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미니 - 전면개정판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 햄프셔 주의 남부에 위치한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 수사반장 헬렌 그레이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살인사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범인은 연인 혹은 직장동료 등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인적 없는 곳에 감금한 뒤 총알 한 개가 든 총과 함께 한 사람을 죽여야 나머지 한 사람이 살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자신들의 배설물과 분비물에 포위당한 채 공포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들은 결국 살인이 벌어진 뒤에야 범인의 끔찍한 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자 역시 죄책감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납치범의 범행 동기는 물론 어떤 식으로 희생자를 선택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헬렌과 수사팀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영국에서 2014년에 발표된 이니 미니는 한국에 2015년에 출간됐다가 2021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의 첫 편인데, 실은 작가인 M. J. 알리지의 이름은 물론 시리즈 이름조차 생소해서 읽을까 말까 꽤 주저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렇게 흥미진진한 작품이 왜 스릴러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지 못했는지(제가 그 소문을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궁금해진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이니 미니는 미국의 동요 “eeny, meeny, miny, moe!”에서 따온 것인데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정도입니다. 두 사람을 납치한 뒤 선택을 강요하는 범인의 기괴한 행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인데, 납치된 사람들은 연인, 직장동료, 가족들이라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길게는 2주일 넘게 공포와 배고픔에 사로잡히면서 그들은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벽에 몰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발견되면서 헬렌 그레이스와 그녀의 동료들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납치, 감금, 살인 강요로 이어지는 범죄 패턴은 동일하지만 피해자들의 마지막 선택(정말 상대를 죽일까? 누가 누구를 죽일까? 어떻게 죽일까?)은 모두 제각각이라 연이어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져도 그들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또 경찰 역시 아무런 단서도 없는 가운데 다만 피해자들이 결코 무작위로 선택된 게 아니라고 여기는 헬렌의 추측 외에는 딱히 정해진 수사방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독자로선 초반 내내 헬렌과 수사팀이 느끼는 혼란과 무기력함에 고스란히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 헬렌 그레이스의 캐릭터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일 중독자에 아이 갖는 일에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발전기처럼 일했고, 거의 혼자서 부서 내의 사건 해결률을 높여놓았다.”는 표현대로 헬렌은 최연소 여성 수사반장이란 타이틀에 어울리는 최고의 형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겐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내밀한 비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악몽과 비극으로 인해 진짜 자기 모습을 꽁꽁 감춘 채 완벽한 형사라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오직 한 순간, SM클럽에서 채찍에 몸을 내맡긴 채 무자비한 상처를 낼 때뿐입니다. 변태적 성욕을 채우려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헬렌은 오직 자신을 자책하고 죄책감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더욱 거센 채찍질을 요구합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던 그녀의 오랜 악몽과 비극은 막판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소개됩니다.

 

조연들 역시 특별한 사연들을 갖고 있어서 적잖은 분량이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할애됩니다. 유능한 형사지만 이혼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마크, 헬렌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맹렬히 노력하면서도 임신을 갈망하는 찰리, 어릴 적 황산테러로 얼굴 반쪽이 망가진 타블로이드 기자 에밀리아 등이 그들입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가운데 난해한 표현 대신 쉽지만 절절한 문장들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입니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을수록 적잖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더욱 강렬하게 읽히는 건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한국에는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가 단 세 편만 소개됐지만(‘죽음을 보는 재능은 스탠드얼론입니다.), 영국에선 모두 10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이 출간됐습니다. 올해 북플라자에서 이니 미니의 개정판을 낸 걸 보면 나머지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매력 넘치는 시리즈가 빠짐없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어라, 샤일록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 중요한 초반 설정이 포함된 서평입니다. 출판사가 인터넷 서점에 이미 공개한 내용이긴 하지만, 아무 정보 없이 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이 서평은 나중에 읽으시기 바랍니다.)

 

은행 입사 후 3년간 엘리트 코스를 밟던 유키 신고는 섭외부로 발령을 받자 당황합니다. 채권 회수가 주 업무인 섭외부는 공공연히 은행 내 비주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직속상관이 된 야마가 과장은 샤일록’(‘베니스의 상인의 고리대금업자)이란 별명으로 얻을 정도로 채권 회수에 관한 한 무자비하고 냉혹하며 뛰어난 실적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유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회수 활동을 하며 유키는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진짜 샤일록같은 인물이지만 야마가에겐 돈과 은행에 대한 그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으며, 그것은 엘리트 코스만 바라보던 유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마가와의 동행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야마가가 칼에 찔려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경찰과 탐정 미스터리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하던 나카야마 시치리가 이번에는 금융이란 테마에 살인사건을 접목시킨 독특한 이야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은행원으로서 꽃길만 걷다가 채권 회수라는 비주류업무에 투입된 3년차 은행원 유키 신고와 샤일록혹은 채귀’(債鬼)로 불릴 정도로 가차 없이 채무자를 압박하여 채권을 회수하는 베테랑 은행원 야마가를 앞세워 금융계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거기에다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를 얹음으로써 매력적인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금융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진정한 은행원으로서 거듭 나는 유키의 성장 스토리입니다. 유키는 생전의 야마가로부터 그리 많은 노하우를 전수받진 못했지만 돈과 은행에 관한 그의 철학만큼은 제대로 물려받았고, 덕분에 그가 담당했던 채무자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채권 회수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그의 철학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됩니다.

