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점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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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인기 있는 주머니가게 미시마야는 본업 외에 괴담을 들어주는 일로도 유명합니다.

분명 실제로 겪었지만 누구도 믿지 않을, 그래서 절대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미시마야한쪽에 마련된 흑백의 방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그 이야기들을 털어놓습니다.

흑백의 방의 유일한 규칙은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입니다.

, ‘말하는 자는 이야기함으로써 마음속의 오랜 고뇌와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듣는 자는 그 이야기를 절대 흑백의 방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시리즈의 전작인 금빛 눈의 고양이까지 듣는 자역할을 맡았던 건 소녀 오치카입니다.

고향에서 끔찍한 일을 겪은 뒤 미시마야의 주인인 숙부에게 몸을 의탁했던 오치카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괴담을 정성껏 들어준 것은 물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고향의 참극이 남긴 자신의 고통과 상처 역시 대부분 치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오치카가 결혼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면서

듣는 자의 역할은 미시마야의 차남 도미지로가 이어받게 됩니다.

, ‘눈물점은 도미지로의 듣는 자로서의 데뷔 무대인 셈입니다.

 

사실, 17살에 듣는 자역할을 시작한 오치카에 비해 도미지로는 다소 미덥지 못해 보입니다.

오치카보다 나이는 몇 살 더 많지만 몸도 약하고 심지도 굳건해 보이지 않습니다.

, 주위에서 밥벌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털어놓는 괴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의구심이 드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치카가 괴담을 통해 상대와 자신을 치유하며 성장했듯

차남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형이 물려받을 미시마야를 나가야 할 도미지로 역시

앞으로 흑백의 방에서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장할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도미지로는 이 작품 속 네 편의 괴담을 듣는 동안 꽤 다채로운 경험을 겪는데,

때론 감동하기도, 때론 두려워하기도, 때론 오치카에게 도움을 청할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도미지로 스스로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기도 하고,

흑백의 방의 호위 역할을 맡고 있는 하녀 오카쓰에게 충고와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듣는 자로서의 역할에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 아래 들러붙은 뒤 사람을 홀리고 추악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물론

스스로 살아 움직이기도 하는 기괴하고 야릇한 점 이야기를 다룬 눈물점’,

끔찍한 죽음을 거듭 초래해온 옛 조상의 원념과 저주 탓에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없게 된 가가리야 가문 여자들의 비극을 그린 시어머니의 무덤’,

가족을 잃은 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오직 달리는 일에만 매진하던 한 파발꾼이

자신에게 들러붙은 요괴와 함께 보낸 슬프고 애잔한 잠깐의 시간을 그린 동행이인’,

그리고 이계(異界)의 대저택에 끌려온 뒤 요괴의 저주와 마물의 위협에 빠진 여섯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린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모두 네 편의 중단편들이 수록돼있습니다.

 

미미 여사는 듣는 사람을 교체했더니 역시 이야기도 바뀌게 되네요.”라는 말과 함께

듣는 사람이 여성(오치카)이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이야기도 있다.”고 밝혔는데,

개인적으론 네 편 모두 오치카가 들었어도 무방했을 것 같았고,

오히려 오치카가 들었다면 이야기의 색깔이 묘하게 변주됐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가 이 아가씨(오치카)도 이제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며

오치카에게서 듣는 자의 고단한 짐을 덜어주려 한 마음 역시 100% 이해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치카가 특별출연하는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이 작품까지 미시마야흑백의 방에서 오고간 괴담이 모두 31개라고 합니다.

앞으로 모두 99개의 괴담을 쓰겠다는 미미 여사의 목표는 개인적으론 반가운 일이지만

그럴 경우 (물리적으로 볼 때) 다른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확 줄어들 게 될 거란 의미라서

무작정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눈물점을 덮자마자 현재 일본에서 연재 중이라는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미야베 월드 2의 열혈 팬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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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워크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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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의 독서계획 해리 보슈+@ 다시 읽기의 두 번째 “+@”블러드 워크입니다.

(“+@”시인’, ‘블러드 워크’, ‘보이드 문’, ‘허수아비입니다.)

