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빛나는 강
리즈 무어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시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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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라델피아의 소도시 켄징턴을 담당하고 있는 경력 13년의 순찰경찰 미케일라 피츠패트릭(이하 미키). 한때 번성했으나 지금은 밑바닥까지 쇠락한 켄징턴은 ‘마약 굴, 미국의 쓰레기 타운’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춘과 마약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그로 인한 폐해는 도시 곳곳에서 쉽게 목격되는 곳입니다. 젊은 여성들이 연이어 교살된 채 발견되자 미키는 매번 그 시신이 사라진 동생 케이시가 아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려서부터 밝고 활달했던 케이시는 마약에 중독된 뒤 급기야 거리의 매춘부가 되고 말았는데, 한 달 전부터 소식이 끊겨 미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합니다. 순찰경찰의 신분임에도 케이시의 행방을 찾기 위해 전직 파트너와 수사를 벌이던 미키는 연이은 여성 교살사건에도 휘말리면서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에 끌린 첫 번째 이유는 뒷표지에 실린 카피 - “마약과 매춘에 물든 필라델피아의 거리. 연쇄살인을 쫓는 한 경관의 고독한 싸움.” -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범죄스릴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는데, 다 읽고 보니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카피는 어느 정도는 저 같은 독자를 겨냥한 미끼에 가까웠습니다. ‘어느 정도’라고 단서를 단 이유는 어쨌든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주인공 미키가 그 범인을 쫓는 행적이 그려지고 있으며 나름의 반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비중 순으로 정리하면 ①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두 자매의 오랜 애증 ②마약이 망가뜨린 사람들과 도시에 대한 애가 ③연쇄살인을 다룬 범죄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키가 비참하게 살해된 희생자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지는 초반부는 무척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갔지만 이후 미키와 케이시의 어린 시절이라든가 4살 아들을 키우는 싱글워킹맘으로서의 미키의 고된 생활, 그리고 소식이 끊긴 케이시의 행방을 찾기 위한 미키의 분투가 길고 장황하게 묘사되는 지점부터는 다소 이른 실망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마지막까지 소화할 수 있었던 건 범죄스릴러 이상의 페이지터너로서의 매력이 가늘지만 끈질기게 눈길을 계속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미키와 케이시 자매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들이었지만 짧고 톡톡 튀는 문장들과 군더더기 없는 빠른 템포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적절한 타이밍마다 등장하는 스릴러 코드들 – 연쇄살인사건, 케이시의 실종, 경찰 내부의 문제 등 – 은 다소 느슨해진 독자의 긴장감을 다시금 꼿꼿하게 세워주곤 해서 좀처럼 책갈피를 끼울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또 마약이 어떻게 사람들과 도시를 황폐하게 망가뜨린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드는지를 그린 디테일한 장면들 역시 내내 씁쓸함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갖게 만드는 대목들이었습니다.

 

뒷표지의 카피에 꽂혀 큰 스케일의 범죄스릴러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지루한 책읽기를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스릴러 이상의 매력적인 서사를 갖춘 작품이니 중간에 잠시 지치더라도 꼭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길고 빛나는 강’은 화끈하고 빠르진 않아도 오래 묵힌 덕분에 깊은 맛을 내는 듯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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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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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던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살해당할 이유 자체가 없는 희생자의 정황 때문에 수사가 난항에 빠진 상태에서 시라이시의 통화 목록에 들어있던 구라키라는 남자가 갑자기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며 사건은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는 시라이시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33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 때문이라고 털어놓아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됐던 한 남자가 결백을 주장하다가 유치장에서 자살했고 경찰은 그것으로 사건을 종료시켰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경시청 형사 고다이와 그의 파트너 나카마치는 손쉽게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 됐는데, 문제는 고다이의 마음속에 왠지 떨쳐낼 수 없는 찜찜함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점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사건의 가해자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가 수사결과에 의문을 품은 채 각자 자신의 아버지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히가시노 게이고다! 왕의 귀환!”이란 일본 독자의 서평에 공감할 정도로 ‘백조와 박쥐’는 오랜만에 히가시노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33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을 통해 ‘죄와 벌’이라는 정답도 없고 한없이 무겁기만 한 주제를 그린 이 작품은 히가시노 특유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들이 집대성된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옮긴이의 말’ 가운데 이 인상에 대해 거론한 부분을 인용하면,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사적인 판단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정의를 위한 분노의 절차는 무엇인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조직의 애환과 한계와 맹점, 공소시효 폐지와 소급 적용을 둘러싼 문제점, 언론의 무신경한 취재경쟁,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쏟아지는 인터넷상의 경박한 재단과 호기심의 배설 등 인간의 죄와 벌을 둘러싼 굵직굵직한 논의들이 한자리에 총망라된다.” (p564)

