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립트 ㅣ 스토리콜렉터 15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박계수 옮김 / 북로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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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르노 슈트로벨은 2015년 ‘관’이라는 작품으로 먼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자들을 관에 가둔 채 생매장시키는 범인이 등장하는 끔찍한 이야기인데,

‘스크립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훨씬 더 잔혹한 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극단적인 소시오패스에 의한 예측불허의 범죄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관’이 심리 스릴러의 분위기를 띄고 있는데 반해

‘스크립트’는 사건 중심의 정통 스릴러로서 확연히 다른 색깔을 지닌 작품입니다.

 

여자를 살해하고 피부를 벗겨낸 뒤 소설을 새겨 소포로 보내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문제는 범인이 한 스릴러 작가의 소설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소설에 따르면 앞으로도 숱한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경찰은 경악합니다.

이 사건을 맡은 함부르크 경찰서 안드레아 마티센과 슈테판 에르트만은

유력 신문사 사장의 딸을 포함 최소 두 명 이상이 납치된 사실을 파악하고 수사에 나서는데,

소설을 쓴 작가, 담당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 소설가의 광팬이자 서점주인 등

이 사건으로 인해 이익을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수사는 혼선을 겪게 됩니다.

 

사건 자체도 끔찍하지만 잔혹한 범죄를 다룬 소설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또, 이전에 다른 지역에서도 이 소설가의 소설을 모방한 잔혹범죄가 벌어진 적이 있었고

그 사건이 현재까지도 미제 상태라는 설정 때문에 독자는 더더욱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소설가의 광팬인 불특정 소시오패스의 미친 범죄인지,

소설이 화제가 되면서 물질적 이익을 볼 소설 관계자의 계획범죄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수사를 맡은 마티센과 에르트만의 초동 수사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그에 덧붙여 두 형사의 특별한 관계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에르트만은 매사에 교과서적인 태도만 보이는 상관 마티센이 사사건건 못마땅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맡을 수도 있던 수사본부장 대리 자리를 그녀가 차지한 게 결정타였는데,

그런 마티센이 실은 상부로부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곤

점차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물론 상부에 함께 저항하는 파트너로 발전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케미가 메인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한 덕분에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나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장점도 많은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는데,

가장 큰 건 이야기의 몸통, 그러니까 마티센과 에르트만의 수사 과정입니다.

요점만 이야기하면, 이들의 수사는 소설 관계자들에 대한 반복적인 탐문이 전부입니다.

그들의 집을 찾아가고,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됩니다.

물론 ‘누구도 범인이 될 수 있다’는 독자의 의혹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솔직히 좀 지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막판에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고 예상외의 진범을 특정하는 대목은 나름 스릴감이 높지만

중간 과정의 느슨함은 예전에 읽은 ‘관’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점이라

아무래도 작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소한 것 두 가지만 더 얘기하면,

마티센과 에르트만은 범죄의 ‘원작’인 소설을 거의 읽지 않고 남에게 떠맡기듯 하는데,

그 소설은 범행 과정과 동기는 물론 다음 범행을 예측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될 수도 있지만

정작 수사를 맡은 두 주인공은 그다지 소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치 그 소설을 읽어버리면 수사가 너무 빨리 끝날 수도 있어서 일부러 회피한 느낌이랄까요?

또 하나는 ‘이름’까지 부여되고도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일부 조연들의 문제인데,

심지어 주요 용의자이자 납치된 여성의 남자친구는 중반부터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독일 또는 북유럽 특유의 잔혹한 소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 도전해볼만한 작품이고,

제 서평이나 출판사 소개글만 보고도 속이 불편한 독자라면 피하는 게 좋은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무척 좋아하는 장르지만 이야기 몸통의 느슨함 때문에 별 하나를 뺐는데,

이 점은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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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전화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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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비리 혐의로 경찰을 그만두고 연이어 가족이 해체되는 아픔까지 겪은 아사쿠라 신지.

어느 날, 이혼한 아내 나오미와 살던 딸 아즈사가 유괴되면서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는데,

아사쿠라는 나오미에게 유괴 사실을 경찰에 알리지 말 것을 요구하며 직접 수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아사쿠라는 딸의 유괴 사건이 단순히 몸값만 노린 것이 아니라

3년 전 자신이 경찰을 그만둬야만 했던 사건과 연관 있음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 ● ●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을 다섯 줄 정도의 줄거리로 요약했지만

사실 이 작품의 볼륨감은 6~700여 페이지 분량의 작품에 못잖게 방대하고 복잡합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먹는 숨 가쁜 추격 액션과 함께

막판까지 익명의 전화로 아사쿠라와 나오미를 조종하는 미스터리한 유괴범의 목적,

아사쿠라 가족의 비극을 갖고 온 3년 전 사건의 비밀, 경찰 내부의 수상쩍은 움직임 등

한시도 쉬어갈 틈 없이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가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경찰이었지만 더는 경찰을 믿을 수 없어 ‘외인부대’ 같은 조력자들을 구한 아사쿠라는

전처인 나오미에게도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친 채 고독한 추격전을 시작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유괴범이 요구한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아사쿠라의 쉴 틈 없는 분투는

글로 읽고 있는데도 숨이 차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급경사의 빠른 롤러코스터 같습니다.