, 초반에 의외의 죽음을 맞이하며 조기 퇴장하긴 하지만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거나 채귀라는 말에 화가 났나? 회수 담당자는 그런 말을 들어야 제 몫 하는 거다.”라는 명언을 남긴 야마가 역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였습니다.

 

주제와 캐릭터 모두 다소 모범적이고 묵직해 보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톤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전형적인 스타일대로 무척 경쾌하고 스피디합니다. 유키가 상대하는 악성 채무자들은 히키코모리 주식투자자, 경영 마인드가 부족한 중소기업가, 무능한 2세 경영인, 사악한 종교단체 지도자, 선거에서 참패한 전직 의원, 땅 투기에 실패한 야쿠자 등인데, 그야말로 악성 채무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온갖 부도덕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논리 가운데 무책임하게 돈을 빌려준 은행을 탓하는 대목이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유키 역시 악덕기업으로서의 은행의 실상에 여러 번 분노하곤 하는데, 부실한 심사와 부적절한 커넥션으로 불량채권을 빚어낸 당사자가 은행이지만, 필요에 따라 당장 그 불량채권들을 회수하라며 직원을 압박하는 것도 은행이고, 막상 직원이 거친 방법으로라도 채권을 회수하려 들면 회사 이미지와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주의하라며 경고를 날리는 것도 은행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는 그리 큰 비중으로 그려지진 않고, 범인 역시 초반부터 대략 두세 명 정도로 압축할 수 있어서 긴장감이 덜 하긴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는 반전의 제왕답게 막판에 살짝 한 번 꼬아주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야마가의 죽음의 진실을 최종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유키의 몫인데, 결과적으론 그 추리 역시 야마가로부터 배운 교훈에 힘입은 덕분입니다.

 

독하고 세고 반전의 힘이 강한 나카야마 시치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다소 심심하고 밋밋한 건 사실이지만, 돈과 은행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건 의외로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빚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는 악성 채무자들을 상대로 당근과 채찍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기어이 채권을 회수하고 마는 유키의 활약도 소소하긴 해도 적당한 통쾌함을 선사하는 재밋거리입니다.

 

사족으로... 나카야마 시치리는 인물 혹은 사건들을 서로 다른 작품에 교차 출연시키곤 합니다. 유키가 상대한 악성 채무자 가운데 사악한 종교단체 지도자가 있는데, 그 에피소드가 너무 낯익어서 예전에 써놓은 서평들을 뒤져보니 다시 비웃는 숙녀가운데 두 번째 챕터인 이노 덴젠과 연결된 에피소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다시 비웃는 숙녀를 읽은 독자라면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 통행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을 다룬 미야베 월드 2에는 여러 시리즈와 주인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현재진행형이며 가장 매력적인 건 주머니가게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벌어지는 괴담 들어주기를 그린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입니다. “이야기하고 버리고, 듣고 버린다.”라는 흑백의 방의 유일한 규칙 덕분에 손님인 화자(話者)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하고 믿기 힘든 괴담을 편한 마음으로 털어놓습니다. 그 괴담들은 때론 안타깝기도, 때론 감동적이기도, 또 때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털어놓음으로써 오랜 시간 가슴 한쪽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바위덩어리를 치워버리거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영혼 통행증까지 모두 일곱 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그중 앞의 네 편은 17살 소녀 오치카가 괴담을 듣는 역할을 맡았고, 5편인 금빛 눈의 고양이에서는 미시마야의 차남이자 오치카의 사촌인 도미지로가 함께 괴담을 들었으며, 오치카가 결혼한 뒤인 6눈물점부터는 도미지로가 단독으로 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눈물점서평에도 썼던 내용이지만 도미지로는 오치카보다 나이는 몇 살 더 많지만 다소 미덥지 못한 인물입니다. 몸도 약하고 심지도 굳건하지 않은데다 밥벌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것 같아 손님들이 털어놓는 괴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눈물점에서 단독 데뷔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도미지로는 아직 초보 티가 여전합니다. 괴담을 들려줄 손님이 등장하면 바짝 긴장하기도 하고, 간혹 앞질러 이야기를 예단하다가 당황하기도 하며,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하지만 약간이긴 해도 도미지로가 분명히 성장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더는 오치카의 도움이 간절할 정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든든한 두 하녀 오카쓰와 오시마에게 기대지도 않습니다. 나름 쌓은 노하우로 대화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능력도 갖추기 시작했고, 들은 괴담을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 역시 꽤 진지한 구상과 고민을 담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제법 청자(聽者)로서 틀이 잡혀 간다고 할까요?