 

이 작품의 제목 ‘백조와 박쥐’는 바로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를 가리킵니다. 생김새도, 색깔도, 분위기도 정반대인 백조와 박쥐처럼 두 사람은 법정에서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악연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 찾기’라는 똑같은 목표를 추구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에 빠지고 맙니다.

구라키의 자백으로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해졌고 이제 양형을 다투는 재판만 남기고 있는 상태지만 가즈마와 미레이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의 행위를 조금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가즈마는 아버지 구라키가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며 자백 곳곳에 허점과 거짓말이 숨어있다고 확신했고, 미레이는 온화하고 올곧은 품성의 아버지 시라이시를 지독하고 인정사정없는 변호사로 둔갑시킨 경찰의 발표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살인과 피살의 동기를 설명해줄 단서들을 뒤쫓으며 고군분투하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한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두 사람의 연대에 대해 관할서 젊은 형사 나카마치는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죠.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얘기잖아요.”라며 곤혹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독자들의 속내를 대변하듯 말입니다.

 

고다이 형사, 가즈마, 미레이 등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에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건 33년 전 결백을 주장하다가 자살한 남자의 유족들 – 딸 오리에, 아내 요코 – 입니다. 오랫동안 살인자의 가족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그들은 뒤늦게 진범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경찰과 만나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는데, 이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은 고다이 형사는 물론 가즈마와 미레이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들로 인해 현재의 사건과 33년 전의 사건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미스터리의 심도는 물론 주제의 무게감까지 한껏 더해지게 됩니다.

 

‘진실 찾기’의 주된 주체는 고다이 형사보다는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절대 살인할 리 없는 아버지’와 ‘절대 살해당할 리 없는 아버지’, 즉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내는 게 그들의 미션이다 보니 고다이 형사가 다가갈 수 없는 내밀한 지점까지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알아낸 진실의 충격 역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안타까운 역할도 도맡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낸 진실은 고다이 형사가 밝혀낸 현재 사건의 진상과 합쳐지면서 강력한 반전을 만들어냅니다.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높은 히가시노의 미스터리에 비해 ‘백조와 박쥐’는 다소 느리고 둔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묵직한 주제 때문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이 평범한 일반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60여 페이지가 금세 넘어갈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서평 초반에 언급한 일본 독자의 극찬에 대해 이견을 가진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무게감에 있어서만큼은 히가시노 작품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엇비슷하지만 저 역시 한마디 보탠다면 “그래, 히가시노는 이런 작품을 써야지!” 정도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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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형사들 - 사라진 기와 ㅣ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명섭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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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 정명섭 작가의 작품이라 더 기대가 되네요. 사라진 기와라는 모티브도 흥미롭고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어떻게 연결될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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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 ㅣ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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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살인자’(1991)는 헨닝 망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첫 작품입니다. 이후 2009년 ‘불안한 남자’까지 이 시리즈는 모두 11편(한국에 소개된 건 8편)의 작품이 출간됐습니다. 헨닝 망켈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집필한 콤비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스웨덴 작가인데 북유럽 스릴러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유일하게 읽은 작품이 시리즈 5편인 ‘사이드트랙’인데, 그 외에 그나마 최근에(2013년) 출간된 작품이 하필 시리즈 마지막 편인 ‘불안한 남자’뿐이라 왠지 읽기가 꺼려졌던 게 사실입니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2000~2004년에 출간돼서 개정판이 나오면 읽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습니다.) 그러던 중 시리즈 첫 편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 너무 반가웠는데, 앞으로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가 순서대로 한국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스웨덴 남부 스코네 주의 소도시 위스타드의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는 42살의 베테랑입니다. 뛰어난 수사력을 발휘하는 능력자지만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들과 달리 딱 ‘배 나온 아저씨’ 스타일의 외모에 어딘가 살짝 허술해 보이는 인물입니다. 가정사도 만만치 않은데, 이혼을 요구하던 아내는 집을 나갔고, 19살 딸 린다 역시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조차 없으며, 발란데르가 경찰이 되겠다고 결심한 시절부터 평생 그를 못 마땅히 여겨온 아버지는 아흔 살을 넘겨 치매 증세를 보입니다. 그야말로 사방이 꽉 막힌 듯한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의 유일한 위안과 안식은 오페라입니다. 젊은 시절 오페라 기획자를 꿈꿨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오페라를 듣는 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깁니다.

