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알라딘 신간 소개란에서 눈에 확 띄는 파격적인 제목을 발견하곤,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능가하는

잔혹 호러물이 새로 출간된 줄 알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제목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달달한 로맨스 느낌의 표지 때문에 꽤나 혼란스러웠는데,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췌장에 문제가 생겨 시한부 삶을 살게 된 여고생 야마우치 사쿠라와

유일하게 그녀의 병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 의 몇 달간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와 사쿠라는 거의 극과 극의 캐릭터를 지니고 있습니다.

는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 못할 정도로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오로지 책에 파묻혀 살아가는 히키코모리 형 인간인 반면,

사쿠라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화려한 여학생입니다.

 

가족 외엔 아무도 모르는 사쿠라의 병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사쿠라의 남은 삶 동안 친구가 되기로 약속합니다.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온 로서는 친구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고 어색할 따름이지만,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밝고 명랑한 일상을 유지하는 사쿠라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 곁에서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 하기로 결심합니다.

 

설정만 놓고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극단적인 두 주인공의 캐릭터, 시한부 삶과는 거리가 먼 로코 같은 밝은 이야기 톤,

미성년 주인공들의 아슬아슬한 로맨스, 그리고 예상 밖의 막판 반전 등을 통해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확실한 엔딩이 정해져있는 스토리를 롤러코스터처럼 전개시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알뜰히 소진하려는 사쿠라의 태도는

10대답지 않아서 더 애틋한 연민과 응원을 불러일으킵니다.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인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은

때론 어딘가 도덕적 훈계 같은 주제의식들이 끼어들어 불편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또래니까 가능한 일이라는 관대한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듯한 그들만의 특별한 데이트 장면을 보고 있으면

명백한 종점이 예고된 로맨스라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다른 독자들처럼 마지막 부분에서 눈물까지 쏟아내진 못했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엔딩처럼 어쩔 수 없는 먹먹함이 몰려와

책을 덮은 뒤에도 잠시 두 사람의 짧은 우정과 사랑을 돌이켜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건넨 가장 소중한 한마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작품의 향기와 함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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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의 키스 예술 탐정 시리즈 2
후카미 레이치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의 일본 내 출간연도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의 데뷔가 2007년이란 걸 보면 적어도 10년은 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서평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격,

, 오페라라는 장르를 소재로 무척 고전적인 서사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정통 미스터리의 미덕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만,

복잡하고 잔혹하고 지능적인 요즘의 미스터리와 비교하면 꽤 단순하고 정직(?)한 작품이라

MSG에 잔뜩 길들여진 독자들에게는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 애호가들에게는

모처럼 고전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읽힐 것입니다.

 

● ● ●

 

일본 최고의 연출과 성악가가 총출동한 오페라 토스카의 상연 도중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주인공이 휘두른 칼은 소품용 칼이 아니라 진짜 칼이었고

그 칼을 맞은 상대 남자 성악가는 경동맥이 잘린 채 무대 위에서 즉사합니다.

운노 형사를 비롯한 수사팀이 오페라 관계자와 관객들을 샅샅이 탐문하지만

소품용 칼이 언제, 누구에 의해 진짜 칼로 뒤바뀌었는지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수사가 벽에 막힐 무렵, 운노 형사의 외조카인 슌이치로가 등장하면서 수사는 급진전됩니다.

전작인 에콜 드 파리 살인사건에서 큰 공을 세웠던 슌이치로는

이번 사건에서도 해박한 지식과 기발한 추리의 힘으로 운노 형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뚜렷한 용의자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 ● ●

 

줄거리에서도 밝혔듯, 이 작품은 에콜 드 파리 살인사건에 이은 예술탐정 시리즈 2탄입니다.

