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왕의 방패 - 제166회 나오키 상 수상작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1
이마무라 쇼고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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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戰國時代)의 전란 속에 가족을 잃은 교스케는 석축, 즉 돌쌓기 장인 도비타 겐사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뒤 그의 후계자로 성장합니다. 각지의 다이묘들이 큰 성의 성벽 쌓는 일을 의뢰할 만큼 대단했던 겐사이의 명성은 돌의 모습으로 경계를 지켜주는 새신(塞神)’에 빗대어 새왕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그런 겐사이의 후계자가 된 교스케의 꿈은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성을 쌓는 것입니다. 모든 성이 난공불락이 된다면 더 이상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포 장인인 구니토모 겐쿠로는 포선(砲仙)이 되어 어떤 방어도 깨뜨리는 총포를 만들어 평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센고쿠시대의 막바지, 일본의 패권을 다투는 대전투를 앞두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방패와 창의 마지막 대결을 벌입니다.

 


모순(矛盾)이라는 단어의 어원대로 모든 걸 뚫을 수 있는 창모든 걸 막아낼 수 있는 방패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꺾이든 부서지든 어느 한쪽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벽을 쌓으려는 새왕 교스케와 그 어떤 성벽도 궤멸시킬 총포를 만들려는 포선 겐쿠로는 하필 전란으로 뒤덮인 16세기 일본의 센고쿠시대에 숙적으로 만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아이러니한 건 교스케와 겐쿠로 모두 승전이나 패권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교스케는 난공불락의 성을 통해, 겐쿠로는 천하무적의 총포를 통해 전쟁을 끝장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궁극의 꿈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전으로 비유하자면 전쟁 억지를 위해 한쪽은 완벽한 아이언 돔, 한쪽은 막아낼 수 없는 핵폭탄을 구축하려고 분투한다는 셈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공존 불가능한 방패와 창의 대결은 어떻게 막을 내릴까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전쟁 서사의 주인공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사들의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벽을 쌓는 새왕총포를 만드는 포선을 앞세운 새왕의 방패는 무척이나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의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또한 승패의 결과 혹은 승패가 몰고 온 역사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상반된 수단을 통해 전쟁 없는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두 주인공의 집념과 분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 어떤 전쟁 서사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감동적이면서도 농도 짙은 휴머니즘을 선사합니다. “열정 그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는 아사다 지로의 평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완벽한 성벽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교스케가 선()이고, 무자비한 총포로 전쟁을 억지하려는 겐쿠로가 악()인 듯싶지만 이 이야기 속엔 그 어디에도 선과 악의 구분이 없습니다. 일본 패권을 노리는 두 진영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고 교스케와 겐쿠로는 각각의 진영에 속해 맞대결을 펼치지만 새왕의 방패승자독식 패자지옥같은 어설픈 주제 대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을 섬세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물들은 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진심을 다하는 교스케와 겐쿠로를 응원하고 지원합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수많은 목숨들이 하찮게 스러지는 전장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빛을 잃지 않는 두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새왕의 방패는 일본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겐 꽤 진입장벽이 높은 작품입니다. 복잡한 인명과 지명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 센고쿠시대의 역사를 전혀 모르면 앞뒤 맥락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일본소설, 특히 시대소설에 익숙한 터라 그리 낯설지 않았고, 마침 1년 전 교토 여행 때 새왕의 방패의 주 무대인 오미(현재의 시가현) 비와호(琵琶湖) 인근을 둘러본 적이 있어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센고쿠시대에 관한 간략한 지식(나무위키 검색 결과만으로도 충분합니다)과 함께 교토와 비와호 인근의 지도를 예습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교스케와 겐쿠로의 삶은 전쟁과 평화를 거듭했던 센고쿠시대의 요동치는 역사와 꼭 닮아있으며, 그들의 터전이자 최종 대결의 무대들 - 시가현, 비와호, 오쓰성 등 - 은 단순히 무대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워낙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인물이나 줄거리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세세히 늘어놓자면 A4 몇 장으로도 모자랄 만큼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체질적으로 일본 시대소설에 거부감이 있다면 할 수 없지만, 교스케와 겐쿠로가 들려주는 진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는 그 거부감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처절하고도 감동적이라서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분권도 안 한 720여 페이지의 분량이라 저는 이틀에 걸쳐 읽었지만, 이른 아침 첫 페이지를 연다면 늦은 밤이 되기 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족 하나