나오미 역시 아사쿠라가 감춘 3년 전 과거와 현재 유괴사건의 연관성을 찾아 나서는데,

아사쿠라처럼 전직 경찰이었던 나오미는 딸이 유괴된 공포에 빠진 상태에서도

차분히 아사쿠라가 감춘 비밀과 진실을 찾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출판사 측에서 극히 일부만의 내용을 인터넷 서점에 소개한 걸 보면

서평을 통해 그 이상의 내용을 기술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데,

어차피 이 방대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할 방법이 없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하는 선에서 소개할 수 있는 내용은 대략 이 정도가 전부인 셈인데,

이만한 떡밥에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이라면 충분히 관심을 끌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매번 극적인 사건과 설정이 녹아든 사회파 미스터리를 터뜨려온 야쿠마루 가쿠가

유괴사건이라는 더는 새롭지 않은 소재를 어떻게 묵직한 주제의식 속에 담아냈는지

그의 팬이든 아니든 한번쯤은 접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조금 긴 사족으로...

같은 원작자, 같은 번역가, 같은 출판사의 작품인데

‘형사의 눈빛’에선 못 느꼈던 번역과 오타의 문제가 종종 눈에 띈 건 옥의 티였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의 오타(‘나오미’를 ‘나모이’로, ‘키시타니’를 ‘카시타니’로)는 물론,

줄 바꿈이 제대로 안 되거나 조사의 오타도 눈에 띄었고

비교적 쉽고 단순한 야쿠마루 가쿠의 문장이 다소 모호하게 번역된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번역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좀더 세심한 마무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 (일러두기를 통해) 화폐단위를 ‘1엔=10원’이라고 전제한 뒤 ‘엔’ 대신 ‘원’으로 표기했는데

이건 번역의 기초적인 상식에도 맞지 않아 보였고,

아사쿠라와 그 조력자들이 계속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 소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라인’처럼 일본에서 ‘카카오톡’이 상용화돼있어서 원작에도 그렇게 표기된 건지,

아니면 번역가가 임의로 ‘카카오톡’으로 번역한 것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만일 번역가의 임의라면 이 역시 너무 어이없는 오류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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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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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절대 영도’, ‘화촉’,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등 모두 세 편의 작품이 수록돼있습니다.

아동서적 편집자에서 대기업 회장의 사위로, 그리고 이혼 후 돌싱이 되기까지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해결하는 아마추어 탐정 노릇을 해왔던 스기무라 사부로는

전작인 ‘희망장’에서 드디어 전업 탐정으로 변신하며 자기만의 사무실을 갖게 됐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진짜 탐정이라 불릴 만한 나름의 성장을 겪게 됩니다.

 

미미 여사의 소개대로 스기무라 사부로는 명석한 탐정도 아니고 멋있지도 않고,

돈에 쪼들리는 것은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사건을 다루는 서민 탐정입니다.

결혼 상대자의 신상을 조회하거나, 오랫동안 못 만난 동창을 찾아주는 등

어쩌면 탐정보다는 흥신소나 심부름센터에 가까운 ‘사건’들이 스기무라의 주된 업무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수록된 세 편 가운데 적어도 두 편은 그런 편견을 무색하게 만드는데,

의뢰받은 일 자체는 그저 소소하고 일상적인 사건에 불과했지만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불길한 기운과 기분 나쁜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결국 엔딩에 이를 쯤엔 스기무라에게 꽤나 참혹한 비극과 상심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스기무라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즉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던 비극들이 벌어지지만

스기무라는 마치 자신의 책임인 양 자책과 후회에 빠지곤 합니다.