전작을 못 읽은 탓에 슌이치로의 캐릭터를 100%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 작품만으로도 그의 매력이나 능력은 충분히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프로에 가까운 바이올린 실력을 지녔지만 한 곳에 정착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탓에

일본은 물론 외국 여기저기를 방랑자처럼 떠돌며 아르바이트로 삶을 이어가는 슌이치로는

어린 시절부터 경찰이던 외삼촌 운노를 동경했으면서도

정작 규칙과 조직에 구속받는 경찰의 길을 택하진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에서 가장 희화화된 캐릭터인 오베시미 경부와 슌이치로의 케미입니다.

수사팀의 수장인 오베시미는 다분히 연극적인 캐릭터로,

아무 때나 잠이 들고, 엉뚱한 소리만 내지르면서 부하들을 달달 볶는 인물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고, 직관적으로 떠오른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등

모두에게 민폐 그 자체이며, 제발 좀 없어져줬으면 하는 특이한 캐릭터입니다.

그런 오베시미가 유독 슌이치로와는 호흡이 잘 통하는데,

그 사연은 전작인 에콜 드 파리 살인사건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페라 토스카의 줄거리를 알고 있으면 이 작품을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세하게 알 필요까지는 없고, 검색창에 정리된 요약된 줄거리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노력마저 귀찮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여러 설명을 덧붙입니다.

특히 슌이치로는 탐정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오페라 해설가로서의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그는 토스카뿐 아니라 오페라 전반의 역사라든가 예술적 특징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는데,

특히 연출가에 따라 오페라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부분은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다만, 독자에 따라 이 대목이 좀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그리 심오해 보이지 않고, 경찰들은 만화 속 캐릭터처럼 어딘가 붕 떠있는 듯한데

작가 혼자 오페라 자체에 과도한 열정을 쏟고 있는 느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오히려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고,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때쯤에 이르러 작가는 독자에게 도전장을 던집니다. 미공개 단서까지 밝히면서 말이죠.^^)

그리고 막판 스퍼트를 통해 진범과 범행동기를 알아낸 슌이치로는

보란 듯이 범인을 경찰서까지 데려와 운노 형사와 오베시미 경부를 놀라게 만듭니다.

 

이런 형식적인 면까지도 고전미가 물씬 풍겨서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 역시 바로 이 결말 부분이란 점입니다.

뭐랄까.. 지나치게 천재적인 주인공 때문에 오히려 미스터리의 맛이 희석됐다고 할까요?

슌이치로의 추리는 나름 개연성이 있긴 하지만 그 과정은 사실 엄청난 비약입니다.

엄청난 직감이나 육감 없이는 불가능한 추리,

결과만 듣고 보면 수긍이 가지만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추리를 구사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천재적 주인공의 비약적 추리에 의한 결말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슌이치로의 마지막 활약이 꽤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아직 못 읽은 에콜 드 파리 살인사건은 그림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과연 그 작품에서는 슌이치로의 천재성이 어떻게 발휘됐을지 궁금합니다.

, 후카미 레이치로의 예술탐정 슌이치로 시리즈가 이후에도 계속 출간됐는지 모르겠지만,

고전미 넘치는 서사와 정통 미스터리의 맛, 다소 연극적인 캐릭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다른 예술분야에서도 활약할 슌이치로의 모습을 많이 기대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너무 잔혹한 서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독자라면

한번쯤 후카미 레이치로의 작품으로 휴식을 취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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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 미아&뭉크 시리즈
사무엘 비외르크 지음, 이은정 옮김 / 황소자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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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들을 통해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직관력의 소유자인 여형사 미아 크뤼거는

쌍둥이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마약쟁이 남자를 과잉진압으로 죽인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거의 폐인이 된 채 외진 섬에 머물며 자살할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경찰대생이던 미아를 특수수사팀으로 스카우트했던 베테랑 형사 홀거 뭉크는

연쇄 소녀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섬으로 잠적했던 미아를 설득하여 특수수사팀에 복귀시킵니다.