보슈 시리즈를 다시 읽는 계획에 정작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가 포함된 것은

이 작품들 속 주인공들이 이후 보슈 시리즈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블러드 워크의 주인공 테리 매케일렙은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면에서 스탠드얼론이지만 보슈 시리즈의 외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FBI 프로파일러 테리 매케일렙은 뛰어난 현장요원이라기보다는

서류, 사진, 영상 등 자료를 통해 연쇄살인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전성기인 40대 중반에 조기 은퇴를 해야만 했고,

다행히도 심장이식수술을 받은 뒤로는 아버지가 남긴 보트에서 지내는 중입니다.

어느 날, 그래시엘라라는 여인이 찾아와 동생 글로리아의 살인범을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민간인에 불과한 매케일렙은 더 이상 FBI요원이 아니라며 냉정하게 거절하지만,

살해된 동생이 자신의 두 번째 심장의 주인이었다는 그녀의 말에 동요하고 맙니다.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종결됐던 글로리아의 죽음에서 수상한 흔적들을 발견한 매케일렙은

얼마 안 돼 연쇄살인의 단서를 포착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들의 공통점까지 찾아냅니다.

하지만 사건이 확대되자 FBILA경찰국은 매케일렙의 수사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익명의 제보를 근거로 매케일렙을 주요 용의자 선상에 올려놓기까지 합니다.

 

블러드 워크’(피의 작업)FBI 연쇄살인 전담요원들이 자신들의 일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피로 진 빚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했다.”는 매케일렙의 표현대로

요원들은 끔찍한 환상을 현실로 옮긴 놈들이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분노를 에너지 삼아 연쇄살인범 체포에 큰 공을 많이 세운 매케일렙이었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인 심장이식수술로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그는

더는 과거의 분노와 공과에 매달리지 않고 안온한 삶을 선택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두 번째 삶이 한 여자가 살해된 덕분이란 걸 알게 된 뒤

매케일렙은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FBI 시절의 분노를 곱씹으며 위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장기이식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나 휴먼스토리를 꽤 여러 편 봤지만

전직 요원이 자신을 살린 장기기증자가 살해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구도는

그 발상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든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특히 그 사건이 연쇄살인범의 소행이며 특별한 목적을 가졌음을 파악하는 매케일렙의 여정은

민간인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방심할 수 없게 팽팽한 긴장감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매케일렙의 수사에 가장 큰 암초는 바로 자신이 몸담았던 FBILA경찰입니다.

글로리아 사건을 방치하듯 뒷전으로 미뤄뒀던 LA경찰은

매케일렙의 조사가 진행될수록 자신들의 실수가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며 훼방질을 시작했고,

연쇄살인이 입증된 시점에선 FBI까지 끼어들어 매케일렙을 전선 밖으로 몰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인맥과 부적절한 방법까지 동원한 매케일렙의 조사는 거침없이 진행되면서

양측의 갈등과 긴장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위험한 수위까지 치닫습니다.

 

막판에 몇 차례의 반전을 통해 드러나는 글로리아 살인사건의 진실은 꽤 충격적입니다.

미궁 속으로 숨어들었던 잔혹한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냈다는 짜릿함이라든가

훼방꾼이던 FBILA경찰을 속 시원하게 짓뭉갰다는 통쾌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오히려 참담하게 절망하는 매케일렙의 애잔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범인 찾기에 그치지 않고 비장미와 비극적인 서사로 결말을 장식하는

마이클 코넬리 특유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끝내주는대목인데,

그 무게감과 깊이는 보슈 시리즈의 어느 작품과 견줘도 절대 밀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중반부까지의 약간은 지루한 동어반복과 느린 전개입니다.

민간인으로서의 매케일렙의 한계라든가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헛발질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가 꽤 많은 정성과 분량을 할애했다는 얘긴데,

이 부분만 견뎌낸다면 중반 이후 폭주하듯 달려가는 이야기에 푹 빠질 수 있습니다.

 

매케일렙의 FBI 시절 활약상을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시인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는데,

(제 기억력의 문제인지 시인에서는 매케일렙을 못 본 것 같지만)

나중에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그를 등장시키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보입니다.

그 전에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도 매케일렙이 모습을 나타내는데,

과연 어떤 역할로 보슈와 협업을 하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다만 무척 아쉬운 건 시인의 계곡이후 어느 작품에서도 매케일렙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인데,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이어졌다면, 이라는 부질없는 뒷북을 두드려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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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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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뭐야?”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정말 인상 깊었던 영화 한 편을 콕 찝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그동안 봤던 영화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뭘 ‘1순위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연출, 시나리오, 배우 아니면 재미, 메시지 등 사람마다 ‘1순위의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가장 첫 번째 기준은 머릿속 기억이 아니라 내 마음이 기억하는 만큼이란 생각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악평을 하고 온갖 부족함을 지적한 영화라 하더라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소중하게 자리 잡았다면 그 영화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아닐까요?

