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물점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9월
평점 :
에도의 인기 있는 주머니가게 ‘미시마야’는 본업 외에 ‘괴담을 들어주는 일’로도 유명합니다.
분명 실제로 겪었지만 누구도 믿지 않을, 그래서 절대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미시마야’ 한쪽에 마련된 ‘흑백의 방’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그 이야기들을 털어놓습니다.
‘흑백의 방’의 유일한 규칙은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입니다.
즉, ‘말하는 자’는 이야기함으로써 마음속의 오랜 고뇌와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듣는 자’는 그 이야기를 절대 ‘흑백의 방’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시리즈의 전작인 ‘금빛 눈의 고양이’까지 ‘듣는 자’ 역할을 맡았던 건 소녀 오치카입니다.
고향에서 끔찍한 일을 겪은 뒤 ‘미시마야’의 주인인 숙부에게 몸을 의탁했던 오치카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괴담을 정성껏 들어준 것은 물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고향의 참극이 남긴 자신의 고통과 상처 역시 대부분 치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오치카가 결혼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면서
‘듣는 자’의 역할은 ‘미시마야’의 차남 도미지로가 이어받게 됩니다.
즉, ‘눈물점’은 도미지로의 ‘듣는 자’로서의 데뷔 무대인 셈입니다.
사실, 17살에 ‘듣는 자’ 역할을 시작한 오치카에 비해 도미지로는 다소 미덥지 못해 보입니다.
오치카보다 나이는 몇 살 더 많지만 몸도 약하고 심지도 굳건해 보이지 않습니다.
또, 주위에서 밥벌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털어놓는 괴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의구심이 드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치카가 괴담을 통해 상대와 자신을 치유하며 성장했듯
차남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형이 물려받을 ‘미시마야’를 나가야 할 도미지로 역시
앞으로 ‘흑백의 방’에서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장할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도미지로는 이 작품 속 네 편의 괴담을 듣는 동안 꽤 다채로운 경험을 겪는데,
때론 감동하기도, 때론 두려워하기도, 때론 오치카에게 도움을 청할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도미지로 스스로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기도 하고,
‘흑백의 방’의 호위 역할을 맡고 있는 하녀 오카쓰에게 충고와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듣는 자’로서의 역할에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目) 아래 들러붙은 뒤 사람을 홀리고 추악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물론
스스로 살아 움직이기도 하는 기괴하고 야릇한 점 이야기를 다룬 ‘눈물점’,
끔찍한 죽음을 거듭 초래해온 옛 조상의 원념과 저주 탓에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없게 된 가가리야 가문 여자들의 비극을 그린 ‘시어머니의 무덤’,
가족을 잃은 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오직 달리는 일에만 매진하던 한 파발꾼이
자신에게 들러붙은 요괴와 함께 보낸 슬프고 애잔한 잠깐의 시간을 그린 ‘동행이인’,
그리고 이계(異界)의 대저택에 끌려온 뒤 요괴의 저주와 마물의 위협에 빠진 여섯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린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등
모두 네 편의 중단편들이 수록돼있습니다.
미미 여사는 “듣는 사람을 교체했더니 역시 이야기도 바뀌게 되네요.”라는 말과 함께
“듣는 사람이 여성(오치카)이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이야기도 있다.”고 밝혔는데,
개인적으론 네 편 모두 오치카가 들었어도 무방했을 것 같았고,
오히려 오치카가 들었다면 이야기의 색깔이 묘하게 변주됐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미 여사가 “이 아가씨(오치카)도 이제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며
오치카에게서 ‘듣는 자’의 고단한 짐을 덜어주려 한 마음 역시 100% 이해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치카가 ‘특별출연’하는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불쑥 튀어나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이 작품까지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오고간 괴담이 모두 31개라고 합니다.
앞으로 모두 99개의 괴담을 쓰겠다는 미미 여사의 목표는 개인적으론 반가운 일이지만
그럴 경우 (물리적으로 볼 때) 다른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확 줄어들 게 될 거란 의미라서
무작정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눈물점’을 덮자마자 현재 일본에서 연재 중이라는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미야베 월드 2막’의 열혈 팬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