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사쿠라이 미나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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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 업체 디자이너 스즈쿠라 마나는 지난 5년 동안 현실이 될까 두려워하던 악몽과 마주치고 맙니다. 마나와 결혼했던 남자, 마나를 지독하게 폭행했던 남자, 그리고 마나가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인 남자 스즈쿠라 카즈키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오랜 치료 끝에 겨우 살아났지만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고 털어놓는 카즈키는 과거 잔인하게 주먹을 휘두르던 그 카즈키가 아니었습니다. 선하고 다정한데다 과거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듣곤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결국 그날부터 마나는 카즈키와 불안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카즈키가 살아 돌아온 것 자체도 믿을 수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의 기억상실이 언제 해제될지 알 수 없어 두려웠고, 만일 다른 누군가가 죽은 카즈키 행세를 하는 거라면 그 목적은 과거 마나의 살인을 밝혀내려는 게 분명하므로 그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입니다.

 

자신이 죽인 남편 카즈키가 살아 돌아온 상황은 마나에겐 그야말로 외통수에 다름 아닙니다. 진짜 카즈키라면 언젠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 폭력 정도가 아니라 마나를 죽이려 들 게 분명했고, 누군가 카즈키 행세를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마나의 살인을 밝혀낸다면 지난 5년간 악착같이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물거품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독자 역시 마나의 혼란과 공포를 고스란히 머릿속에 새기며 과연 그녀 앞에 나타난 카즈키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카즈키의 짐을 뒤지고 몰래 미행하는 마나를 통해, 또 그녀가 목격하는 수상쩍은 카즈키의 행보를 통해, 그리고 중간중간 끼어드는 과거의 회상 장면들을 통해 작가는 애매모호한 힌트들을 주긴 하지만 독자로선 좀처럼 꼬리를 잡는 게 쉽진 않습니다. 다만, 중반도 채 되기 전에 명백하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곳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와의 흥미진진한 두뇌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막장 드라마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고, 독특한 제목 뒤에 숨겨진 미스터리가 매력적이라고 호평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두 의견의 중간쯤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3.5개라는 야박한 평가에 그친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부터 통 이해하기 힘든 전개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2/3쯤 된 지점에서 마나는 자신을 옥죄던 궁금증을 풀 확실한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사태를 바로잡겠다는 듯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던 마나는 오히려 그때부터 이해하기 힘든 수동적인 태도만 보이며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을 언급할 순 없지만, 작가는 한순간에 독자와의 게임을 불공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물어야 할 걸 묻지 않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을 제치고 갑자기 주도권을 틀어쥔 엉뚱한 인물,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혼자만 앞서 달려가는 작가. 독자로선 주인공이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이야기 따라잡기에 급급해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실이 훅 공개되면서 그제야 독자는 주인공의 입에 재갈이 물린 이유를 알게 되는데, 조금도 납득하기 힘든 전개였던 것은 물론 미스터리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무시한 불공정한 게임이 돼버렸다는 생각입니다. 클라이맥스를 위해 (진실에 근접한) 주인공의 눈과 입을 틀어막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걸까요?

 