 

이 작품의 제목인 영화처럼이란 말은

흔히들 비현실적인 일을 가리키거나 이뤄지기 힘든 소망을 바랄 때 쓰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에 수록된 다섯 편의 중단편 모두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판타지 같기도 하고, 해피엔딩이 정해진 어른용 동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잔혹한 미스터리와 폭력적인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지만 정서적 균형(?)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가네시로 가즈키나 아사다 지로의 따뜻한 이야기 역시 그에 못잖게 좋아하는데,

10여년 만에 다시 읽은 영화처럼은 기대한대로 수시로 제 눈가를 뜨뜻하게 달궈줬습니다.

 

조총련 계열의 민족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의 부재라는 공통의 상처를 지닌 두 소년이

영화로 맺어진 인연 덕분에 평생의 친구가 돼가는 이야기를 그린 태양은 가득히’,

남편의 자살로 혼란을 겪던 여자가 영화감독을 꿈꾸는 비디오대여점 알바생과의 만남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되찾는 이야기를 그린 정무문’,

영화 속 히어로처럼 자신을 구해준 아줌마 라이더덕분에 새 삶을 얻은 한 소년의 이야기와

아줌마 라이더의 비극적인 과거와 통쾌한 복수극을 그린 페일 라이더’,

그리고 홀로 남은 할머니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온 가족이 나서 세기의 명작 로마의 휴일상영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사랑의 샘

영화로 맺어진 인물들의 극적인 이야기가 담긴 다섯 편의 중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영화는 모든 수록작에 등장하는 로마의 휴일입니다.

각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마지막 수록작 사랑의 샘에서 소개되는)

구민회관에서 열리는 로마의 휴일상영회에 참석합니다.

누군가는 구원을 받기 위해, 누군가는 설레는 데이트를 위해, 누군가는 우연한 행운 덕분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명배우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의 로마의 휴일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의 따뜻한 감동과 여운은 그들의 삶에 크든 작든 좋은 에너지를 남겨놓습니다.

‘1순위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물어오면 정말 좋아하는 영화라고 이야기할 만큼 말이죠.

 

대부분 상처나 결핍 또는 간절함을 지닌 등장인물들은

인생에서 만난 몇 편의 영화 덕분에, 그리고 그 영화가 맺어준 인연 덕분에

말 그대로 영화처럼치유와 희망을 얻습니다.

현실 속에서 이런 영화 같은 기적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소설을 통해 누군가 그런 기적을 만나는 일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사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은 늘 이와 비슷한 기분 좋은 여운을 남겨주곤 했는데,

유쾌함이 좀더 강조된 매력적인 시리즈 더 좀비스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잠시 현실을 잊고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에 기대고 싶은 독자라면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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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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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는 새 이웃인 매슈 부부 집에서 펜싱 대회 트로피를 보곤 공포에 사로잡힌다.

과거 이웃이던 더스틴 밀러가 살해당한 뒤 똑같은 트로피가 사라졌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

헨은 고민 끝에 매슈를 경찰에 신고하지만 조울증을 앓았던 헨의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

헨은 학창시절 무고한 친구를 비난하다가 공격까지 한 전과(?)가 있었던 것.

하지만 헨은 자신의 판단을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실제로 매슈는 살인범이며, 그것을 헨에게만은 조금도 감추지 않는다는 점.

자신의 실체를 털어놓는 매슈, 하지만 자신을 안 믿는 경찰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없는 헨.

어느새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가 되지만, 그로 인해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하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푹 빠져 피터 스완슨의 팬이 된 후로

아낌없이 뺏는 사랑’,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까지 연이어 읽었지만,

왠지 점점 만족감보다 아쉬움이 커졌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 대한 기대감을 버릴 수는 없어서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를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중후반부까지 이야기는 무척 빠르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조울증의 여파로 뭔가에 집착하기만 하면 도무지 헤어날 줄 모르는 판화작가 헨,

새로 둥지를 튼 동네에서 헨과 함께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남편 로이드,

괴물 아버지와 그의 희생양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돼버린 매슈,

그리고 그런 매슈의 실체를 모른 채 커리어우먼으로 삶을 이어가는 아내 미라 등

이웃한 두 부부의 삶은 헨이 매슈를 고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헨이 경찰을 끌어들인 이후로, 또 헨이 매슈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후로

그들의 삶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사방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읽는 독자도 답답해질 수밖에 없는 게,

분명 이웃집 남자 매슈가 살인범 같은데 경찰은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도 않고

오히려 헨의 과거를 들먹이며 정신병자 취급을 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인 로이드 역시 조심스럽긴 해도 아내 헨의 추리에 의심스런 눈길을 보냅니다.

