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름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6월
평점 :
1960년대 초반, 사립탐정 루 아처는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LA 남쪽 해변도시 퍼시픽포인트에 왔다가 우연히 만난 청년 앨릭스로부터 신혼여행 첫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신부 돌리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주변 탐문을 통해 어렵지 않게 돌리를 찾긴 했지만 아처는 퍼시픽포인트를 떠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탐문 중 만났던 한 여성이 총에 맞아 살해됐고, 하필 돌리가 그 시신을 발견하는 바람에 유력 용의자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돌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한 아처는 진범 찾기에 나서지만 그 과정에서 각각 10년 전과 22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이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과 연관 있음을 깨닫곤 크게 놀랍니다.
로스 맥도날드의 ‘루 아처 시리즈’를 처음 접한 건 2017년 ‘블랙 머니’(1966)를 통해서입니다.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의 뒤를 이은 ‘3대 하드보일드 거장’이라지만 ‘블랙 머니’를 읽기 전만 해도 작가와 주인공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당시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아서 언젠가 ‘루 아처 시리즈’를 한 편 정도는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모두 18편인 ‘루 아처 시리즈’ 가운데 ‘소름’은 1963년 작으로 11편, ‘블랙 머니’는 13편입니다.)
‘블랙 머니’와 마찬가지로 ‘소름’ 역시 아처가 쉽고 평범한 의뢰를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발진시킨 뒤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이끌어내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혼여행지에서 사라진 신부 돌리를 찾는 일은 아처에겐 한나절이면 충분한 일이었지만, 이후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용의자로 몰린 돌리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순식간에 볼륨감을 최대치로 키웁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 같다며 아처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실제로 살해당한 여성, 그 여성과 친밀한 관계였으며 시신을 처음 발견한 탓에 용의자로 몰린 돌리, 아내를 죽인 혐의로 10년을 복역한 돌리의 아버지, 돌리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입을 꼭 다무는 정신과 의사, 어머니의 눈을 피해 살해된 여성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대학 학생처장 등 돌리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아처의 주목을 끄는데, 문제는 그들에 관해 조사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는 점입니다. 특히 22년 전에 사고사로 판명된 부유한 사업가의 죽음과 10년 전 남편에게 살해된 돌리의 어머니의 죽음에 주목한 아처는 어쩌면 현재 벌어진 살인사건이 그 사건들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이릅니다.
외관상으론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지만, 읽는 내내 묵직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 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이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모가 철저하게 파괴했고, 그들의 죗값을 대신 치러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아이들.”을 그렸다는 해설대로 그들은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부모(가족)의 폭력과 압박에 의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고,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은 그 피폐함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무심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하드보일드 탐정 루 아처의 매력이 더 빛났던 건 사건 해결 자체보다 가족에게 당한 오랜 상처를 지닌 인물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입니다.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형적인 습성인 무력이나 직감 대신 그들의 입을 저절로 열게 만드는 아처의 카리스마는 때론 냉정하게, 때론 능글맞게, 때론 온기를 품은 채 발휘됩니다. 그들이 털어놓은 진술과 정보는 너무나도 많고 복잡하지만 아처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어디를 파고들어가야 할지 정확히 포착합니다. 그리고 막연한 추정이었던 ‘3중 살인’을 입증하고 범인을 지목합니다.
워낙 많은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에 중간에 혼란을 겪지 않으려면 메모장이 필수인 작품입니다. 이토록 복잡한 설정을 어떻게 설계했을까, 의문과 감탄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짧은 분량 안에 머리가 터질 듯한 복잡함을 담았던 ‘블랙 머니’에 비해서는 수월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다 읽고 복기를 해보면 이야기의 윤곽이 선명하게 잡히긴 하지만, 읽는 동안엔 작가와의 머리싸움을 각오해야 할 작품입니다.
‘루 아처 시리즈’는 18편 가운데 단 5편만이 한국에 소개됐습니다. 그나마도 2010년대에 출간된 건 ‘블랙 머니’와 ‘소름’뿐입니다. 원작 자체가 1950~70년대에 출간돼서 고전으로 취급받는 이 시리즈가 출판사 입장에선 그다지 매력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미 출간된 작품들의 개정판이 나오거나 새로 출간되는 작품이 있다면 ‘특별한 고전 간식’을 즐기는 기분으로 꼭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미스터리 자체보다 하드보일드 명탐정 루 아처의 시크한 카리스마를 다시 한 번 만끽하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