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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춤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평점 :
마치 하룻밤 사이 수많은 꿈을 동시에 꾼, 그것도 서로 뒤엉켜 원형을 잃어버린 꿈들을 한꺼번에 꾼 느낌입니다. 아직 국내에 출간된 온다 리쿠의 작품을 절반도 채 못 읽었지만, 지금까지 읽을 작품 중 가장 모호하고, 몽환적이고, ‘뒤끝이 남는’ 작품입니다.
비(非) 시리즈 단편집이라는 별칭처럼 장르와 소재는 제각각이고, 어떤 일관성 있는 테마로 엮이지도 않았습니다. 또 3페이지 남짓한 엽편부터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연작 단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이 수록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녀의 주특기인 ‘현실과 판타지의 기묘한 버무림’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현실감 있게 흐르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판타지로 넘어가는가 하면, 판타지려니 하고 읽다 보면 어느새 이미 현실로 돌아와 있는 몇몇 작품들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겨줍니다.
수록된 작품들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묶어볼 수 있는데, 추억의 도시가 배경인 친구와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타이베이 소야곡’, ‘화성의 운하’), 기존 작품에 실렸던 에피소드의 뒷이야기를 다룬 작품(‘변심’, ‘변명’), 미니멈급 미스터리의 알싸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변심’, ‘오해’), 개와 고양이가 주조연을 맡은 판타지(‘충고’, ‘협력’, ‘이유’), 오래 전의 인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그린 이야기(‘나와 춤을’, ‘둘이서 차를’) 등입니다.

일부 예외도 있지만, 온다 리쿠 본인이 일상에서 겪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특별한 향수를 남겨준 여행이나 단골 카페에서 본 소소한 일상들, 또는 존경하거나 좋아했던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경우도 있고, 심지어 꿈속에서 들은 대화를 기록해놓았다가 작품의 소재로 삼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든 첫 느낌은, 어쩌면 판타지는 늘 우리 곁에 조용히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우리를 지켜보거나 우리가 찾아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 변화하는 날씨와 계절, 내 책상 위에 어질러진 물건들 따위는 ‘교육과 상식을 통해 획일화된 눈’을 가진 보통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 속의 하찮은 풍경에 불과하지만, 온다 리쿠는 ‘어딘가 비뚤어지거나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눈’을 통해 그 안에서 판타지를 엮어낸 것이 아닐까요?
모든 단편집이 그렇듯, 독자마다 제대로 꽂히는 작품은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따라서 수록된 19편 모두에게 만족감과 공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변심’, ‘소녀계 만다라’, ‘화성의 운하’, ‘둘이서 차를’, ‘나와 춤을’이 온다 리쿠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게 해준 작품들이었습니다.
온다 리쿠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입니다. 나름 온다 리쿠 팬이라고 자처하는 저도 일부 작품에선 “뭐지?”라고 자문할 정도로 그녀가 창조해낸 몇몇 이야기에는 전혀 녹아들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가장 모호하고, 몽환적이고, ‘뒤끝이 남는’ 작품”이라고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인데, 아마 이 작품으로 온다 리쿠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약간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편 모두 조금씩은 온다 리쿠만의 개성이 투영됐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녀의 세계로 들어서는 관문으론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