 

혹독한 겨울을 앞둔 어느 날 노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온갖 흉기가 동원된 끔찍한 고문 흔적들은 복수 또는 돈이 범행동기임을 가리키지만, 고립된 농가에 살던 그들은 적(敵)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노인들이었습니다. 유일한 단서는 죽어가던 부인이 남긴 “외국”이라는 단 한마디뿐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자 스웨덴 도처에 머물던 난민들을 향한 테러가 시작됐으며 끝내 살인사건까지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발란데르는 상부의 지시로 노부부 살인사건 대신 정치적 여파가 큰 난민 살인사건 해결에 전력을 쏟습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아내와 딸과 아버지 때문에 발란데르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또 새로 부임한 매력적인 여검사 아네테 브롤린과의 미묘한 관계까지 겹쳐져 발란데르는 롤러코스터 같은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경찰 초년병 시절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로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법이야.”라는 주문을 외워온 발란데르로서는 일과 가족 때문에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지금이 과연 ‘살 때’인지 ‘죽을 때’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의 머릿속엔 “벗어나기, 달아나기, 사라지기, 새 삶을 시작하기.”라는 욕구만 가득합니다.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기를 헤쳐나갈 현명한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닌 발란데르가 자기 앞에 놓인 여러 개의 폭탄들 때문에 쩔쩔 매는 모습은 분명 매력적인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역설적으로 오히려 그런 면 때문에 훨씬 더 인간미가 느껴진 것 역시 사실입니다.

 

몇 차례의 헛발질 때문에 수사는 장기화되고 한때 발란데르는 사건에서 손을 뗄 생각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과 뛰어난 추리력으로 범인을 특정하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렇지만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발란데르에겐 불편하고 무거운 여운만 남을 뿐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새로운 경찰을 요구하는 시대의 변화입니다. 대도시에나 어울리는 범죄가 소도시에 만연하기 시작한데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사방식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서 발란데르는 자신이 서있을 자리에 대해 회의에 빠집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살인사건의 배경에 놓인 스웨덴의 난민 문제입니다. 인종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정부 정책에 발란데르는 반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자신이 어렵게 해결한 끔찍한 살인사건들의 근원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의 산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는 “What went wrong with Swedish society?”, 즉 스웨덴의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읽은 ‘사이드트랙’의 서평을 찾아보니 “복지국가 스웨덴의 민낯이라든가, 까마득히 벌어진 빈부 격차,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빚어낸 폭력을 묘사한다.”라고 돼있는데, 그런 면에서 이 시리즈는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품 외적인 얘기를 잠깐만 하자면...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는 한국에서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출간됐습니다. 이 작품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 앞서서 2000년부터 좋은책만들기, 곰, 웅진지식하우스 등 세 곳의 출판사가, 그것도 (시리즈 첫 편은 외면한 채) 원작 순서와 무관하게 중구난방으로 시리즈를 출간했는데, 심지어 작가의 이름마저도 헤닝 만켈, 헨닝 만켈, 헨닝 망켈 등 제각각으로 표기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리즈 첫 편을 출간한 피니스아프리카에서 앞으로 순서대로, 또 일관성 있게 출간해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중년형사 발란데르의 성장과 변화를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1990년대의 아날로그 정서도 그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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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년
레이먼드 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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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 이후 학교를 그만둔 17살 장민준이 몸을 의탁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채 때문에 엄마를 압박했던 조폭 보스 백기입니다. 엄마를 죽인 게 백기라고 의심했지만 뒤늦게 엄마가 자살한 걸로 밝혀지자 자신의 싸움꾼 재능을 알아본 백기의 스카웃 제의에 응한 것입니다. 백기의 카리스마에 빠진 민준은 이후 그를 추종하며 뛰어난 싸움꾼 기질을 발휘했고 2년 만에 2인자 자리에 오릅니다.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 절대 살인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닌 민준은 죠스라 이름 붙인 공업용 줄, 일명 ‘야스리’ 하나만으로 그 바닥에서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VVIP들만 드나드는 강남 클럽을 관리하던 어느 날, 민준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리고 선한 누나 영선에게 빠져듭니다. 하지만 민준은 하루아침에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잃습니다. 그것도 백기가 영선을 살해하고 사라졌다는 끔찍한 소식과 함께 말입니다.

