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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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사이인 남녀가 모텔에 체크인했다.

얼마 후, 여자는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못 쉰다며 119 신고를 요청한다.

남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죽었고, 여자에게 거액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검찰은 계획적인 보험 살인으로 보고 사형을 구형했다.

사건 정황과 법의학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부장판사 현민우는 여자의 범행을 확신하지만,

좌우 배석판사들은 합의과정에서 그와는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이렇게 반박한다.

“그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을 거친 판결이냐?”고...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소위 ‘국민들의 법 감정’이란 말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은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이 선고됐을 때나

명백히 유죄라고 생각했던 피고인에 대해 무죄 또는 집행유예 등의 판결이 나올 때면

일반인들은 “도대체 판사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판결을 내렸을까?”라며 공분하고,

언론은 “국민들의 법 감정과 거리가 먼 판결입니다.”라는 코멘트를 달곤 합니다.

 

이런 판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입니다.

요점은 “피고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인데

말하자면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판사는 이 원칙에 대해 서로 상이한 입장을 견지합니다.

주인공인 부장판사 현민우는 설령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더라도

정황과 추론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면 충분히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배석판사 정남희는 피고가 명백히 범인으로 보이긴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고,

또 다른 배석판사 민지욱은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피고는 무죄일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있는 사건만 존재한다면 판사는 참 편한 ‘직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은 판사라면 절대 맡고 싶지 않은 골칫덩어리입니다.

사건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모텔방에서 벌어졌고,

애초 사고로 여겨졌기 때문에 부검 없이 시신이 화장된 뒤였고,

시간도 많이 흘러서 관련자들이나 의사들조차 명확한 기억이 없는데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몸에 ‘살인의 흔적’이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 때문에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해 혼란을 겪던 부장판사 현민우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보인 모습이나 피해자 가족의 진술 등 정서적인 면에 더 끌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배석판사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사실, 판사는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없는 이런 사건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 소위 몇 가지 원칙이란 게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가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경우에 따라 판사에게는 곤란함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회피의 도구로,

흉악범에게는 극적인 면죄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물론 거꾸로 무고한 피고인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도구이기도 하죠.

결국 이 원칙을 누가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인 판사의 역할은 그만큼 막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 때문에 이 작품은 “피고는 유죄? 무죄?”, “진범은 따로 있나?” 등의 미스터리 대신

오히려 ‘판사論’에 가까울 정도로 판사들의 고뇌와 다양한 모습들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도진기의 극적인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놀라운 반전들 덕분에 무척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조금은 불친절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엔딩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는데,

‘젤리 살인사건’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겪은 부장판사 현민우가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재판에서 보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마지막에 그가 받은 편지 속 사연(스포일러라 이 정도만^^)은 다소 억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진 시리즈’나 ‘진구 시리즈’가 아닌 현실감 있는 판사의 이야기는 색다른 맛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도진기의 매력은 역시 꼴통(?) 캐릭터와 독한 미스터리의 조합인 게 분명합니다.

꽤 오래 소식이 없는 ‘고진 시리즈’와 ‘진구 시리즈’를 올해는 꼭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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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인형 살인사건 ㅣ 봉제인형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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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아파트에서 서로 다른 여섯 사람의 신체 부위를 꿰매서 이어 붙인 시신이 발견된다.

희생자들의 정체도, 그들의 공통점도 찾아내지 못한 채 수사가 미궁에 빠질 무렵,

런던 경시청의 울프 형사에게 편지 한 통이 전달된다.

그 편지는 또 다른 여섯 명의 이름과 날짜가 적힌 살인예고장.

울프는 희생자들의 신원을 찾으면서 동시에 살인예고장 속 인물들을 보호하려 분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희생자만 늘어날 뿐 범인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작은 단서에서 찾아낸 희생자들 사이의 공통점은 울프를 충격에 빠지게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언뜻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설정입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물론 사건의 성격이나 범인의 캐릭터 등 서사는 전혀 다르지만,

여섯 명의 사체를 훼손하여 봉제인형처럼 만든 범인의 광기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에서 느낀 으스스함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울프는 본명인 윌리엄 폭스 대신 약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런던 경시청 형사입니다.

유능한 경찰이긴 하지만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일에 매몰되는 캐릭터인데,

4년 전에는 자신이 체포한 연쇄 방화살인범이 무죄판결을 받자 법정에서 그를 폭행했고,

그로 인해 정신병원 감금과 강등까지 감내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봉제인형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울프의 강박증이 또다시 도지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봉제인형’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맞은 편 건물에서 발견된데다

그 ‘봉제인형’의 손가락이 자신의 아파트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파트너였던 백스터와 풋내기 형사인 에드워즈의 집요한 탐문은

봉제인형이 된 희생자들이 과거 울프가 다뤘던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밝혀내는데,

문제는 그 시점부터 울프 본인마저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진범의 정체와 사건의 경위가 모두 밝혀지는 2/3지점까지는 대체로 재미있게 읽힙니다.