 

모두 세 편의 괴담이 실려 있는데, 산 속 용암 연못에 기거하는 터주의 은혜 덕분에 화기(火氣)를 제압할 수 있는 신비한 큰북 님을 갖게 된 오카지 번의 이야기(‘화염 큰북’), 맛있는 꼬치경단을 파는 소녀 오미요의 안타까운 가족사(‘한결같은 마음’),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영혼의 비극적인 사연과 그 영혼을 돌보며 마지막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뱃사람의 애틋한 기행(‘영혼 통행증’) 등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이 비교적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그린 반면, ‘화염 큰북영혼 통행증은 괴담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화염 큰북의 경우 용암 속에 살던 생물이 산 속 연못에서 터주로 추앙받으며 불기운을 좌지우지한다는 설정도 매력적이고, 터주에 얽힌 놀라운 반전은 괴담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충격과 감동을 전합니다. ‘영혼 통행증은 전형적인 한 맺힌 귀신 이야기같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뱃사람과 영혼을 볼 수 있는 15살 소년이 가세하면서 색다른 귀신 이야기로 장식됩니다.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클라이맥스는 카타르시스의 힘까지 담고 있어서 통쾌함과 애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줍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작 원더풀 라이프를 떠올리게도 했는데, 이야기의 결은 전혀 다르지만 영혼을 안내하는 자의 성실함과 진정성이란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세 편밖에 수록되지 않아 기대보다 홀쭉했던 분량입니다. ‘편집자의 덧붙임을 읽어보니 애초 여섯 편이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분량이 너무 과도해지고 출간시기가 많이 늦어질 수 있어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세 편의 연재가 일본에서 마무리됐고 한국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니 저의 아쉬움은 그런대로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년 봄쯤에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 1.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의 괴담 자리가 3년 전에 시작됐다는 서문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저의 체감으로는 족히 10년은 된 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찾아보니 시리즈 첫 작품인 흑백이 한국에 소개된 게 2012년 봄, 그러니까 거의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미시마야에 또다시 3년의 시간이 흐르려면 앞으로 10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요? 부디 절반 정도로라도 줄여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족 2. 미미 여사는 이 시리즈를 통해 모두 99편의 괴담을 선보이겠다고 예고한 바 있는데, (편집자의 설명에 따르면) ‘영혼 통행증까지 34편이 완성됐습니다. 1/3 지점인데, 그저 미미 여사가 건강하고 씩씩하게 남은 65편의 괴담을 빠짐없이 들려주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요일의 아이
시게마쓰 기요시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7년 전, 한적한 뉴타운 아사히가오카의 중학교에서 30명의 학생이 사망 혹은 중태에 빠지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동급생 우에다 유타로가 급식에 독을 탔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 사건의 트라우마가 일대를 잠식하고 있는 가운데, 14살 아들 하루히코를 둔 이혼녀 가나에와 결혼한 시미즈 요시아키가 아사히가오카에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갑자기 14살 아들을 얻은 시미즈는 어떻게든 행복한 가족을 이루려 애쓰지만 학교폭력의 상처까지 지닌 하루히코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새 집 근처에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희생자들이 살았다는 점 때문에 걱정이 많던 시미즈는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하루히코가 7년 전 사건의 범인 우에다 유타로와 닮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친구가 생겼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하루히코가 잦은 밤 외출을 하자 시미즈의 불안은 점점 증폭됩니다.

 

꽤 길게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실은 초반부 소개에 불과할 정도로 목요일의 아이는 무척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지녔습니다. 학교와 가정의 폭력, 가족의 문제, 촉법소년이 저지른 과거의 끔찍한 대량살인, 그리고 한적한 뉴타운 아사히가오카를 다시금 두려움에 빠뜨리는 7년 전 사건의 공포 등 각각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만한 주제들이 한데 뒤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이야기 - 행복한 가족과 좋은 아버지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시미즈의 고민, 대량살인범 우에다 유타로의 7년 만의 출소에 때맞춰 아사히가오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의문의 사건들 - 가 메인인데, 양쪽 모두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자관계인 시미즈와 하루히코가 중심에 서있습니다. 어떻게든 하루히코와 마음을 트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던 시미즈는 하루히코가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연루되기 시작하자 초조함을 넘어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자살시도까지 했던 하루히코에게 연민과 애정을 품었던 시미즈지만 끝내 하루히코가 감춰온 본 모습을 알게 된 뒤론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던 7년 전 사건의 한복판으로 달려들기로 결심합니다.

