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 레이디 셜록 시리즈 1
셰리 토머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리드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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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면 사교계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출산-양육-내조를 거치는 것이 당연이자 의무로 여겨지던 1886년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하지만 딸만 넷인 홈스 집안의 막내딸 샬럿은 결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당찬 여성입니다. 25살이 되던 해, 샬럿은 런던 사교계를 뒤집어놓을 만한 사건을 벌인 뒤 집을 나와 독립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연히 만난 조력자 덕분에 샬럿은 가까스로 큰 위기를 넘깁니다. 그리고 셜록 홈스라는 가명으로 런던 경시청을 도왔던 이력을 살려 탐정의 길에 들어섭니다. 샬럿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언니 리비아와 아버지 헨리가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의문의 살인사건입니다.

 

셜록 홈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그 저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각종 패러디나 패스티시(혼성 모방)는 물론 수많은 오마주 작품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외엔 딱히 인상적인 작품이 없었고, 그래서 언젠가부터 셜록 홈스를 내세운 작품들은 오히려 기피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간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인데, 일단 100페이지 정도까지만 읽어보자는 심산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시집 못 간 딸은 재산이나 축내는 창녀들과 마찬가지.”라는 히스테릭한 어머니의 주장은 실은 당시 영국에서 여성을 대하는 보편적인 태도입니다. 그에 비해 내 생식 능력과 남자의 부양을 교환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샬럿 홈스의 선언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만큼 파격적인 것으로 또래 여성들조차 공감하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상상력과 추리력은 물론 당당하고 주체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샬럿은 자신의 꿈 결혼하지 않고 독립하여 런던에서 여학교 교장이 되는 것 - 을 이루기 위해선 설득이나 타협 따위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곤 런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초대형 사건을 일으킨 뒤 집을 빠져나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의 출발점으로는 매력 만점의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샬럿 홈스는 집을 나오기 전부터 운이 따랐다면 인연이 될 수도 있었던 남자잉그램 경을 통해 런던경시청의 로버트 트레들스 경사를 여러 차례 도운 적 있습니다. 물론 샬럿이 아니라 셜록이란 가명을 통해, 또 만남이 아니라 편지를 통해서였고, 트레들스 경사는 당연히 셜록을 뛰어난 남성으로 추정하며 매번 고마움을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셜록 홈스와 같은 재능을 지닌 여성이 여성을 하찮게 여기는 빅토리아 시대에 존재했다면?”이라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에서 도출된 것으로 셜록 홈스가 실은 샬럿 홈스라는 여성 탐정의 가명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설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샬럿의 주위엔 셜록 홈스의 팬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조연들(왓슨, 허드슨 부인, 모리아티)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샬럿이 그들과 인연을 맺고 베이커가 18번지에 자리 잡는 과정은 각별한 재미를 주는 대목인데, 특히 조력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맡은 왓슨과의 관계가 가장 눈길을 끌었습니다. , 샬럿과 런던경시청을 연결시켜주는 중개인이자 샬럿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유부남 귀족 잉그램 경은 아슬아슬한 로맨스 분위기까지 풍겨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이렇듯 재미있는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평점을 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야기 자체의 문제로, 분량에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운 사건, 지루한데다 지나치게 디테일한 수사 과정, 그리고 수시로 모호함을 느끼게 만드는 영국식 불친절입니다. 시대를 역행한 샬럿이 베이커가 18번지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만 놓고 보면 별 5개도 충분하지만, 정작 살인사건 자체는 아쉬움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곳곳에서 발견된 오타인데, 샬롯 홈스의 매력을 깎아내린 꽤 큰 옥의 티였다는 생각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곧 후속작 벨그라비아의 음모가 출간된다는데, 이 작품과 엇비슷한 문제를 초반부터 목격하게 될까봐 미리부터 주저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샬럿과 왓슨과 잉그램 경의 캐릭터만 생각하면 읽고 싶은 욕심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가 남긴 아쉬움이 후속작에서는 모두 극복됐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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