막장극 같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나름 흥미롭게 미스터리를 전개시켰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 튀어나온 작가의 반칙 때문에 꽤 공을 들인 막판의 반전과 엔딩 모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독특한 제목 때문에 기대를 많이 했지만 그 이상의 아쉬움만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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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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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부 서식스의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빅토리아 시대 고딕소설 작가 R. M. 홀랜드의 전기를 집필 중인 40대 여성 클레어 캐시디는 어느 날 친한 동료 교사 엘라가 무참하게 살해됐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담당형사인 하빈더 카우어에게 조사를 받은 클레어는 얼마 전 교사 연수에서 엘라와 충돌했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일기장을 폈다가 깜짝 놀랍니다. 누군가 그날의 일기 밑에 소름 끼치는 메모를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메모의 필체가 살해된 엘라 곁에서 발견된 (범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포스트잇의 필체와 똑같다는 점입니다. 이후 연이어 클레어 주위의 인물들이 공격을 받자 하빈더는 안 그래도 못 마땅히 여겼던 클레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정통 영국 미스터리와 고딕 스릴러의 조합은 개인적으론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장르입니다. 제목과 표지 역시 개인적인 취향과 거리가 먼 이 작품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100페이지까지만 가보자, 라며 어렵게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젊은 시절 읽은 단편 낯선 사람에 반한 뒤 R. M. 홀랜드의 일생과 비극적인 가족사에 관심을 갖게 된 클레어는 현재 그의 전기를 집필중입니다. 마침 그녀가 근무하는 고등학교 탈가스 하이의 별관이 과거 그의 저택이었고, 그곳엔 그의 서재가 고스란히 보존돼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유령 목격담이 끊이지 않았던 그 건물은 클레어에겐 마치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그야말로 고딕의 정취가 클레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클레어 주위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은 명백히 현실의 일이지만 왠지 R. M. 홀랜드의 단편 낯선 사람을 연상시키는 괴이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살자 곁에서 발견된 포스트잇에 적힌 지옥은 비었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유명한 구절이자 동시에 R. M. 홀랜드의 단편 낯선 사람의 중요한 인용구이기도 합니다. 또 사후에 새겨진 시신의 양손바닥의 자상은 마치 성흔(聖痕)과도 같아 보여서 수사진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사건의 중심부에 놓인 클레어, 인도계 영국인인 담당형사 하빈더, 그리고 클레어의 15살 딸 조지아 등 세 여성이 한 챕터씩 번갈아 화자를 맡습니다. 피해자인 듯 가해자인 듯 애매해 보이는 클레어는 사건 정보 전달과 함께 고딕 스릴러로서의 이 작품의 정체성을 독자에게 수시로 각인시키는 인물입니다. 반면, 첫눈에 클레어가 못마땅해진 하빈더는 일련의 사건들이 클레어의 일기장과 밀접하게 연관된 게 확실해지자 다소 편견에 사로잡힌 수사를 벌이지만 끝내 미스터리의 마지막 퍼즐을 풀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습니다. 비밀리에 미스터리 작가의 꿈을 키우던 조지아는 본의 아니게 엄마 클레어가 연루된 사건에 휘말리지만 침착하게 대처하며 자신만의 성장을 이루는 인물입니다.

 