희한한 시리즈 만들기에 진심이신 북스피어의 삼송 김사장님께서 이번엔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라는 긴 제목의 별난 시리즈를 창조하셨습니다. 새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새왕의 방패라는 멋진 작품으로 끊으셨는데, 실은 북스피어 출간작 중에 이 시리즈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들이 있어서 제목만이라도 소개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구마가이 다쓰야), ‘연가’(아사이 마카테), ‘웃는 이에몬’(교고쿠 나쓰히코)은 당장이라도 개정판을 통해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시리즈에 추가하고 싶은 작품들입니다.

 

- 사족 둘

새왕의 방패는 굳이 시간적 배경을 좁혀서 말하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흥망성쇠를 겪은 1570~1600년입니다. 그래선지 등장하는 일본 무장 중(두 주인공과 교감 혹은 친분을 나누는 인물 중에도) 적잖은 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대목도, 침략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인물도 없긴 하지만, 아무래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띌 때면 잠시 기분이 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무시무시한 무력을 지닌 왜적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땅을 지켜낸 선조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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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웨딩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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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저토스키는 3년 간 소식을 끊고 살던 딸 매기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선 석 달 후에 결혼한다고 통보하자 반가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프랭크를 더욱 놀라게 한 건 매기의 결혼 상대가 그녀가 재직 중인 재벌그룹 회장의 아들 에이든이란 사실,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다분히 불편하고 비밀스런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딸 매기와의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프랭크는 그녀의 선택을 믿고 존중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 직전, 프랭크는 예비사위 에이든이 돈 태거트라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우편으로 받곤 다시금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더구나 결혼식이 열릴 호화별장 인근에서 만난 한 남자가 에이든이 내 조카 돈 태거트를 살해했다!”고 주장하자 프랭크의 머릿속은 이내 공포에 잠식됩니다.

 


블라인드 웨딩2024년에 출간된 장르물 가운데 개인적인 베스트 목록에 올린 히든 픽처스의 작가 제이슨 르쿨락의 신작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이자 정교한 미스터리 서사까지 결합된 히든 픽처스에 홀딱 반한 나머지 그의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갑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지극히 현실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가족 스릴러에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가미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결혼식이 열리는 재벌가의 호화별장입니다. 3일에 걸쳐 연회와 결혼식이 벌어지는 가운데 예비사위 에이든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한 프랭크는 홀로 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에이든의 뒤를 밟는가 하면, 돈 태거트라는 여자의 가족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보는 매기의 거센 반발만 불러일으킬 뿐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호화별장에서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고 프랭크는 이 결혼의 배후에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온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언뜻 줄거리만 보면 악당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눈먼 결혼을 강행하려는 딸을 구하고 악당을 응징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제이슨 르쿨락은 그런 평범한 스토리 대신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강렬한 설정을 통해 지금껏 접하지 못한 독특한 가족 스릴러를 선보입니다. 결혼식에 함께 참석한 프랭크의 누나 태미는 매기를 구하려고 분투하는 프랭크를 향해 이건 영화 테이큰이 아니고, 너는 리암 니슨이 아니야.”라고 일갈하는데, 다른 맥락에서 나온 대사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역설적인 대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프랭크의 진짜 미션은 뭘까요? 프랭크는 매기의 눈먼 결혼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매기가 감추는 진실은 과연 뭘까요? 중반부를 조금 지나 드러나는 끔찍한 진실 앞에서 독자들은 아마 할 말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가족 스릴러를 이런 식으로 비틀 수도 있구나, 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혼식을 앞둔 호화별장에서 연이어 죽음이 벌어지고, 에이든을 비롯한 재벌가의 비밀과 매기의 진실이 야금야금 밝혀지는가 하면 프랭크에겐 여러 차례의 위기와 반전이 닥치는 등 마지막까지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다소 단선적인 스토리가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모르는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별 5개는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인물이든 사건이든 서사든 여러 면에서 히든 픽처스와 비교하다 보니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으로 제이슨 르쿨락의 스릴러에 호감을 갖게 된 독자라면 꼭 히든 픽처스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제이슨 르쿨락은 여전히 제 관심목록 상단에 남겨둘 만한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 자체가 2024년에 출간됐으니 1년 만에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는 건 과욕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는 일만은 없기를 사심 가득 담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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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마리오네트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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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토막살인마라는 별명의 연쇄살인범에게 약혼자를 잃고 패닉과 우울증에 빠져 휴직했던 응급의학과 의사 아키호는 복귀 후에도 좀처럼 악몽과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온 미소년 료스케를 극적으로 살려낸 아키호는 형사로부터 그가 한밤중의 토막살인마라는 말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또 다른 토막살인을 저지른 뒤 도주하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주치의를 자처한 아키호는 약혼자를 살해한 료스케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자신은 진범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며 경찰은 허위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나타나자 아키호는 혼란에 빠지고, 이내 직접 진실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현직 의사인 치넨 미키토는 메디컬 미스터리뿐 아니라 유리탑의 살인같은 본격 미스터리를 집필할 정도로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응급의학과 의사 아키호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메디컬 서사는 아주 약간의 비중에 불과할 뿐이고 진짜 몸통은 서스펜스와 반전이 몰아치는 정통 미스터리입니다.

