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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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 평범한 토요일. 신주쿠 중앙공원에서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대낮부터 공원에서 위스키를 마시다가 참상을 목격한 알코올중독자 바텐더 시마무라는 1971년 자신의 눈앞에서 터졌던 폭탄을 떠올리며 충격에 빠집니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공원 사망자 가운데 과거 함께 대학투쟁을 벌였던 구와노, 유코가 포함돼있다는 점입니다. 시마무라는 20년 넘게 연락이 끊겼던 3총사가 한날한시에 폭탄이 터진 공원에 있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그 앞에 죽은 유코의 딸 도코가 나타나 자신도 진실 찾기에 나서겠다고 주장합니다.

 

60년대 반정부투쟁 조직인 전공투(全共闘)의 동지이자 진한 우정을 나눴던 도쿄대 3총사 기구치(=시마무라), 구와노, 유코는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신주쿠 중앙공원의 폭탄 테러로 인해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려 재회합니다. 특히 기구치와 구와노는 1971년에 일어난 폭탄 사건 때문에 오랫동안 경찰의 추격을 받아왔는데, 기구치는 시마무라로 이름을 바꾼 뒤 도망자처럼 지내며 허드렛일을 전전하다가 현재는 작은 바의 바텐더로 일하는 중이고, 구와노는 당시 프랑스로 도망친 바 있습니다. 유코의 경우 당시 동거하던 시마무라에게 메모 한 장만 남긴 채 소식을 끊었는데, 시마무라는 폭탄테러 사건을 계기로 만난 그녀의 딸 도코를 통해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으며 깊은 회한에 잠깁니다.

 

무차별 살상을 노린 듯 하지만 한편으론 목표물이 명확했던 폭탄테러가 일어난 가운데 여러 인물들이 긴장감 넘치는 행보를 보입니다. 공원의 조각난 사체에서 구와노의 지문이 발견된 탓에 22년 전 폭탄 사건이 소환되면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된 시마무라, 엄마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다며 막무가내로 시마무라의 조사에 끼어든 유코의 딸 도코, 그리고 시마무라를 찾아와 충고와 도움을 전하는 전직 경찰이자 현직 야쿠자 아사이와 신주쿠 역 인근의 노숙자 무리 등이 그들입니다. 특히 시마무라는 공개 수배된 가운데 기자와 경찰을 사칭해가며 피해자 유족과 목격자를 직접 탐문하고, 유코를 비롯한 피해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확인합니다.

 

폭탄테러범을 추격하는 단선적인 구조처럼 보이지만, 22년 전 세 사람의 우정과 비극적인 폭탄사건이 밑바탕에 깔려있고, 현재의 시마무라 주위에 야쿠자와 노숙자, 유코의 딸 도코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꽤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작가의 정교한 설계도에 놀랄 때도 있지만, 간혹 ?” 소리가 날 정도로 사건과 인물관계가 헷갈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한눈에 쏙 들어오는 문장들이라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만 나름 집중하지 않으면 몇몇 인물들의 언행을 놓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작가의 의도도 그럴 거라고 추정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폭탄테러 자체보다 22년 전 빛나는 청춘과 우정을 나누며 무장투쟁을 함께 했던 세 인물이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이를 먹어가며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하거나 성장하거나 일그러지는 과정입니다. 뛰어난 엘리트였던 그들은 그 누구보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한순간의 비틀림으로 인해 약속된 미래를 모조리 파괴당했고, 끝내 중년에 이르러서는 한날한시에 비극을 맞이하고 맙니다. 비루한 알코올중독자가 된 시마무라가 전공투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가장 깊게 기억에 남은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유일무이하게 나오키 상과 란포 상을 동시에 수상한 이력답게 문학적 완성도와 미스터리의 견고함이 잘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꽤 복잡한 구도와 다수의 등장인물 때문에 이야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주할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니 출판사의 소개글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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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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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가와 현의 해변 소도시 하자키 반도의 끄트머리에는 사와타리지마, 일명 고양이섬으로 불리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피서객들로 섬 전체가 붐비던 어느 여름 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칼에 찔린 고양이 사체가 발견됩니다. 이어 며칠 뒤엔 바다를 질주하던 마린바이크와 절벽에서 추락한 사람이 충돌하는 사망 사고가 벌어지는데 문제는 죽은 남자에게서 타살의 징후가 발견된 점입니다. 더구나 고양이섬의 민박집 중 한 곳에서 부패한 사체까지 발견되자 이제 고양이섬은 원래의 명성 대신 연속살인이 벌어진 무서운 곳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고양이와 마약에 알레르기가 있는 형사반장 고마지는 경찰로서의 사명감이나 의욕이라곤 전혀 없는 임시파출소 순경 나나세를 앞세워 이 기이한 사건들을 수사하기 시작합니다.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진달래 고서점의 사체에 이은 하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동물이 주조연을 맡은 장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히 고양이를 앞세운 일본의 코지 미스터리는 거의 읽은 적이 없는데, 현실감이 최고의 덕목인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동물 판타지가 끼어드는 게 통 납득도 안 되고 어딘가 너무 가벼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와카타케 나나미의 팬인데다 한국에 소개된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시리즈중 한 작품이라 이 작품을 빼먹을 순 없었습니다.

