘자유의지’와 ‘운명’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특히 자신이 빌린 몸의 주인들이 30년 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아는 경우에는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데, 자유의지로 반짝반짝 빛나던 1988년의 17살 청춘이 30년 후 꼴사납거나 우울한 중년으로 전락하는 게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바꿔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레오는 소소한 말과 행동으로 ‘변화’를 시도해보기도 하는데, 그 결과는 다음날인 2018년이면 레오의 눈앞에 즉시 나타나곤 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1988년이든 2018년이든 17살 청춘의 열정과 사랑과 고민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좀더 빛나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치지만 현실은 좀처럼 청춘들에게 희망 한 조각 쉽게 내주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레오와 독자를 사로잡는 건 ‘실제 1988년’ 축제날 죽음을 맞이한 제시카가 ‘레오가 존재하는 1988년’에 과연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입니다. 레오의 목표는 어떻게든 제시카의 죽음을 막는 것이지만 그것은 2018년 현재를 어마어마하게 뒤바꿔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엔딩을 선사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청춘 성장소설의 분위기가 워낙 강해서 ‘타임슬립 미스터리’에 큰 기대를 건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인데다 프랑스 작품임에도 쉽고 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져서 금세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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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ㅣ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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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3편인 ‘악의’부터 7편 ‘붉은 손가락’까지 네리마 경찰서 소속이던 가가는 이 작품부터 니혼바시 경찰서로 소속을 옮깁니다. (시리즈 1편 ‘졸업’에선 대학생으로, 2편 ‘잠자는 숲’에서는 경시청 수사1과 소속으로 등장합니다.) 낯선 곳에 부임한 터라 스스로 ‘신참’이라 자칭하며 사건 수사와 함께 니혼바시의 곳곳을 익히고 배우는 모습이 함께 전개됩니다.

 

“이 동네에 대해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른바 신참이죠.” (p354)

 

첫 출간 당시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45세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사건과는 무관한 ‘휴먼 일상미스터리’처럼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모두 아홉 편의 연작단편이 실려 있는데, 범인을 체포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마지막 편 외에 모든 수록작이 “탐문 대상자인 니혼바시 사람들이 품고 있던 내밀한 사연이나 비밀을 가가 형사가 풀어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탐문 대상자들만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본의 아니게 가가가 해결해주는 구조라고 할까요? 암에 걸린 어머니 때문에 고민하는 아들, 호스티스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남편 때문에 열받은 요릿집 여주인, 감당할 수 없는 고부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남자,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딸 때문에 격분한 아버지 등 사건 자체와는 무관하지만 목격자 또는 용의자인 탐문 대상자들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가가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합니다.

 

“가가 씨는 사건 수사를 하는 게 아니었나요?”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자입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p278)

 

그렇다고 해서 가가가 살인사건 수사에 소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사에 집중한 덕분에 탐문 대상자들이 감추거나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자연스레 알게 되고 그 해법과 조언을 진심을 담아 건네곤 합니다. 안 그래도 사소한 단서와 평범한 진술 속에서 진실과 진상을 알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가가가 ‘동네에 대해 공부하는 신참’의 자세를 성실하게 견지했기에 누구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내밀한 사연들을 눈치 챌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가가 센베이 가게 젊은 딸에게 “가가 형사님! 또 땡땡이치는 거에요?”라는 정감어린 꾸중을 듣는 대목은 이 작품의 재미가 함축된 장면입니다.

 