약혼자를 살해하고 토막 낸 한밤중의 토막살인마료스케에게 복수하려던 아키호가 점차 그의 무고함을 믿게 되면서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평범한 미스터리라면 과연 누가 진범일까?”에 주목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겠지만,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심리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독특한 설정 때문에 서스펜스의 향기까지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료스케가 한밤중의 토막살인마가 확실하다는 경찰, 자신은 진범의 덫에 걸린 무고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료스케, 료스케가 범인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의사의 신분으로 진실 찾기에 나선 아키호 등 서로 다른 주장과 생각을 지닌 인물들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탓에 독자는 누구의 주장을 믿어야 할지, 주인공 아키호가 어느 길로 가야 맞는 건지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료스케의 완벽한 미모는 아키호를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려서 서스펜스의 불온한 농도를 더욱 진하게 만듭니다. 경찰로부터 료스케는 사람을 조종하는 달인이란 말을 들었지만 아키호는 진실과 무관하게 자꾸만 료스케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놀람과 자책을 거듭합니다.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 하지만 손에 들어오는 단서는 대부분 료스케의 무죄를 입증한 것들뿐이고, 그때마다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면서 조금씩 다가서는 료스케를 좀처럼 거부하지 못합니다. 독자 역시 아키호에게 제발 정신 좀 차려!”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료스케의 무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료스케와의 협력 속에 진실을 찾는 아키호의 여정은 크고 작은 위기에 직면하며 아슬아슬하게 전개됩니다. ‘한밤중의 토막살인마에게 살해당한 자들의 공통점을 조사하고 거짓 신분으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는가 하면, 동시에 료스케의 알리바이 입증을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은 아키호는 자신과 료스케가 지닌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기에 이르지만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재난을 초래하고 맙니다.

 

사실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대다수의 독자는 진범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넨 미키토의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듯 마지막 페이지까지 절대 마음을 놓아선 안 됩니다. 20여 페이지에 이르는 에필로그는 기대 이상의 충격과 반전을 선사하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치넨 미키토의 작품 가운데 이런 식의 엔딩과 여운을 남긴 경우는 거의 없어서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조금은 얼얼한 기분입니다.