 

사건에 연루된 아들과 그로 인해 충격에 빠지는 아버지라는 구조만 보면 우타노 쇼고의 세상의 끝, 혹은 시작’, 할런 코벤의 홀드 타이트’(구판 제목 아들의 방’)가 언뜻 떠오르지만, ‘목요일의 아이는 아버지 시미즈와 아들 하루히코 외에 제3의 주인공인 7년 전 사건의 범인(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만의 작지 않은 영역과 주제를 품고 있어서 다소 복잡하고 난해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같은 반 친구들을 몰살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해 동기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세상의 끝을 보고 싶었고, 내 손으로 세상을 끝내고 싶었다.”는 궤변에 가까운 범인의 주장이 중반부 이후 이야기를 지배했고, 범인과 그 추종자들이 쳐놓은 정교한 덫에 걸려든 시미즈가 갈피를 잃고 허우적대기 시작하면서 그 전까지의 통상적인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장르가 전개되는 탓에 솔직히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집요해 보일 정도로 자주 거론하는 세상의 끝은 이 작품의 여러 주제들 가족의 의미, 학교와 가정에서 자행되는 폭력, 대량살인범의 범행 동기 - 을 관통하고 있지만, 실은 그 개념 자체가 너무 모호하고 자의적이어서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7년 만에 세상에 나와 나름 거창한 집단살인극을 통해 세상을 끝장내버릴 것 같던 범인과 그 추종자들의 초라한 엔딩 때문에 세상의 끝에 관한 그들의 주장은 치기 어린 황당한 궤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섞이기 힘든 주제를 한줄기에 엮기 위해 동원한 세상의 끝이란 개념은 오히려 이 작품의 정체성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그 개념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큰 그림이 너무 많이 흐트러져버렸다고 할까요?

 

역자 후기에서라도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지만 스포일러 때문인지 자세한 언급이 없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그래도 이야기의 중심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의 고뇌와 싸움.”이란 설명 때문에 더 혼란만 느꼈는데, 그 설명을 받아들이자니 그럼 그토록 강조된 세상의 끝이란 건 도대체 뭐지?” 라는 의문만 더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어떤 독자가 이 작품을 사이코 서스펜스로 분류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미스터리로 시작해서 사이코 서스펜스로 절정을 달리다가 가족 드라마로 마무리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좋게 얘기하면 다양한 장르의 폭주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한 줄로 정리하기 어려운 복잡난해한 작품이란 뜻입니다.

 

사족으로... 출판사에서 올린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는 중반부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사건과 해프닝들이 꽤 많이 노출돼있습니다. 누가 죽고 누가 죽였는지, 또 어떻게 죽였는지까지 상세히 소개됐는데,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가급적 피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상한 사람들1994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입니다. 그의 작품 리스트의 기점이 1985년에 출간된 방과 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초기작이라고 보기엔 어렵지만, 본격적으로 성숙한 작품들을 내놓기 직전, 그러니까 중견으로의 진입 시점에 발표된 작품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가 형사 시리즈초기작이라든가 숙명등 매력적인 작품들을 내놓긴 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야기의 톤이나 중량감만 따지면 일상 미스터리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동원된 사건들은 살인, 강도, 절도 등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건은 지독한 악의나 소시오패스의 광기와는 거리가 먼, 다소 우발적이거나 착각 또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또 대단한 반전이나 정교한 미스터리 트릭은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내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법한 현실적인 사건들로 읽혔습니다.

 

동료들에게 돈을 받고 자신의 집을 밀회의 장소로 제공해온 남자가 어느 날 아침 낯선 여자와 마주친 뒤 겪는 미스터리(자고 있던 여자),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한 남자에 대한 오랜 원한(판정 콜을 다시 한 번!), 성실함과 근면함의 두 얼굴을 그린 직장 미스터리(죽으면 일도 못해), 신혼여행 첫날밤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복수(달콤해야 하는데), 결혼 사실을 알려온 친구의 편지에 담긴 낯선 여자의 사진의 비밀(결혼 보고) 등 수록작 모두 독특한 설정의 미스터리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소소한 악의가 예상 밖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에피소드를 그린 등대에서였습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두 주인공의 캐릭터도 흥미로웠고, 반전의 힘도 꽤 강렬했으며, 단편만이 발휘할 수 있는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중에는 좀더 사건성이 강한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이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편이지만, 일상 미스터리와 삶의 아이러니를 담담하게 그린 수상한 사람들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개성을 맛볼 수 있는 괜찮은 단편집이라는 생각입니다. 독하고 강한 양념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30년 가까이 된 다소 쉽고 가벼워 보이는 미스터리가 무덤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매력과 미덕이 있는 작품집이니 오후 한나절쯤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지고 싶다면 수상한 사람들도 좋은 선택이 돼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