봉제인형처럼 끔찍하게 꿰매어진 시체, 그 봉제인형을 구성하는 희생자들의 신원 찾기,

살인예고장 속에 거론된 인물들의 정체와 그들을 놓고 대치하는 범인과 경찰의 대결,

주인공 울프를 둘러싼 런던 경시청 내의 정치적 갈등과 부당한 압력,

그리고 다채로운 경찰 캐릭터에 더해 선정적으로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 등

다소 고전적이면서도 잔혹성과 속도감을 겸비한 설정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별 3개라는 제법 짠 평점을 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울프라는 주인공이 있지만 정작 그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중요한 탐문과 단서는 울프보다 조연들이 더 열심히 다니고 찾아낸다는 얘깁니다.

울프와는 연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관계에 있는 다혈질 형사 백스터를 비롯

어리바리한 듯 보이지만 나름 집요함과 추리력을 지닌 신참 형사 에드워즈,

울프와 함께 현장을 뛰었던 관리직 시몬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핀레이 등이 그들인데,

그렇다고 올프가 그 시간에 좀더 중요한 미션을 수행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엔딩을 보면 울프가 왜 그리 안 보였는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납득하긴 어렵네요.)

 

잘 보이지도 않던 주인공이 갑작스레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주인공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면

아무래도 그 대목은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게 읽힐 가능성이 높은데,

바로 그 점이 짠 평점의 두 번째 이유입니다.

막판에 드러난 ‘봉제인형 살인사건’의 실체와 거기에 울프가 연루된 정황에 대한 설명은

아무리 되읽고 다시 생각해봐도 반전을 위한 반전 또는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였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은 어렵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가장 기피해야 할 방식의 클라이맥스와 엔딩이란 느낌이었고,

결국 울프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2016년 런던도서전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라고 하니 후한 평점을 준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만들어진 캐릭터에 비해 마무리가 허술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알라딘 평균 평점이 별 4개인 걸 보면 재미있게 읽은 독자도 있다는 뜻이니

저의 짠 평점 때문에 미리 실망하지 말고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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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전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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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에도 시대, 마을 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괴멸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집들은 남김없이 파손되었고 사람들은 전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조사하러 간 무사들까지 연락이 두절된 가운데,

화상을 입은 채로 겨우 목숨을 건진 이 마을 소년에 의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린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이 작품의 원제는 황신(荒神)입니다.

네이버에서 한중일 사전을 다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

굳이 따지자면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신’이라고 할까요?

낯설기도 하고 애매해서 그런지 몰라도 번역 제목은 다소 직설적인 ‘괴수전’이 됐는데,

이 작품에는 원제와 번역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괴수’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흉측한 모습과 극강의 파괴력을 지닌 괴수는

일본 동북지방에서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마을에 나타나

수많은 인명을 앗은 것은 물론 마을 자체를 초토화시켜버립니다.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이 작품에는 한국영화 ‘괴물’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시리즈 중 하나로 꼽는 영화 ‘에일리언’도 자주 떠올랐는데,

이 두 작품은 물론 ‘괴수전’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똑같은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그릇된 탐욕과 악의가 그것입니다.

100여 년 전, 상대를 궤멸하기 위해 주술과 신의 힘을 빌려 괴물을 만든 이들은

자신들의 후대에 이 괴물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낼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괴물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찬 채 무차별적인 식인과 파괴를 자행하고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던 두 마을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물론 괴물을 만든 이들은 혹시라도 벌어질 비극을 막기 위해 마지막 방어선을 준비해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극을 미리 막아낼 순 없었습니다.

 

6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에는 괴물과 인간의 대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갈등, 즉 100년 넘게 서로를 원수처럼 여겨온 두 마을의 갈등은

괴물 못잖게 이야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설정입니다.

왕래는커녕 살짝 경계만 넘어와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이던 고야마 번과 나가쓰노 번은

괴물의 등장으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지만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더 큰 갈등을 빚습니다.