 

하자키 반도 끝에 있는 작은 섬 사와타리지마는 언젠가부터 고양이섬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실제로 섬에는 30명 남짓한 주민의 세 배가 넘는 100여 마리의 고양이가 사방팔방에서 어슬렁대고 있습니다. 여름 한 철 피서객과 관광객을 상대로 1년 벌이를 하는 주민들은 그야말로 고양이와 함께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연이은 살인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사건의 배후에 마약은 물론 18년 전 벌어졌던 현금수송차 강탈사건까지 연루된 게 드러나면서 고양이섬은 한순간에 오명을 뒤집어쓰고 맙니다.

 

만사태평 스타일의 형사반장 고마지가 수사를 지휘하지만 실제로 온몸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며 악전고투하는 건 여름 임시파출소의 신참 순경 나나세입니다. 사명감도 의욕도 없이 한적한 섬에서 편안한 근무만을 꿈꾸던 나나세는 한편으론 내가 왜 이러고 있나?”라며 한탄하면서도 한편으론 고마지와 함께 살인사건을 수사한다는 자긍심도 갖고 있습니다. 위험한 해안절벽을 기어 내려가고, 바다에 빠져 익사의 위기를 겪고, 스턴 건을 잘못 건드려 기절하는 등 안쓰러울 정도로 개고생을 하지만 그가 모아온 고양이섬에 관한 정보들은 고마지에게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돼줍니다. 콤비 플레이라고까지 할 순 없지만 두 사람의 행보는 진지함과 유쾌함을 오가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아울러 고양이섬 신사의 신관이지만 어딘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노인과 그의 손주 부부, 사연 많은 민박집을 운영하는 노파와 손녀, 민박집에 기거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기념품 가게 주인인 외설소설 번역가 등 고양이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일상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팬이라는 사감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은 사건 스케일이나 미스터리 심도 면에서 볼 때 조금 긴 단편 혹은 중편 정도에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연이은 살인사건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밝혀진 진상은 다소 싱겁거나 가벼운 해프닝에 가까워 보였고, 고마지 반장과 나나세 순경을 제외하고 고양이섬의 인물들이 사건 해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드물어서 유쾌하지만 미미한 단역들이상의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읽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단편들을 떠올려 보면 이 작품은 그 정도 분량으로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우당탕탕 소동극정도였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팬으로서 마음이 무척 아프지만 별 3.5개밖에 줄 수 없는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하자키 시리즈가운데 진달래 고서점의 사체2,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4편입니다. 그 사이에 3クール・キャンデー’ (쿨 캔디) 한 편이 더 있는데, 2010년에 한국에 첫 출간됐을 때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1(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2, 4편만 소개됐고, 이번 개정판 역시 그 세 편만, 그것도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시리즈 3부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일본에선 2021년 시리즈 8편인 パラダイス・ガーデンの喪失까지 출간됐는데, 지금 분위기로는 더 이상의 하자키 시리즈를 한국에서 만나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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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고서점의 사체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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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키 히가시비치에서 젊은 남자의 익사체가 발견됩니다. 사체를 발견한 건 직장의 도산, 대형 화재참사, 사이비종교의 협박을 연이어 겪은 지독히도 운 나쁜 31살 여성 아이자와 마코토. 연고도 없는 하자키에 무작정 왔다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참고인이 된 마코토는 결국 하자키를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고색창연한 진달래 고서점에서 로맨스소설 마니아인 노파 마에다 베니코에게서 임시로 가게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삶의 전환점이 돼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제안을 수락한 마코토. 하지만 그녀의 불운은 하자키에서도 계속됩니다. 출근 첫날 도둑이 들더니 다음 날엔 서점 한복판에서 사체가 발견된 것입니다.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에 이은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의 개정판입니다.) 가나가와 현의 해변 소도시 하자키를 무대로, 만사태평 스타일이지만 예리한 추리력을 지닌 형사반장 고마지의 활약이 위트 넘치는 코지 미스터리 서사 속에 잘 녹아있는 시리즈입니다.