에도 문화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동네 니혼바시라는 무대는 스토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정감어린 곳입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여행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규슈의 히타(日田)인데, 시대물 배경으로도 손색없는 그곳의 조용한 정취가 무척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니혼바시 역시 곳곳에 노포가 자리 잡은 ‘올디스 벗 구디스’의 향기가 진한 곳으로 묘사돼있습니다. 그곳의 속살을 기웃거리며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가가의 모습은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볼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주며 조금씩 진상에 다가가던 가가는 마지막까지 그다운 카리스마와 따뜻한 온기를 전해줍니다. 가가의 예리한 추리와 탐문 덕분에 범인은 체포되고 상부는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 가가는 범행 이면의 진짜 사연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는 가가가 냉정한 형사지만 동시에 얼마나 상대를 배려하는 속 깊은 인물인지를 잘 그려냅니다. 그의 새 상사인 니혼바시 경찰서장은 “이번에 좀 재미난 형사를 데려왔다. 머리는 좋은데 삐딱하고 고집이 세다.”라고 표현하지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형사들이 가가를 절반만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작품 말미에 처음으로 가가가 왜 경시청에서 네리마 경찰서로 좌천됐는지 잠깐 설명이 됩니다. 살인사건 재판에서 변호 측 증인, 즉 범인을 비호하는 증언을 한 탓에 유족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좌천됐다는 점만 설명될 뿐 구체적으로 어느 사건인지까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가가가 유일하게 경시청 형사로 등장했던 두 번째 작품 ‘잠자는 숲’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추정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이제 ‘가가 형사 시리즈 다시 읽기’도 단 두 편만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남은 두 편 모두 정통 미스터리와 함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전개되는데, 그래서인지 더는 가가 형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아껴 읽고 싶지만 니혼바시의 ‘신참’ 가가가 또 어떤 성장을 보였을지 궁금해서라도 조만간 두 편 모두 폭주하듯 달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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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가락 ㅣ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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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노모,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아내, 제멋대로인 중3 아들과 함께 사는 40대 가장 아키오는 퇴근 직후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마당 한쪽에 어린 소녀의 사체가 비닐에 덮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이란 사실을 아내에게 듣곤 망연자실해집니다.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아내는 아들을 살인범으로 만들 수 없다며 목에 가위를 들이대면서까지 반대합니다. 결국 아키오는 소녀의 시신을 유기하지만 다음날부터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아키오와 아내는 끝내 아들의 살인을 은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경찰을 속이기 위해 누구도 떠올리기 어려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붉은 손가락’은 ‘가가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지만 시리즈 가운데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 2006년에 출간된 작품이 바로 다음 해 한국에 나왔으니 출판사가 최신간을 먼저 소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때까지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고 매력적인 작품이라 먼저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가정이라는 ‘밀실’과 가족애라는 ‘굴레’, 그 어두운 초상”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붉은 손가락’은 어린 소녀가 살해된 사건을 통해 평범해 보이던 한 가족의 민낯과 고통,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그립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던 아키오의 가족은 중3 아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인해 벼랑 끝에 몰립니다. 이성과 상식이 남아있었다면 순리대로 처리했겠지만 부모의 그릇된 선택은 그나마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던 가족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현대화에 따른 가족의 해체, 고령화 사회의 노인 문제, 청소년 범죄 등 폭넓고 다양한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는 옮긴이의 말대로 ‘붉은 손가락’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아키오의 가족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힌트를 바탕으로 범행에 쓰인 도구와 방법을 밝혀내는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 가가는 탐문과정에서 느낀 위화감과 잠깐 목격했을 뿐인 평범한 풍경 때문에 아키오의 가족에 주목합니다. 대단한 추리나 번득이는 혜안이나 천재적인 직감이 아니라 그야말로 관찰력의 힘만으로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간다는 뜻인데,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 ‘붉은 손가락’에선 그 능력이 진짜 형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덕목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특성상 기계적으로 범인을 지목하기보다는 ‘스스로 죄를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인상적인 태도를 취해서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듭니다.

 

사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가가의 가족사입니다. 관할서 형사인 가가의 파트너가 된 경시청 수사1과의 마쓰미야 슈헤이는 가가의 외사촌동생입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자라면서 외삼촌, 즉 가가의 아버지 다카마사에게 큰 도움을 받은 마쓰미야는 그를 존경한 나머지 경찰까지 됐고, 현재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그를 극진히 간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가가가 아버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자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수사 도중에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가가의 불행한 가족사, 특히 어머니의 가출과 불행한 죽음을 알게 된 뒤론 다카마사를 향한 가가의 감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 마쓰미야는 가가와 함께 가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살인사건 수사를 벌입니다.)

 

살인사건에 휘말린 붕괴 직전의 아키오의 가족과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힌 나머지 뿔뿔이 흩어지고 만 가가 가족의 이야기는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에게 묵직한 인상을 남깁니다. 따뜻한 인성을 품었지만 냉철한 형사이기도 한 가가가 평소와 다른 태도로 사건에 임한 건 아마도 산산조각 난 아키오 가족에게서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가가는 네리마 경찰서를 떠나 니혼바시 경찰서에 몸담습니다. 그 첫 이야기가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인 ‘신참자’인데, 역시 ‘붉은 손가락’ 못잖게 매력적인 작품이라 오랜만에 다시 읽을 생각만으로도 기대감에 들뜨게 됩니다. 물론 ‘가가 형사 시리즈’가 이제 세 편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그만큼 커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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