하지만 각 번에서 괴물에 저항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힘을 모으면서

이야기는 극적인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거기에 더해 (괴물의 탄생에 개입했던) 가문의 저주를 물려받은 인물들의 비극이 드러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이야기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분량도 어마어마하고 인물이나 서사 역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두께를 자랑하지만

‘괴수전’은 한 번 잡으면 좀처럼 중간에 쉬어가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주술과 신의 힘으로 탄생한 괴물’이라는 설정 자체를 못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취향이라 해도 ‘괴수전’은 ‘황당한 괴물’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아이러니한 점은 미야베 미유키의 근작이자 현대를 배경으로 괴물이 등장하는 ‘비탄의 문’은

분권된 1~2권 중 1권만 읽고 접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현대에 등장하는 괴물이라면 ‘괴물’과 ‘에일리언’처럼 개연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인데

‘비탄의 문’은 제가 볼 때는 그와는 다소 거리가 먼 순도 높은 판타지 설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술과 신의 힘으로 탄생한 괴물’이라는 설정이 훨씬 더 황당할 수도 있지만,

그런 설정에 빨려 들어간 건 역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로서의 미덕들(재미와 반전 등)이 다소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야베 월드 2막’의 모든 작품들을 애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시대물의 아날로그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미야베 월드 2막’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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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물 이야기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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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들을 보면 ‘오캇피키’라는 직책명이 자주 눈에 띄곤 합니다.

작품 속 각주를 그대로 옮기면,

‘치안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인 요리키나 도신 밑에서 범인의 수색, 체포를 맡았던 직책’인데,

공식적인 관리가 아니라 민간인으로서의 성격도 강해서 비교적 운신의 폭이 자유롭고,

특히 관할 주민들과 좀더 밀착 가능한 캐릭터라 시대물 미스터리에 단골손님이 된 듯 합니다.

 

주인공 모시치는 혼조 후카가와 일대를 맡고 있으며 일명 ‘에코인의 나리’라고도 불리는데,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할지역에서 벌어지는 대소사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인물입니다.

사실 모시치는 시리즈물의 주인공치곤 너무 소탈해서 아쉬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시치 시리즈’ 첫 편인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나 이 작품 모두

뭔가 대단한 미스터리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충격적인 반전을 다룬 것도 아닌,

말하자면, 소소한 일상 미스터리나 평범한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라

어쩌면 모시치 같은 인물이 훨씬 더 주인공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가 일대에 떠도는 7개의 불가사의를 소재로 삼았다면,

‘맏물 이야기’는 절기(節氣), 음식, 기구한 사연 등이 버무려진 현실적 일상 미스터리입니다.

초봄의 뱅어, 여름의 가다랑어, 가을의 단감 등 다양함 음식들이 이야기 속에 잘 녹아있고,

절기마다 행해지는 전통적인 놀이나 관습들도 미스터리 곳곳에 흥미롭게 배치돼있습니다.

모시치가 마주친 사건들 역시 소소한 해프닝부터 잔혹한 살인사건까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나름 기구하고 불가피한 사연들이 깔려 있어서 안쓰러움을 자아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을 해결한 모시치가 통쾌해 하거나 한바탕 웃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돈도, 권력도, 비빌 언덕도 없는 서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는 모시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혼조 후카가와의 수호신 같은 존재입니다.

영웅적인 주인공은 아니지만 모시치는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맏물 이야기’는 미스터리로서의 충격적인 재미는 상대적으로 덜 한 편이지만,

모시치라는 인물을 통해 에도 시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들여다보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어지간한 미스터리 읽기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에서 모시치 만큼 흥미를 유발하는 세 명의 인물이 있는데,

영험한 능력을 지닌 기도사로 추앙받는(하지만 모시치에겐 영 못마땅한) 10살 소년 니치도,

전직 무사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다리 위에서 밤새 유부초밥을 파는 수상쩍은 노점 주인,

그리고 그 노점 주인과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폭력배 두목 가쓰조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아홉 편의 단편 대부분에 게스트처럼 잠깐씩만 등장할 뿐이지만,

모시치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으면서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킵니다.

 

수록된 작품들은 1994년부터 2003년에 걸쳐 몇몇 잡지를 통해 연재됐다고 하는데,

덕분에 미야베 미유키의 10년에 걸친 성장과 변화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다만, “아, 이 시리즈는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는 제대로 된 마침표 없이

모시치 시리즈가 더는 이어지지 않은 점은 무척 아쉬운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시치를 비롯 ‘흥미유발자’인 세 인물에게 제대로 된 엔딩을 부여할 수 있는

멋진 후속작(이왕이면 장편이면 최고겠지만)이 뒤늦게라도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이 2003년에 발표됐으니 벌써 16년이나 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시치 시리즈’의 멋진 완결을 바라는 건 저만의 기대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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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ㅣ 스토리콜렉터 72
스티브 캐버나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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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리우드의 톱스타 로버트 솔로몬이 아내와 경호원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전 미국이 발칵 뒤집혔고 이 역대급 형사재판에 모두의 눈과 귀가 쏠립니다.