(애초 ‘100페이지 계획을 넘어선 지점이지만) 1/3쯤 됐을 때 중도포기를 진지하게 고민한 게 사실입니다. 우려했던 대로 정통 영국 미스터리와 고딕 스릴러의 조합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고, R. M. 홀랜드가 맡은 과거의 고딕과 영어교사 클레어가 맡은 현재의 고딕이라는 투 트랙 설계는 어딘가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특히 이런저런 사족들(고딕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묘사들, 군살처럼 느껴진 가족-과거-주변 인물들에 대한 부연설명들)이 차지한 과도한 분량은 지루함만 더했을 뿐 조금도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아쉬웠던 건 작가가 나름 열심히 구축한 영국 미스터리+고딕 스릴러라는 밑바탕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던 범인의 정체와 동기입니다. 따지고 보면 굳이 빅토리아 시대 고딕소설가를 소환할 이유도 없었고, 클레어로 하여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딕 분위기를 고조시킬 필요도 없어 보였습니다. 외피는 거대했지만 실상 그 안의 알맹이는 너무 빈약했다고 할까요? 다른 독자들의 서평에서도 이런 지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비혼 여성형사, 이민자, 성 소수자로 설정된 형사 하빈더 카우어를 주인공으로 한 후속작이 이미 출간됐다고 합니다. ‘하빈더 카우어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고딕 스릴러를 추구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그렇다면 독특한 매력을 지닌 형사 하빈더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한국에선 아직 낯설지만 다수의 시리즈를 출간했을 정도로 꽤 깊은 내공을 지닌 작가인 만큼 고딕이 아닌 하빈더 카우어 시리즈라면 한번쯤은 재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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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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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빛나는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육아와 주부 스트레스로 인해 과식증과 함께 해리성 이인증이라는 정신장애까지 얻은 다카무라 후미에는 몰라보게 달라진 중학교 동창 스기우라 가나코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프랑스 고급 화장품의 회원제 판매 책임자 자리를 제안 받은 후미에는 혹독한 다이어트와 필사적인 노력 끝에 고소득은 물론 자신감까지 회복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미에는 가마쿠라의 별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가나가와 현경의 하타 게이스케는 관할서 신참 여형사 나카가와 나쓰키와 팀을 이뤄 수사를 전개하는데, 후미에를 진범으로 확신하는 상부와 달리 시간이 갈수록 3의 인물에 대한 의심을 버릴 수 없게 됐고, 결국 사건 관련자들의 과거사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고독한 늑대의 피반상의 해바라기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유즈키 유코입니다. 전자에게 오랜만에 제대로 된 경찰소설을 읽은 느낌이란 호평과 함께 별 4.5개를 준 반면 후자에겐 3.5개라는 다소 인색한 평가를 한 적이 있어서 세 번째로 만나는 달콤한 숨결은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수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하타 게이스케는 남성이지만 사건의 중심에 있는 건 모두 여성들입니다. 여성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선 굵은 문장으로 거칠기 짝이 없는 남성들의 세계를 그렸던 유즈키 유코가 처음으로 여성을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시켜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하는데, 그런 만큼 이 작품 속의 여성들은 때론 멈출 수 없는 욕망의 화신으로, 때론 사회적 약자로서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는 희생자로 주인공 못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ウツボカズラの, 직역하면 벌레잡이통풀의 달콤한 숨결정도인데 벌레잡이통풀이란 네펜테스라고도 불리는 식충(食蟲)식물입니다. “가늘고 길게 뻗은 잎 끝부분에 항아리 같은 모양의 자루가 달려 있다. 달콤한 꿀로 벌레를 끌어들여 안으로 떨어진 벌레를 먹으면서 산다.”는 작품 속 묘사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끔찍한 범행을 저질러온 범인은 때론 돈과 외모라는 욕망에 사로잡힌, 때론 깊은 절망에 허우적대는 상대에게 달콤한 숨결을 불어넣어 유혹한 뒤 잔혹하게 자신의 탐욕을 채워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피해자 대부분 역시 헛된 욕망에 이끌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가 많은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전작인 반상의 해바라기와 비슷한 상황들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사족 같은 부연설명들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후미에가 체포되는 중반부까지의 이야기는 최소 절반은 사족처럼 느껴졌고, 특히 하타와 나쓰키는 지루한 탐문만 벌이거나 또는 수사과정을 설명하는 내레이터정도의 역할만 할뿐입니다.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인 하타의 아내나 일일이 소개해놓고도 정작 활동상은 보여주지 않은 하타의 부하들은 시리즈를 염두에 둔 설정 같긴 해도 역시 사족으로만 보였습니다.

여성이 중심을 차지한 이야기에서 꽤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쓰키는 수사보조원에 가까운 여형사에 그치고 말았는데, 능력보다 외모로 평가받는 부당한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비중이었습니다.