사건의 핵심은 하자키의 명문가 마에다 가문의 10여 년에 걸친 비극입니다. 본가와 분가의 갈등, 그 와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자(母子), 유산을 노린 비열한 술수들, 실패한 정략결혼과 그것이 남긴 상흔 등 작품 속 한 인물이 언급한 대로 아침 멜로드라마에 나올 법한 막장에 가까운 설정들이 비극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초반부터 수사가 꼬인 건 익사체로 발견된 젊은 남자의 신원 탓입니다. 12년 전 실종된 마에다 가문의 도련님 히데하루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2년이라는 간극이 있긴 하지만 사체를 직접 보고도 상반되는 주장을 한 이들이 다름 아닌 히데하루의 인척들이란 점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됩니다. (참고로, 이 작품의 배경은 2000년입니다.) 상반된 주장의 이면에 거액의 유산상속이 걸려 있어서 고마지 반장은 자살과 타살 사이에서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한 채 히데하루의 과거를 캐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에다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자 로맨스소설 마니아인 베니코가 운영하는 진달래고서점에서 연이어 절도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고마지 반장은 익사체로 발견된 히데하루 사건과 고서점의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골몰하게 됩니다.

 

소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명문가의 추악한 민낯이 이야기의 중심이긴 하지만, 와카타케 나나미는 코지 미스터리의 여왕답게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 대신 시종 통통 튀는 서사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만사태평 스타일의 고마지 반장 못잖게 사건에 휘말린 여러 인물들이 살인, 실종, 강도라는 강력사건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맹활약한 덕분입니다. ‘불운이 너무 많은 외지인아이자와 마코토, 마코토를 참고인 이상으로 의심하며 충돌하다가 이래저래 정이 들어버리는 신참경찰 이쓰키하라 미쓰루, 마에다 가문이 운영하는 하자키 FM의 열혈 디제이 와타나베 지아키, 그리고 노익장을 과시하는 로맨스소설 마니아 마에다 베니코 등 에너지 넘치는 인물들은 사건 해결에도 앞장서지만 수시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 캐릭터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있습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미스터리는 매번 이 많은 사건과 인물들을 어떻게 설계했을까?”라는 의문이 저절로 들 정도로 복잡하고 어지러운 미로로 이뤄져있습니다. 특히 하자키 시리즈는 수사를 맡은 고마지 반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비슷한 비중을 지닌 중요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에 미로의 난이도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대표작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나름 개성 있는 설정일 수 있지만, 독자를 확실하게 이끌 핵심 인물이 없다는 점은 중반 정도까지 다소 지루한 책읽기를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개요만 보면 수사를 맡은 고마지 반장과 사건 한복판에 휘말린 외지인 마코토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져야 하는데, 실제론 거의 1/n에 가까운 비중이라 좀처럼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막판에 반전이 거듭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와카타케 나나미의 찐팬이 아니라면 쉽지 않아 보이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미스터리 궁합이 잘 안 맞는다는 걸 거듭 확인하고도 계속 찾아 읽게 되는 거의 유일한 작가가 와카타케 나나미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그녀만의 매력에 계속 끌리기 때문인데, 특히 코지 미스터리가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여덟 번째 작품까지 출간된 하자키 시리즈가 앞으로 가끔씩이라도 소개된다면 아마도 절대 외면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매번 절반의 성공에 머물긴 해도 와카타케 나나미에 대한 기대감은 여전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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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어머니의 날 1 타우누스 시리즈 9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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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는 아니지만 타우누스 시리즈의 꽤 많은 작품이 그랬듯이 넬레 노이하우스는 아홉 번째 작품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에서도 오래 된 과거 속 사건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19815,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소년이 잔혹하게 첫 살인을 저지르는 충격적인 프롤로그는 이후 이 소년이 성장하면서 저질렀을 수많은 참극이 이 작품의 메인 사건임을 예고합니다.