그런 와중에 조슈아 케인은 이 재판의 배심원이 되기 위해 기상천외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한편, 한때 알코올중독자에 사기꾼이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변호사가 된 에디 플린은

대형 로펌으로부터 솔로몬의 재판에 차석 변호인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 받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에디는 솔로몬의 변호를 전담하게 되고

전직 FBI 요원 하퍼를 비롯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무죄를 입증하려 합니다.

 

● ● ●

 

법정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다 동명의 일본 미스터리(아시베 다쿠 作)도 재미있게 읽어서

배심원 제도가 확고히 시행되고 있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 관심이 갔습니다.

원제인 ‘Thirteen’은 엄밀히 말하면 ‘열세 번째 배심원’이라는 번역 제목의 의미보다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희대의 연쇄살인마의 살인행각 자체와 더 연관 있습니다.

하지만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범죄를 완성하기 위해 배심원이 된다는 설정을 생각해보면

나름 센스 있는 번역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조슈아 케인이라는 악당의 정체를 바로 공개합니다.

그리고 그가 로버트 솔로몬의 재판에 배심원이 되기 위해

애초 배심원 소환장을 받은 평범한 시민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곤 주인공 에디 플린이 솔로몬의 재판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과 함께

그가 어떤 변호사인지,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등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범죄를 완성하기 위해 배심원단이 된다는 설정부터 무척 파격적입니다.

“악마의 가장 위대한 속임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믿도록 한 거요.”라는 서문은

단순히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겠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완전범죄가 아니라

명백한 단서와 정황을 꾸민 뒤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 경찰에 넘김으로써

자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게 만든 케인의 범행 패턴을 단적으로 설명해줍니다.

 

한편, 주인공 에디 플린의 캐릭터는 여기저기 할리우드 히어로의 캐릭터를 조합한 느낌인데,

한때 알코올중독에 사기꾼이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멘토를 만나 변호사로 변신했지만,

결국 자신이 맡은 사건 때문에 수차례 위험에 처한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입니다.

변호사로서 에디 플린은 유죄가 분명해 보이는 의뢰인은 절대 맡지 않는,

그러니까 돈이나 명예보다는 반골 기질이 적절히 믹스된 정의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솔로몬을 진범으로 추정했던 에디는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그의 무죄를 믿게 됐고

이어 적절히 배치된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끝내 연쇄살인마의 존재를 밝혀냅니다.

‘법정 안에 범인이 있다’는 확신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라서 크게 시비를 걸 만한 전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할리우드 스릴러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지능에 타고난 소시오패스 기질로 중무장한 완벽한 연쇄살인마와

선하고 정의롭고 똑똑한데다 가족에 얽힌 상처를 품에 안고 있는 변호사의 대결은

법정은 물론 법정 밖에서도 치열한 수 싸움과 강도 높은 폭력을 통해 벌어집니다.

주인공의 분노를 유발하는 저열하고 치명적인 적들도,

또, 주인공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매력적인 조연들도 잘 배치돼있어서

단순히 연쇄살인마와 변호사만의 투맨 쇼처럼 단선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독자에게만 정체를 드러낸 범인을 현실감 있게 또 개연성 있게 찾아내야 하는 주인공은

여느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주인공보다 훨씬 고될 수밖에 없는데,

반면, 그만큼 독자 입장에선 쫄깃한 긴장감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거기에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 반전을 거듭하는 증인심문, 수상한 배심원단의 동태 등

법정물 특유의 서사들까지 더해진 덕분에 페이지는 정말 순식간에 넘어가곤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재판이 열리기까지의 사전 설명이 다소 지루하고 설명적으로 읽혔다는 점인데,

그 대목의 분량을 조금만 줄였다면 더 임팩트 있는 전개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재판이 시작된 뒤부터는 이야기는 초고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는, 에디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난’ 동료들이 그를 구하는 장면들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되지만, 조금은 과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이야기 외적인 아쉬움은 번역에 관한 것입니다.

딱히 오타나 비문이 눈에 띈 건 아닌데, 문장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이 번역가의 작품 중 디온 메이어의 ‘페닉스’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썼던 서평에도 “거듭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대목들이 자주 등장했다.”라며,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놓았더군요.

별 0.5개가 빠진 큰 이유 중 하나가 번역 때문인 건 분명합니다.

원작 자체가 매력이 없다면 몰라도 이 작품의 경우 좀더 충실한 번역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에디 플린이라는 매력적인 변호사 캐릭터가 이 한 작품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후속작이 나온다면 정말 큰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조슈아 케인에 맞먹는 엄청난 악당이 등장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구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에디 플린의 새 이야기가 빨리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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