중반 이후 제대로 달리기 시작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범행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비로소 속도감과 긴장감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만, 결과에 짜맞춘 듯한 설명과 거의 기적에 가까운 단서 확보 상황은 마지막 장을 덮고도 개운치 않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아쉬움이 컸던 반상의 해바라기서평 말미에 불길한 개의 눈’(‘고독한 늑대의 피의 후속작)의 출간을 기대한다고 썼는데, 연이어 유즈키 유코에 대한 실망감이 크긴 했어도 긴장감 만점의 경찰소설 고독한 늑대의 피의 후속작이라면 무조건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 다만 그 외의 작품들은 다른 독자들의 평을 찬찬히 검토한 후에야 선택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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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에게 생긴 일
이네스 바야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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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 중심가의 은행에서 자산 관리자로 일하는 마리는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기반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런 즈음 남편 로랑과 상의하여 아기를 갖기로 한 마리는 더없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리의 꿈은 하룻밤 만에 산산조각 납니다. 직장 상사의 차안에서 끔찍한 방식으로 성폭행당한 마리는 그날 이후 바닥없는 지옥으로 추락하지만 끝내 자신이 당한 일을 은폐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겐 잃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Le Malheur du bas’입니다. 직역하면 다소 낯 뜨거운 느낌이 드는 아랫도리의 불행입니다. 이야기는 표면적으론 성폭행 피해자의 끔찍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론 그 이상의 서사, 즉 주변인들의 2차 가해, 남성 혹은 그들 중심의 사회가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보고 규정하는 방식, 또 여성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방식 등 잔혹하고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덕분에 다 읽은 후엔 낯 뜨겁게만 여겨졌던 제목이 더없이 슬프고 처연하고 분노를 자아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250여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열 배도 넘는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챕터에서 이미 마리의 마지막이 공개돼서 딱히 반전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없었고, 중반쯤엔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 읽기를 포기하고픈 생각이 여러 번 들어 서평 같은 건 절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일종의 보고서이자 경고장인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마리의 이야기를 복기하며 서평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보고서로서의 이 작품의 가치는 한 인간의 추락은 가해자의 폭행과 희생자의 죽음이라는 인과성만으로 간명하게 설명되고 요약될 수 없다. 이 작품은 그 인과 관계 사이에 감추어진 몸과 마음의 흔적을 낱낱이 파헤쳐 사실적이고 아프게 그린 불행한 상처의 보고서다.”라는 옮긴이의 말에 적확하게 함축돼있습니다.

참혹한 사건들을 상세히 다룬 뉴스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사실 관계를 서술한 몇 줄의 기사 외엔 피해자가 겪은 상처와 악몽에 대해 알 방법이 없습니다. ‘마리에게 생긴 일은 그 빈 여백, 즉 성폭행을 당한 마리가 어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는지, 또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들의 본의 아닌 2차 가해로 인해 어떤 절망감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마리를 철저히 파멸시켰는지를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성별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기를 바라는 건 어디에서도 피해자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이런 보고서를 만나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강간당한 것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날, 마리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침묵에 대해 심판과 비난을 받고, 수모를 겪을 것이다. (중략) 빌어먹을 진실로 인해 그 모든 기억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고 더러워지고 찢기는 것을 마리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죽음이 더 아름답다고 마리는 생각한다.” (p238, 247)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며 (누구나) 거기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옮긴이의 말)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경고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폭행 이후 마리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지고 몸과 마음 모두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립니다. 문제는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 그 누구도 마리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마리의 딜레마는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로 인해 밤마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남편의 욕망이나 자신에게 웃음과 환호만 보내는 가족들의 밝은 표정은 마리에겐 잔혹한 2차 가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대목은 피해 사실을 은폐해놓고 어떻게 그들이 먼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성폭행 자체가 피해자 입장에서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범죄임을 감안하면, “추락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다.”는 메시지는 누구라도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합당한 경고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여자는 구멍일 뿐이다. 물렁물렁한 살갗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멍. 죄 많고 축축한 그 사막 한복판으로 남자가, 마치 신이 그렇게 하듯, 자기 길을 뚫고 지나간다.” (p167)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큰 충격을 준 문장인데, 어쩌면 이 두 줄의 문장이야말로 진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폭행은 더러운 욕망을 품은 개인의 범죄지만, 동시에 여성을 성적 도구로만 바라볼 뿐인 남성 중심 사회가 낳은 구조적 폐단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몸을 탐하는 데 급급한 남편을 통해 세상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관계를 거부당한 뒤 변태적인 포르노로 욕망을 채우는 남편을 지켜보며 사실 그가 원했던 건 마리가 아니라 구멍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직장 상사와 남편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이 사회가 멸시하는 모든 것의 표본처럼 느껴진다. 나약하고 비겁하고 뚱뚱하며, 제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든 가족을 내동댕이치기만을 꿈꾸며 성 생활에 소극적이고, 동적이지 않고, 업무에서도 뒤처질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은, 이미 늙어 버린 여자.” (p129)

 

