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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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던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한 채 발견됩니다. 살해당할 이유 자체가 없는 희생자의 정황 때문에 수사가 난항에 빠진 상태에서 시라이시의 통화 목록에 들어있던 구라키라는 남자가 갑자기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며 사건은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는 시라이시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33년 전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 때문이라고 털어놓아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됐던 한 남자가 결백을 주장하다가 유치장에서 자살했고 경찰은 그것으로 사건을 종료시켰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경시청 형사 고다이와 그의 파트너 나카마치는 손쉽게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 됐는데, 문제는 고다이의 마음속에 왠지 떨쳐낼 수 없는 찜찜함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점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사건의 가해자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가 수사결과에 의문을 품은 채 각자 자신의 아버지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히가시노 게이고다! 왕의 귀환!”이란 일본 독자의 서평에 공감할 정도로 백조와 박쥐는 오랜만에 히가시노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33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을 통해 죄와 벌이라는 정답도 없고 한없이 무겁기만 한 주제를 그린 이 작품은 히가시노 특유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들이 집대성된 듯한 인상까지 풍깁니다. ‘옮긴이의 말가운데 이 인상에 대해 거론한 부분을 인용하면,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사적인 판단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정의를 위한 분노의 절차는 무엇인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조직의 애환과 한계와 맹점, 공소시효 폐지와 소급 적용을 둘러싼 문제점, 언론의 무신경한 취재경쟁,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쏟아지는 인터넷상의 경박한 재단과 호기심의 배설 등 인간의 죄와 벌을 둘러싼 굵직굵직한 논의들이 한자리에 총망라된다.” (p564)

 

이 작품의 제목 백조와 박쥐는 바로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를 가리킵니다. 생김새도, 색깔도, 분위기도 정반대인 백조와 박쥐처럼 두 사람은 법정에서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악연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 찾기라는 똑같은 목표를 추구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에 빠지고 맙니다.

구라키의 자백으로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해졌고 이제 양형을 다투는 재판만 남기고 있는 상태지만 가즈마와 미레이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의 행위를 조금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가즈마는 아버지 구라키가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며 자백 곳곳에 허점과 거짓말이 숨어있다고 확신했고, 미레이는 온화하고 올곧은 품성의 아버지 시라이시를 지독하고 인정사정없는 변호사로 둔갑시킨 경찰의 발표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살인과 피살의 동기를 설명해줄 단서들을 뒤쫓으며 고군분투하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한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두 사람의 연대에 대해 관할서 젊은 형사 나카마치는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죠.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얘기잖아요.”라며 곤혹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독자들의 속내를 대변하듯 말입니다.

 

고다이 형사, 가즈마, 미레이 등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에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건 33년 전 결백을 주장하다가 자살한 남자의 유족들 딸 오리에, 아내 요코 입니다. 오랫동안 살인자의 가족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그들은 뒤늦게 진범이 밝혀지면서 또다시 경찰과 만나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는데, 이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은 고다이 형사는 물론 가즈마와 미레이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들로 인해 현재의 사건과 33년 전의 사건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미스터리의 심도는 물론 주제의 무게감까지 한껏 더해지게 됩니다.

 

진실 찾기의 주된 주체는 고다이 형사보다는 가해자의 아들 가즈마와 피해자의 딸 미레이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절대 살인할 리 없는 아버지절대 살해당할 리 없는 아버지’,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내는 게 그들의 미션이다 보니 고다이 형사가 다가갈 수 없는 내밀한 지점까지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알아낸 진실의 충격 역시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안타까운 역할도 도맡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낸 진실은 고다이 형사가 밝혀낸 현재 사건의 진상과 합쳐지면서 강력한 반전을 만들어냅니다.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높은 히가시노의 미스터리에 비해 백조와 박쥐는 다소 느리고 둔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묵직한 주제 때문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이 평범한 일반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60여 페이지가 금세 넘어갈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서평 초반에 언급한 일본 독자의 극찬에 대해 이견을 가진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무게감에 있어서만큼은 히가시노 작품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엇비슷하지만 저 역시 한마디 보탠다면 그래, 히가시노는 이런 작품을 써야지!” 정도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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