 

현재 벌어진 사건의 희생자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하나같이 5월 둘째 주 일요일인 어머니날을 전후로 희생됐습니다.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보덴슈타인은 익사당한 뒤 냉동된 채 랩으로 둘둘 말린 시체들을 보며 이 사건이 성범죄도, 묻지마 살인도 아닌, 철저하게 계획된 표적범죄임을 직감합니다. 시신들이 발견된 저택이 실은 오래 전 입양아들로 가득했던 점을 감안할 때 범인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을 다른 여자들에게 쏟아내고 있다는 점도 눈치 챕니다.

 

전작인 여우가 잠든 숲에서 경찰 옷을 벗고 싶을 정도로 큰 고통에 빠졌던 보덴슈타인은 그로부터 3년이 흐른 현재 반장직에 복귀한 상태이고, 임시반장을 맡았던 피아는 그가 신뢰하는 보덴슈타인과 다시 한 번 파트너로 맹활약하는 중입니다. 다만, 쌩쌩하고 활력 넘치던 피아가

어느 새 50세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대목을 읽곤 잠시 서글픔을 맛보기도 했고(보덴슈타인은 무려 57세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건조한 분위기, 즉 기름기 하나 없이 수사 일변도의 진행에만 의존한 점 때문에 아쉬움도 느꼈지만(이 점 때문에 별 0.5개가 빠졌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고유의 숨 가쁜 속도감과 팽팽한 긴장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별개의 서사처럼 전개되다가 메인 사건에 합류하게 되는 조연들의 이야기도 매력적이었는데, 특히 동성애인이던 엥엘 과장(피아의 상관)과 킴(피아의 여동생)의 갈등이 엉뚱하게 피아에게 불똥이 튀면서 수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스토리는 메인 사건 못잖게 호기심과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전작인 여우가 잠든 숲이 보덴슈타인 반장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이번 작품은 피아와 그 주변 인물들이 맹활약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눈앞에 어른거리는 인물 중 한 명이 범인인데, 작가는 수시로 다른 단서들을 내밀면서 독자들의 추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 역시 타우누스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인데, 막판에 갑자기 등장하는 단서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독자 입장에선 작가와 벌이는 추리 대결의 맛을 한껏 맛볼 수 있습니다.

이제 장년의 대열에 들어선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이야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타우누스 시리즈가 시간을 거스르는 소재를 통해서라도 계속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마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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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반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3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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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 병문안을 마치고 귀가하던 미쓰에와 두 살배기 아들 겐타를 강풍에 뿌리째 뽑힌 가로수가 정면으로 덮칩니다. 미쓰에는 머리를 크게 다친 겐타를 급히 병원으로 옮기려 하지만 구급차는 갑작스런 교통 정체에 휘말리고 인근 병원에선 응급환자가 많은데다 외과의사가 없다며 진료를 거부합니다. 악운이 이어진 끝에 치료시기를 놓친 겐타는 끝내 숨지고 맙니다. 겐타의 아버지 가야마는 가로수 관리를 소홀히 한 조경회사에 책임을 물으려 하지만, 사고의 원인을 파헤칠수록 겐타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이들이 한둘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사소한 죄의 조각들은 가야마를 심연과도 같은 절망과 분노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출판사가 공개한 선에서 정리한 줄거리입니다.)