 

읽는 동안 이병헌 주연의 영화 ‘달콤한 인생’, 김언수의 ‘뜨거운 피’, 그리고 청부살인을 다룬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한국형 누아르의 고전적인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란 얘긴데, 하지만 미성년자인 10대 소년이 ‘야스리’를 들고 피비린내 나는 조폭 액션을 펼친다는 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설정이라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또 그 또래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통과의례와 혼란도 그려지는데, 덕분에 ‘하드보일드 누아르 성장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구축했다는 생각입니다.

 

민준의 주위엔 그의 성장을 부추기거나 성장 자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고도비만으로 인해 왕따를 당하다가 민준의 도움을 받았던 같은 반 여학생 수빈, 보스이자 친형과도 같은 존재인 백기, 족히 열 살 이상은 더 많은데도 꼬박꼬박 민준을 형님으로 모시는 조직원 땅콩, 그리고 결코 잊지 못할, 비참하게 살해된 첫사랑 영선이 그들입니다. 무엇보다 교복을 입고 게임을 즐기는 제 또래들과 달리 ‘야스리’ 하나에 의지한 채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근 것 자체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성장 환경이다 보니 민준의 10대 후반은 롤러코스터마냥 하루에도 몇 번씩 큰 낙차를 그리면서 위태롭게 흘러갑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민준이 악전고투하며 영선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과정입니다. 형사들은 “양아치가 창녀를 죽였어. 세상에서 제일 흔한 살인이야.”라며 백기를 범인으로 단정하지만 민준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영선이 살해당한 VVIP 5번방에 머물던 또 한 사람에 주목합니다. 그 과정에서 민준은 양지의 재벌과 음지의 재벌, 라이벌 폭력조직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 등 숱한 위험천만한 추격자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입니다. 지난한 진범 찾기는 몇 차례의 배신과 반전을 통해 성공하고 민준을 위협하던 자들은 나름대로 응징을 받게 되지만, 멘토와 첫사랑을 잃은 민준의 상처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깊은 내상을 입습니다.

 

(민준)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이젠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

(수빈) “당연히 세상은 그대로야. 그냥 네가 처음부터 몰랐던 것뿐이지.” (p423)

 

이전까지 자기계발 서적만 집필했다는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데 누아르는 물론이고 풍경과 심리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이어서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달콤한 인생’, ‘뜨거운 피’, ‘방의강 시리즈’에 비해 이야기가 단선적이라는 점은 아쉬웠지만(별 0.5개가 빠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조도 탄탄하고 캐릭터도 생생하게 빛나서 혹시라도 ‘장민준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더 반가울 것 같기도 합니다. 후반에 그 가능성에 대한 약간의 떡밥이 던져지긴 했는데 이 작품이 호평을 받는다면 떡밥 이상의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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