기대했던 대로 미아는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던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던 수사는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그 와중에 추가로 두 명의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 ● ●

 

본문 중에 미국에서나 벌어질 법한 끔찍한 연쇄살인이라는 표현이 두어 번 등장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화제가 됐던 몇몇 북유럽 스릴러를 돌이켜 보면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는 미국이나 멕시코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곳처럼 묘사되곤 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런 선입관을 갖기에 충분할만한 연쇄 소녀살인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애써 노르웨이에서 이런 사건은 무척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비슷한 표현을 두어 번씩이나 동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무리 잔혹한 스릴러라도 좀처럼 다루지 않는 소재가 미성년자가 피해자가 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은근슬쩍 안전한 노르웨이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메인 사건은 6살 소녀들을 희생자로 삼은 참혹한 연쇄납치-살해로 설정했습니다.

그런 불편함 때문에 계속 읽기를 뒤로 미루다가,

어쩔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국내에 출간된 지 거의 1년이 다 돼서야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라마-연극 작가라는 대중지향적인 이력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엘 비외르크는 (적어도 희생된 소녀들에 관한) 불편한 묘사들을 현명하게 자제했고,

이야기의 중심을 노르웨이 경찰 홀거 뭉크와 미아 크뤼거 콤비의 캐릭터 플레이에 맞춤으로써

기대 이상의 재미와 탄탄한 서사를 선보였습니다.

 

미아 크뤼거가 사건과 단서를 바라보는 방법은 여느 경찰들과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직감과 예감에 가까운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 과학수사는 별 존재감이 없습니다.

미아가 이미 특유의 직관력을 통해 많은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홀거 뭉크를 비롯한 수사팀 동료들은 소설같기만 한 그녀의 추리를 옹호하고 지지합니다.

미아는 사건현장을 반복해서 방문하거나 집요하게 탐문하는 대신

종이 위에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적으면서 행간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곤 합니다.

단편적인 단서들을 이리저리 재배열하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몇 수를 내다보는 바둑 고수처럼 아무도 예상 못한 추리를 내놓는 것입니다.

 

반면, 54살의 베테랑 홀거 뭉크는 상관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타고난 반골기질도 있고,

은근한 카리스마로 오래 호흡을 맞춰온 수사팀 동료들을 장악하는 면모도 있지만,

대체로는 어딘가 느긋한 사람 좋은 중년아저씨처럼 보입니다.

연쇄 소녀살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대단한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지만,

애초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인 미아를 수사팀으로 데려온 것도 그였고,

폐인처럼 살던 미아를 사건현장으로 복귀시켜 수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만든 것도 그입니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언론의 공격과 상부의 부당한 압력에 저항하며

수사팀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그의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든든한 지원군 역할이라고 할까요?

 

사건 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지는 대목은 미아와 뭉크의 가족사입니다.

미아가 쌍둥이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희망과 의지를 잃어버렸다면,

뭉크는 바람난 아내와의 이혼, 제멋대로 살다가 19살에 아이를 낳은 딸 등

콩가루가 된 가족의 비극을 모두 자기 탓이라 여기는 남자입니다.

어쩌면 그런 가족사를 지닌 두 사람이기에 6살 소녀들이 연이어 희생되는 사건을 접하면서

경찰 이상의 감정을 이입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살짝이든 심하게든 어딘가 망가진 경찰 캐릭터에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부여받은 주인공은

영미권이나 북유럽 스릴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투적인 설정이지만,

어쨌든 미아와 뭉크는 상투성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임은 분명합니다.

 

아쉬운 점을 몇 가지만 꼽자면...

초반에 그려진 미아의 캐릭터 쌍둥이 동생의 죽음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해 섬에 숨어든 채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피폐한 삶 에 비해

그녀의 현장 복귀가 너무 쉽고 가볍게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사건현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지나치게 쌩쌩했고, 트라우마는 독자의 기억에서 금세 잊힙니다.