 

통곡’, ‘후회와 진실의 빛’, ‘우행록’(개정판 제목은 어리석은 자의 기록’) 등 누쿠이 도쿠로 작품의 매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의 마음속에 바윗돌 하나를 얹어놓은 듯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결과보다 과정에, 사건보다 심리나 감정에 소구하는 그의 작품들은 매번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만들거나 다소 우울한 여운을 길게 늘어뜨리기 때문입니다. ‘난반사는 누쿠이 도쿠로의 여느 작품보다도 그런 느낌이 더 강렬한 편에 속하지만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순삭 시킬 정도로 재미면에서도 압도적입니다. 또 형식적인 면에서도 일반 미스터리와 전혀 다른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언뜻 불운한 사고로만 보이는 아이의 죽음은 사실 살인이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합세해서 죄 없는 아이를 죽인, 더할 수 없이 이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죽음의 특이성을 알아채는 이 없이 범인들은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p 6)

 

시작하자마자 범인()과 피해자와 사건의 개요가 공개됩니다. 줄거리와 프롤로그를 조합해보면 두 살배기 아이가 쓰러진 가로수에 맞아 사망한 사건에 여러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됐다는 것, 또 그들은 명백히 아이의 죽음을 야기한 범인이지만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이야기의 윤곽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니 다소 맥이 빠지는 게 아닐까, 우려할 수도 있지만 누쿠이 도쿠로는 누가 범인?’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악의와 이기심들이 어떤 식으로 난반사 된 끝에 무고한 아이의 죽음을 일으켰는가를, 그리고 그 악의와 이기심이라는 것이 흉악하고 난폭한 자들의 것이 아니라 실은 세상사람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저지르곤 하는 일상적인 행동이란 것을 집요하게 그려내어 독자에게 분노와 절망과 공감과 비탄을 한꺼번에 맛보게 만듭니다.

 

허영심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한 전업주부, 적당주의에 물든 태만한 의사, 복잡한 낮시간을 피해 응급환자용 야간진료를 찾는 대학생, 별 탈 없이 무난한 직장생활만 원하는 전형적인 공무원, 동생에 대한 열등감과 타고난 소심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젊은 여성, 반려견의 분변을 길에 방치하는 노인, 그리고 노부모 간병 때문에 갈등을 벌이다가 아들을 잃고 비극의 주인공이 된 부부 등 두 살배기 겐타를 죽음으로 내몬 인물들의 사연이 천천히, 하지만 그래서 더 고조된 긴장감과 비극성을 품은 채 하나씩 독자에게 설명됩니다.

 

작가 스스로 “‘난반사의 테마와 무관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라고 했듯 실은 겐타의 죽음에 관여한 이들의 행동은 너무나 평범하고 흔한 것들이라 역설적이지만 더 큰 무게감과 충격을 지닙니다. 법보다는 도덕과 양심에 영향을 받는 행동들, 하지만 그래서 누구나 쉽게 어기고 무시하는 행동들, 그리고 그 행동들을 스스로 어쩔 수 없었다.”, “딱 한 번만.”이란 식으로 합리화하는 작은 악의와 이기심들.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게 될 평범한 상황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연쇄적으로 일으킨 불운의 나비효과는 두 살배기 겐타에겐 너무나 잔혹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뭘 잘못했냐?”만 내뱉을 뿐 그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겐타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들을 법으로 단죄할 수도, 언론을 통해 응징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겐타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을 찾아다니던 아버지 가야마는 매번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지만, 스스로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곤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자책을 거듭하게 됩니다.

 

개운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은 누쿠이 도쿠로 식 엔딩은 독자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그만의 특별한 구성과 문장을 통해 깊이 있게 그려내는 누쿠이 도쿠로의 스타일을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한국에 출간된 12편 가운데 난반사까지 9편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 자처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2017년 이후 더는 한국 출간 소식이 없어서 그저 아쉬울 따름인데, 아껴 읽느라 몇 년씩 책장에 방치해놓은 나머지 세 작품도 이제는 한 편씩 꺼내 먼지를 털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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