이렇게 서평이 길어진 것은 그만큼 마리의 이야기가 저를 화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역설적이게도 제가 남자라서 마리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증오하고 혐오한 나머지 멸시의 표본으로까지 여기게 된 마리를 지켜보며 분노와 자괴감과 안타까움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감정을 공유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되겠지만 가슴 아픈 보고서이자 누구나 귀 기울여야 할 경고장인 마리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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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집 안전가옥 오리지널 11
전건우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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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잘 나가는 그림동화 작가였던 유현민은 1년 전 불의의 사태로 인해 추락을 거듭하다가 결국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의 외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아내 명혜는 이사 첫날부터 느껴진 집의 한기가 심상치 않았고, 전에 살던 가족이 2년 전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신경에 거슬립니다. 그러던 중 집안 곳곳에서 이상한 현상들까지 목격한 명혜는 악몽까지 꾸게 됐고, 끝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홀로 내던져지고 맙니다. 한편 현민은 어딘가 이상해진 아내 명혜와 3남매 때문에 걱정이 되는데, 어느 날 도저히 믿기 힘든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곤 과거 이 집에 살다가 사라졌다는 가족의 사연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작품의 모티브는 귀신 들린 집에 사연 많은 가족이 이사를 왔다.”입니다. 사실 이 모티브 자체는 너무 많이 활용돼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작가는 흥미로운 컨셉으로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뒤틀린 집은 소위 전문가(?) 용어로는 오귀택(五鬼宅)이라고 하는데, “대문과 안방 등의 방향 배치가 뒤틀려 있어 그로 인해 생긴 틈 사이로 나쁜 기운이 흘러나와 온갖 귀신을 불러 모으고 산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집이란 뜻입니다. 애초 집 자체가 잘못 지어졌거나 방위(方位)의 문제일 수 있다는 뜻인데, 중요한 건 유현민의 가족이 이사 오기 전 이미 이 집은 귀신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고, 그들의 이사는 억눌려있던 귀신을 해방시킨 것은 물론 가공할 힘까지 부여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익숙한 공식대로 흘러갑니다. 부부와 3남매는 제각각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거나 악몽을 꾸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귀신의 힘에 지배되기도 합니다. 집의 과거를 조사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2년 전 갑자기 사라진 일가족의 수상쩍은 사연이 공개됩니다. 하지만 좀더 상세한 정보를 얻으려고 할 때마다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마침내 드러난 진실은 너무나 잔혹했고,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한 가족들의 최후의 노력은 위험천만할 뿐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다 보니 뒤틀린 집역시 그런 스타일이 아닐까 무척 기대했습니다. 실제로 유현민의 가족이 정착한 집은 안팎으로 호러의 기운을 무지막지하게 내뿜는 공간으로 설정됐고, 가족들이 제각각 마주하는 초자연적 상황들은 오귀택, 귀신, 빙의, 악령, 학대와 폭력 등 웬만한 종류의 공포 코드를 모두 맛볼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거기에다 사라진 일가족의 미스터리까지 더해져 이야기는 분량에 비해 볼륨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좀 더 많았던 게 사실인데, 가장 두드러진 건 가족이 가족답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삿날의 흥분, 이른 아침의 술래잡기 등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이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의 가족다운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겪은 공포를 공유하지도 않고 서로를 지키겠다는 특별한 각오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작가가 가리키는대로 자신의 임무 - 연이어 기이한 현상을 겪는 일 - 만 열심히 수행할 뿐입니다.

집과 가족이 얽힌 호러라면 당연히 이 가족이 부디 살아남기를!”이란 바람을 독자에게 확실하게 심어놓아야 하는데, 가족이라기엔 애정도, 관심도, 연대도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귀신이 저지른 게 분명해 보이는) 초자연적 현상들과 피가 난무하는 사건들만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보니 오히려 공포의 맛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좀 심하게 말하면 이런 가족이라면 귀신에게 다 잡아먹혀도 별로 안타까울 것 같지는 않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호러 자체는 풍성했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인 가족에게 걱정과 응원을 보내게 만드는 감정적 호소는 절대적으로 부족해보였습니다. 초자연적 현상 몇 가지를 줄여서라도 가족을 위해 약간의 분량을 할애했더라면 공포는 훨씬 더 고조되고 이야기 자체도 매력적으로 읽혔을 거란 아쉬움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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