 

신작 소식이 들리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바구니에 담는 작가 중 한 명이 치넨 미키토지만, 이번엔 두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위화감 때문에 읽는 내내 고개를 갸웃한 게 사실이고,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 위화감이 명쾌하게 사라지지 않은 탓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하지만, ‘한밤중의 마리오네트는 제가 기대했던 치넨 미키토만의 매력적인 미스터리를 거의 99% 충족시켜준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꽤 많은데, 2025년에도 그의 신작과 만날 수 있기를 한껏 고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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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 죽음의 시간
최들판 지음 / 엘릭시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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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쇠락한 항구도시 녹둥시에서 전문 시비꾼으로 많은 사람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던 41똥미친개한칠규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성해명 계장을 비롯한 녹둥시 동부경찰서가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나선 가운데, 한칠규 주변 인물들의 불온한 동태가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한칠규의 자식이자 공인된 문제아인 혜성-혜리 남매, 은밀하게 지하사업을 벌이는 노회한 전직 조폭 윤중정, 한칠규에게 거듭 폭행을 당한 학교 교사들, 그리고 그 외에도 한칠규를 죽이고 싶어 한 사람들은 녹둥시에 지천으로 널려있었습니다.


 

이미 상업성을 잃은 지 오래인 고기잡이 항구 하나를 낀 시골다운 느긋함과 퇴락의 흔적이 물씬한 가운데 때로는 막장까지 치닫는 난폭성이 공존하는 곳.” (p63)

 

이 작품의 무대인 녹둥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성수기엔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녹둥의 기본 정서는 비린내와 천박함과 난폭성입니다. 그리고 그런 녹둥에서 단순 폭행치사인지, 지병의 악화로 인한 비명횡사인지, 불법사업에 얽힌 계획된 살인인지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변사가 발생합니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였던 한칠규의 죽음은 말 그대로 변사로 묻힐 수도 있었지만 사망 직전 그가 걸었던 마지막 전화 한 통 때문에 경찰의 수사대상으로 전환됩니다. 변사에 얽힌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1사건의 배경에 이어 2범죄수사에선 성해명 경감을 위시한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의 수사 과정이 그려집니다.

 

미스터리 느와르 군상극이라는 출판사의 소개대로 ‘7: 죽음의 시간은 다채로운 장르가 믹스된 작품입니다. 한칠규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미스터리가 기본 뼈대지만, 부산 구암 바닷가를 무대로 건달들의 치열한 전쟁을 그린 뜨거운 피’(김언수)를 연상시키는 느와르의 미덕도 한껏 만끽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한칠규와 엮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털어놓는 기구한 사연들을 읽다 보면 오쿠다 히데오의 군상극에서 맛볼 수 있는 씁쓸한 아이러니 혹은 웃지 못 할 희비극의 향기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2부부터는 수사의 주체인 성해명 경감과 녹둥시 동부경찰서 형사1계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느와르 군상극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동네 치기배 사망 사건인데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네.”라는 한 경찰의 푸념에 100%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고도 별 0.5개를 뺀 건 미스터리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사건 자체가 소소한 건 이 작품의 서사에 걸맞은 설정이라 시비 걸 일이 없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정체라든가 그 진범을 특정하는 과정이 지나친 비약 또는 불친절한 생략으로 이뤄져있어서 다 읽고도 찜찜함이 남고 말았습니다. 사실 누가 범인인지는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소 허술하고 급한 마무리였다고 할까요? 꼰대 같기도 하고 진짜 재능을 숨긴 노회한 명탐정 같기도 한 성해명 경감이라든가 숨은 주인공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반영아 팀장 등 동부경찰서 경찰 캐릭터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미스터리의 아쉬움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게 사실입니다.

 

5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이 붙었지만 최들판은 이 작품으로 데뷔한 신인작가입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어떻게 이만한 내공을 지닌 작가가 이제야 데뷔를 한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조직뿐 아니라 쇠락한 항구도시의 범죄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생한 묘사에 감탄했다.”는 장강명의 추천사처럼 대단한 정보력과 자료조사도 놀라웠지만 단어와 문장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필력에 여러 번 눈길이 끌리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앞으로 녹둥시 동부경찰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는데, 이야기 곳곳에 흥미로운 떡밥이 깔려있기도 하고 나름 산고를 겪으며 태어난(‘작가후기참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작가가 이 한 작품만으로 은퇴시킬 것 같진 않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머잖아 녹둥시의 두 번째 이야기를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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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정표 - 제76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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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아시자와 요의 미스터리와는 색깔 자체가 달라 보이네요. 그래도 이야미스와는 차별화된 아시자와 요만의 으스스한 느낌은 여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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