그런데 정작 매슈는 자신의 실체를 고백해오니 헨이나 독자나 모두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런 답답함과 긴장감은 이내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런대로 균형을 잡으며 지내온 헨과 로이드 부부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매슈의 아내 미라 역시 조금씩 불온한 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다, 가끔씩 매슈의 집에 들르곤 하는 소시오패스처럼 보이는 동생 리처드의 존재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거나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듯한 조마조마한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과연 연쇄살인범 매슈의 정체는 제대로 폭로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헨은 어떤 방식으로 매슈를 세상 사람들에게 폭로할 것인가?

헨의 남편과 매슈의 아내는 이 폭로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언제라도 사람을 죽일 듯한 매슈의 동생 리처드는 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의문들을 가득 담은 채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조금 더 크게 느껴졌는데,

피터 스완슨이라면 차라리 돌직구 같은 엔딩이 더 어울렸을 거란 아쉬움과 함께

왠지 도망치듯 서둘러, 그것도 뻔한 수법으로 막을 내린 듯한 인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도 막판에 갑자기 허물어진 듯 보였고,

사건 역시 앞에 쌓아왔던 것들에 비해 다소 싱겁게 마무리됐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와는 달리 이 결말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는 독자들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갈수록 아쉬움이 만족감보다 더 커져왔다고 언급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312호에서는~’보다는 분명히 매력적인 이야기인 게 사실입니다.

다만,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기대치에 못 미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언젠가 피터 스완슨이 자신의 장점을 확실히 담아낸 작품으로 돌아오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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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여자의 일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김도일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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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기미코와의 만남은 2011년 출간된 변호 측 증인이후 오랜만의 일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지만 당시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뒤 구매를 고려했던 걸 기억하는데

무척 흥미롭고 새로운 설정의 이야기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1934년생이며 1985년에 이미 작고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 역시 1973~1982년의 작품들을 모아 1984년에 출간됐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고전까지는 아니어도 세미 고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제작 살인은 여자의 일8편 가운데 첫 번째로 수록된 작품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목 자체가 나머지 작품들의 성향을 잘 대변하고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여자의 살의 또는 욕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죽음 또는 살인이 끼어드는데,

한두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 어둡고 무겁고 비극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서

5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호감을 느낀 남자의 천박한아내에게 강한 시기심과 살의를 느끼는 베테랑 여자 편집자,

한때 동거했던 남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낡은 아파트에 사는 50살 목전의 전직 매춘부,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남편과의 불륜을 자랑하는 유한부인에게 살의를 품는 평범한 주부 등

그야말로 부적절한 욕망으로 똘똘 뭉친 여성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지식한 남편 몰래 1년에 한두 번 하룻밤의 화려한 외도를 저지르는 여자,

딸에 이어 손녀까지 똑같은 운명에 빠지자 기가 막힐 뿐인 노파,

도둑질하던 자신을 체포한 보안요원에게 연정을 품은 끝에 새 출발을 결심하는 여자 등

이런저런 특별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집필 시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나 사건 모두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드는데

빠르고 복잡한 이야기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기교나 작위적인 설정 없이 돌직구처럼 살의와 욕망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말초적 흥미만 노리는 듯한 요즘의 일부 작품들보다 훨씬 더 품격 있어 보입니다.

 

책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다가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P.D. 제임스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번역을 고이즈미 기미코가 맡았다는 점인데,

어쩌면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인 탐정을 그린 작품을 번역하던 그녀가

역설적이게도 살인은 여자의 일이라는 제목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찾아보니 고이즈미 기미코의 작품은 모두 세 작품뿐입니다.

변호 측 증인과 이 작품 외에 여러 작가가 참여한 기묘한 신혼여행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10년도 전에 읽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새삼 고이즈미 기미코가 집필한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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