물론, 작가는 수시로 그녀의 상처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아의 트라우마는 왠지 장식품같은 느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 연쇄 소녀살해사건과 맞먹는 비중으로 병행되는 종교집단의 스토리는

(메인 사건과 접점이 있긴 하지만) 과도한 분량과 지루한 전개로 맥이 빠지는 대목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보 설명을 맡은 단순 단역 소개에도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가 동원됐는데,

이 역시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스킵하듯 페이지를 넘겨버리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오타들이 무척 눈에 거슬렸습니다.

전문 교정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라도 프리뷰를 맡겼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상태로 작품을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이 제겐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목하라! 모던 크라임의 새로운 거장이 나타났다.”라는 화려한 홍보 카피보다

본몬 속의 오타 하나에 더 신경쓰는 것이 출판사의 본연의 자세 아닐까요?

 

작가 소개글을 보니 후속작 올빼미역시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작품이 미아-뭉크 콤비의 시리즈 작품이라면 더욱 반갑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국내에 출간된다면 관심을 갖고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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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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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전공을 읽었습니다.

2년 전, 마지막으로 읽은 그녀의 작품이 10대 소녀들의 성장통을 다룬 수박향기였는데,

그녀의 전공인 금지된 사랑과 어긋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것은

7~8년 전쯤의 장미 비파 레몬이 마지막 기억인 것 같습니다.

 

웨하스 의자’,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낙하하는 저녁’, ‘반짝반짝 빛나는

한때 그녀에게 심취하여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그 무렵이 에쿠니 가오리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벌거숭이들여전히 에쿠니 가오리, 그녀 맞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차분하고 담담한 문장들 속에 실은 꽤나 격한 감정들을 잘 담아낸 수작이라,

아직도 그녀의 전성기가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벌거숭이들에는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크게 보면 30대의 모모와 히비키 두 여자를 중심으로 그 가족 또는 지인들이 등장하는데,

에쿠니 가오리는 그들을 통해 인물 수만큼이나 다양한 애증의 감정들을 풀어놓습니다.

 

당연히 결혼할 것으로 여겨지던 6년 사귄 남자와 헤어진 뒤 9년 연하남을 택한 36살의 모모,

그런 모모를 만나면서 동시에 모모의 절친인 유부녀 히비키를 마음에 품는 27살의 사바사키,

절친의 남자란 걸 알면서도 그의 접근에 낯선 설렘을 느끼는 네 아이의 엄마 히비키 등

세 명의 중심인물은 남녀의 관계, 즉 연애와 결혼 또는 구속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엄마와 연애를 경멸하며 프리라이터로서 독립적인 삶을 사는 모모의 언니 요우,

그런 딸 요우를 이해 못하며, 여자의 삶의 가치를 안락한 결혼에서 찾는 모모의 엄마 유키,

딸과 아내의 갈등을 알면서도 현명한(?) 중립적 태도로 가족을 지키는 모모의 아빠 에이스케,

황혼에 이르러 가정을 버린 채 진짜 인연 히비키의 엄마 카즈에 을 만난 야마구치,

그런 새 장인야마구치를 증오하면서도 정작 아내 히비키를 건성으로 대하는 하야토 등은

가족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갖가지 희로애락을 이야기합니다.

 

벌거숭이들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관계때문에 고민하고, 위로받고, 상처받습니다.

특히 주인공인 모모는 연애문제에서도 가족문제에서도 관계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6년을 만난 이시와와 채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하남 사바사키를 만났던 모모는

자신과 만나는 와중에 절친인 히비키에게 (심지어 숨기지도 않고) 들이대는 사바사키를 보며

그와 자신의 관계 남편감? 애인? 친구? 섹스 파트너? 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를 구속해야 하는 것인지, 자신이 그의 구속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히비키를 원망하고 질투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모르는 척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콩 샐러드를 뒤적이며 모모는 이시와를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만날 사바사키도.

언제까지일까.