 

독자 입장에서도 사건이 해결됐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나 안타까움의 감정을 더 진하게 느끼게 되는데,

그만큼 스기무라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앞서 “진짜 탐정이라 불릴 만한 나름의 성장을 겪는다”는 건 이런 의미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스기무라가 본격적인 탐정으로 첫 발을 내디딘 전작 ‘희망장’도 네 편의 중편으로 이뤄졌고,

이 작품 역시 세 편의 중편으로 구성돼서 다소 아쉬움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희망장’에서 탐정으로서 시동과 예열을 거친 스기무라가

이번에는 좀더 묵직하고 난이도 높은 사건을 해결하는 장편의 주인공이길 바랐기 때문인데,

미미 여사는 아직도 스기무라에게 좀더 다양한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400미터 개인 혼영을 헤엄칠 수 없으니,

일단 50미터 자유형, 평형, 접영을 제대로 헤엄칠 수 있게 해야죠.”라고 했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번 세 편의 수록작을 통해 스기무라의 ‘훈련’은 충분해졌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아직도 대형 탐정사무소 ‘오피스 가키가라’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고 있지만,

다음 작품에선 (미미 여사 표현대로)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같은 어려운 사건도

능숙하진 못하더라도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편집자의 팁에 따르면 미미 여사는 스기무라의 다음 이야기를 꽤 여러 개 구상중인 듯 한데

부디 다음 작품에선 스기무라가 길고 묵직한 장편을 통해

(하라 료의 주인공인) 사와자키 급의 활약을 펼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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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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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제니와 딸 이지가 괴한에게 살해당한 후 장례식까지 마친지 벌써 3년.

하지만 게이브는 여전히 전단지를 들고 딸 이지를 찾아다닙니다.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간, 낯선 차에 타고 있던 살아있는 이지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지가 타고 있었던 낯선 차를 발견한 게이브는

트렁크 속 부패한 시신과 함께 ‘디 아더 피플’이라는 글씨의 흔적이 남은 수첩을 발견합니다.

‘디 아더 피플’이 사적 복수를 주고받는 은밀한 조직이란 걸 알게 된 게이브는

어쩌면 아내와 딸의 죽음이 자신의 과거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습니다.

 

● ● ●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범죄자가 넘쳐나는 세상. ‘디 아더 피플’이 대신 처리해드립니다.

의뢰한 모든 요청은 반드시 실행됩니다.”

 

‘디 아더 피플’은 다크 웹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은밀한 조직입니다.

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대로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법망을 빠져나간 죄인을 처단합니다.

그들은 처단에 관해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 신세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다른 처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걸 거부하는 자에겐 ‘디 아더 피플’의 잔혹하고 끔찍한 응징이 기다릴 뿐입니다.

 

사실, 출판사의 홍보카피만 봤을 때는 그렉 허위츠의 ‘살인위원회’가 떠올랐습니다.

사적 복수를 위해 모인 그룹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복수가 주된 내용일 거라 추측한 거죠.

하지만 ‘초크맨’의 C. J. 튜더라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적 복수를 다룰 것 같았고,

역시 기대한대로 전혀 새로운 서사가 450여 페이지의 분량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사적 복수를 위한 다크 웹 상의 조직) ‘디 아더 피플’은

이야기의 뒷면 혹은 행간에만 등장할 뿐 복수극의 전면에 나서지 않습니다.

또,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조직’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통쾌한 사적 복수를 기대한 독자들에게 의외의 설정으로 보이겠지만,

개인적으론 “상투적일 수도 있는 사적 복수를 이렇게 다룰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지는 특별한 경험을 겪은 작품이었습니다.

 

‘초크맨’ 서평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디 아더 피플’ 역시 초반부 이상의 줄거리를 소개하기가 난감한 작품입니다.

중요한 설정이나 변곡점들이 꽤 많다 보니 그 어느 것을 소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고,

그 부분들을 소개하지 않으면 두루뭉술한 인상 비평 이상의 서평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복수를 의뢰했다면 반드시 그 신세를 갚아야 한다는 ‘디 아더 피플’의 룰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참혹한 비극을 겪는다는 설정만으로도

스릴러 마니아의 기대와 관심을 얻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란 건 분명합니다.

 

사적 복수를 다룬 스릴러 서사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만큼 눈길을 끈 건 유려하면서도 적확한 언어들로 만들어진 ‘맛있는 문장들’입니다.

C. J. 튜더의 국내 출간작은 물론 스티븐 킹의 작품을 주로 번역한 이은선 님 덕분이지만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런 문장들을 구사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저절로 들 정도로

C. J. 튜더의 필력은 스릴러 서사 못잖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별 다섯 개도 모자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0.5개를 뺀 이유는 딱 한 가지인데,

왠지 작가가 욕심을 부린 것만 같은 사족 같은 호러 판타지 코드 때문입니다.