그리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기보다,

어째서 인간은 꼭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가족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를 거부하고 엄마를 증오하며 가족과 등 돌린 채 히피 같은 삶을 사는 언니 요우와 달리

모모는 진작부터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가족의 일원으로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녀 역시 엄마의 집착에 반항하지만, 언니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원하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치과의사가 되어 병원을 물려받는 효녀노릇도 그녀의 몫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성실한 남자와의 결혼에 안착하기를 바라는 엄마가 불편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화해와 용서와 이해와 포용의 의무가 부과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녀에게 관계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명분인지도 모릅니다.

 

모모 외에 다른 모든 인물들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에쿠니 가오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또 격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간결하고 순한 문장들을 통해

그들이 관계때문에 겪는 감정적 혼란들을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읽히지만 행간은 온통 치열하고 뜨거운 불덩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에쿠니 가오리의 진짜 매력이란 생각입니다.

 

다만, 모모와 히비키는 물론 등장인물 모두 작품의 주제를 위해 기능적으로 역할 한다는 점,

, 지나칠 정도로 적절한 문제를 안고 있고, 지나칠 정도로 적절한 관계로 설정된 점은

(소설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작위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전작들과는 달리 왠지 에쿠니 가오리가 정교한 설계도를 미리 그려 놓은 뒤

그에 맞춰 캐릭터와 사건들을 배치한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 막상 생각해보니...

제 주위에 무난하고 평화롭기만 한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역시 누구나 다 소설에 어울릴 법한 그런 문제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번역하신 신유희 님의 후기 중 일부를 인용하며 두서없는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부분일 뿐이며

그래서 편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이 인간관계이지 싶다.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분이 전부인 양 기대어 사랑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른 부분에 절망하여 등을 돌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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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구 나와 23인의 노예 2 - 소설
오카다 신이치 지음, 이승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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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교정기를 닮은 SCM(Slave Control Method)을 착용한 사람끼리 게임을 벌여 이긴 사람은 주인이 되고, 진 사람은 그()의 노예가 된다는 독특한 설정 덕분에 이 시리즈의 1편을 찾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말초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많아서 때론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통제 가능한 인간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집요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나름의 미덕도 갖춘 작품이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어쩌다 보니 2년 만에 2편을 읽게 됐는데, 무엇보다 SCM이라는 기발한 도구를 만들어낸 창조주의 실체와 목적이 궁금했고, 1편에서 주인과 노예로 갈라선 인물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도 기대됐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이 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고, 1편의 인물들은 몇몇을 제외하곤 병풍처럼 등장하기만 한데다, 1편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저처럼 꽤 공백이 긴 독자들로서는 전체 그림을 파악하기 쉽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곤혹스러웠습니다.

이야기 역시 확장이라기보다는 연재를 위한 연장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하나의 큰 줄기 없이 개별적인 사건의 나열로 구성된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인물들의 목표가 불분명하다 보니 뒷이야기에 대한 기대감도 감소되고, 결국 누구와 누구의 싸움인지, 선과 악의 대결인지, 그저 판타지인지도 모호해집니다. 덧붙여 1편의 프리퀄 격인 에피소드들이 간간이 소개되는데, 그 역시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서사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 때문에 이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물들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고전적 혹은 정통 서사에 익숙한 독자와 달리 굳이 큰 줄기의 스토리가 없더라도 개별 에피소드만 재미있다면 얼마든지 소비할 수 있는, 말하자면 파편적인 서사에 익숙한 독자에겐 흥미롭게 읽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SCM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과정이라든가, 1편에서 절대적 주인으로 이름만 거론됐던 류오우의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 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두 여자 캐릭터의 활약을 예고한 후반부 등은 따로따로 떼어놓고만 보면 긴장감도 높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좀 읽어보려 했는데 인터넷 서점이나 장르물 카페에선 찾기 어려웠고, 블로그는 대부분 만화판에 대한 언급들이라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이후에 나온 3편과 외전을 읽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 이 시리즈를 접하지 못한 분께 1편만큼은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스러운기발한 상상력과 판타지의 조합을 맛볼 수 있는 정말 특이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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