이 역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하게 소개할 순 없지만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현실 속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을 작품에

왜 굳이 낯설고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호러 판타지 코드를 넣은 것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사실 ‘초크맨’ 서평에도 “곳곳에서 스티븐 킹의 호러 판타지의 느낌을 받았다.”라고 썼는데

그런 걸 보면 아무래도 작가의 강력한 취향 중 하나가 스티븐 킹과 동류항인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질감이 너무 심한 나머지 막판에 살짝 어이없게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초크맨’과 ‘디 아더 피플’ 중간에 출간된 ‘애니가 돌아왔다’는 아직 못 읽었는데,

‘옮긴이의 글’을 보니 내년에도 C. J. 튜더의 신작이 나올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바빠집니다.

잉글랜드 남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음습하고 불길한 일들을 다룬다고 하니

아무래도 스티븐 킹을 연상시키는 호러 판타지 성향이 강한 작품일 것 같은데

‘초크맨’과 ‘디 아더 피플’에서 살짝 맛배기(?)만 보여줬던 작가가

어쩌면 자신의 진짜 취향과 진면목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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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퍼링 룸 ㅣ 스토리콜렉터 80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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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FBI 요원이었지만 뇌 임플란트를 통해 인간을 조종하려는 거대 조직에 맞서 싸우다가

오히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수배령이 떨어진 제인 호크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전작인 ‘사일런트 코너’에서 전도유망한 군인이던 남편 닉의 갑작스런 자살 이후

그 의혹을 쫓던 제인은 거대 조직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물론 그들과 정면대결을 시작했는데

‘위스퍼링 룸’은 거대 조직의 최상층을 향한 제인의 분투를 그린 작품입니다.

 

거대 조직의 뇌 임플란트와 나노테크놀러지는 인간성이 말살된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자신의 정체성과 기억을 모조리 상실한 채 오직 복종의 의무만 입력된 인물도 있고,

멀쩡해 보이지만 분명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닌 듯 ‘성질’ 자체가 변해버린 인물도 있고

단 한 줄의 ‘지시어’로 순식간에 수동적인 로봇처럼 순종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가장 최악은 슈퍼컴퓨터가 지목한 ‘더 나은 세상에 방해가 되는 불순물’로 하여금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소위 자살 유도 메커니즘입니다.

 

제인은 전작에서 확보한 거대 조직의 물증을 언론을 통해 폭로하려 하다 실패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인 데이비드 마이클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 그녀가 향하는 곳은 켄터키 주의 외딴 시골마을 아이언 퍼니스입니다.

한편, 오랜 지인이던 평범한 교사 코라가 일으킨 폭탄테러 때문에 충격을 받은 보안관 루서는

사건을 어물쩍 왜곡하려는 FBI에 의심을 품고 코라의 일기장을 통해 그녀의 행적을 쫓던 중

(제인이 향하고 있는 켄터기의 시골마을) 아이언 퍼니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확신을 갖곤

FBI 모르게 개인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뇌 임플란트와 나노테크놀러지를 통해 인간의 뇌를 장악하여 마음껏 좌지우지하는 것은 물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순물로 추정되는 인간을 자살에 이르게 만든다는 설정은

다소 황당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 벌어질 법한 SF 스토리를 연상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이 소재를 독자의 피부에 생생하게 와 닿는 지극히 현실적인 스릴러로 전개시킵니다.

‘현실적 스릴러’의 가장 큰 기반은 홀로 거대조직과 맞서 싸우는 제인 호크라는 캐릭터인데

독자에 따라 “너무 심한 슈퍼우먼 아니냐?”라고 반론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투쟁의 출발점을 그린 시리즈 첫 편 ‘사일런트 코너’를 읽어보면

그런 우려는 대체로 불식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크게 보면 제인과 루서가 켄터키 시골마을 아이언 퍼니스에서 만나게 되기까지가 전반전,

이후 그곳에서의 탈출극과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 데이비드 마이클을 향한 공격이 후반전인데

‘사일런트 코너’가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독자의 호기심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데 반해

이 작품은 핵심에서 벗어난 에피소드나 디테일한 묘사 등 사족이 좀 과해 보였고,

그로 인해 이야기가 단선적이면서 느슨해졌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제인의 비중에 맞먹는 루서라는 인물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기도 했고,

인물의 심리나 풍경을 묘사하는데 적잖은 지면을 할애한 게 큰 이유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560p에 달하는 분량에서 조금만 덜어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직 FBI 요원 제인과 보안관 루서의 투쟁은 후속작에서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인간성을 말살하고 삶과 죽음까지 제멋대로 조종하려는 거대 조직과의 싸움에서

과연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이겨낼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특히 제인마저 자신들의 조종을 받게 만들겠다는 거대 조직의 암시는

후속작에서 이어질 그녀의 싸움이 훨씬 더 지난해질 거라는 ‘예고’처럼 들려서

벌써부터 기대감과 함께 긴장감을 팽팽하게 자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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