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바람둥이, 건달, 사기꾼, 칼잡이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닌데다 남미의 꽃을 단춧구멍에 꼽고 다녀 흑란이라는 별명을 지닌 피에트로는 베네치아를 강타한 잔혹한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특별사면을 받고 감옥을 나옵니다. 그리고 수사 시작 직후 그동안 벌어진 연쇄살인이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을 본떠 자행됐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배교, 육욕, 식탐, 낭비, 분노, 이단, 폭력, 분열, 배반 등 9()의 테마에 따라 희생자들이 속출하는데, 고급 창녀에서부터 베네치아의 핵심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 걸쳐있습니다.

자신을 감옥에서 꺼내준 유력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벌이던 피에트로는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한 형사 사건도, 신의 계시를 받은 광신도 집단의 소행도 아닌 베네치아를 혼란에 빠뜨리고 궁극적으로는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역의 일환임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로 지칭되는 적의 수장을 쫓던 중 피에트로는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리기도 하고, 심지어 연쇄살인범으로 오인받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거나 단테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은근히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단테 혹은 단테의 신곡이 가진 힘일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나 유산을 픽션으로 풀어내는 기법 자체의 힘일 수도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살인은 분량 자체가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데다 일단 손에 쥐자마자 적잖은 부담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하드커버 제본이고, (1756년 베네치아를 무대로 설정했고,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삼은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어휘나 문장이 무척 예스럽고 고전적이어서 완독하는데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의외로 심플한데, 한 줄로 요약하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세력들과 그에 맞선 주인공 피에트로의 대결입니다.

 

쉽고 가벼운 현대의 문장들에 익숙해진 탓인지 고전적인 문장이 주는 생경함이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다 보니 어느 새 그 나름의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녀는 쾌락의 수식을 빌려 희극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번민을 안전한 곳으로 감춘 뒤, 그 번민에 권태와 도피의 옷을 입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두 세 번은 되읽어야 대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은데, 가끔은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고전의 맛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다 보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여 벌어진 끔찍한 사건 현장의 묘사, 1756년 베네치아의 화려한 풍광과 곤돌라를 비롯한 수로와 뒷골목의 풍경 묘사, 그리고 자유분방하고 외설스럽기까지 한 당시의 풍습이나 주인공 피에트로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남녀 캐릭터들의 묘사는 현대물에서는 보기 힘든 현란한 어휘들과 리듬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야기 전개와 관계없이 흥미로운 책읽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 살인은 방대한 서사와 분량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우선은 나무는 많은데, 정작 숲이 허술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 연쇄살인, 애절한 멜로, 비밀과 거짓말, 피아가 구분 안 되는 은밀한 캐릭터 등 개별적인 요소들은 매력적으로 포진되어 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뼈대 악당들의 목표, 주인공과의 대결 과정 등은 읽는 도중 몇 번씩 맥을 빠지게 할 만큼 허술하게 진행됩니다.

이 부분을 상세하게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단테의 신곡으로 시작해서 헐리우드 액션영화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결국 선과 악의 대결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거라면 단테의 신곡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반부에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 연쇄살인은 존재감을 잃었습니다.

 

더불어, 피에트로의 수사는 몇 번의 결정적 계기를 통해 악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는데, 그 과정이 안이하고 쉽게 처리된 점도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목격자와 증인은 필요에 따라 적재적시에 나타나주고, 악당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상세한 정보 역시 친절하게피에트로의 손에 전달됩니다. 고전의 맛을 느끼게 해준 훌륭한 번역 덕분에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책읽기를 경험했지만, 미스터리의 완성도 면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필력을 지닌 작가가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공식이나 스케일 대신 차라리 18세기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다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얼음장 같은 연쇄살인범이 등장한 영화 세븐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그 작품에도 단테의 신곡과 쵸서의 캔터베리 서사시가 연쇄살인의 모티브로 등장했습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피에트로가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며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베네치아의 소시오패스 일 디아볼로 또는 키마이라를 쫓는 이야기였다면 좀더 흥미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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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10대 소녀 아오이의 유일한 불행은 과거에 얽매여 사는 엄마와 주정뱅이 폭력꾼 새아빠입니다. 부딪히고 저항하기 보다는 눈치껏 피해가며 살아가는 법을 택했던 아오이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끼어든 시즈카 덕분에 그녀의 삶은 파란 속으로 휩쓸립니다. 투명인간처럼 지내던 학기 중과는 정반대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검은 드레스와 특이한 목걸이 등 고딕 롤리타풍으로 치장한 시즈카는 의식적으로 아오이의 곁을 맴돌며 그녀 마음속에 농축되어 있던 분노를 이끌어냅니다. “절대로 안 들키는 살인 방법, 가르쳐줄까?”

 

3년 전쯤 읽은 내 남자의 독특하고 묘한 분위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쿠라바 가즈키의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제목과 표지가 눈길을 끌었는데, 내용과 잘 매치됐을 뿐 아니라 제가 나름 명명해본 서정적인 잔혹동화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캐릭터와 설정 등에서 오츠이치의 몇몇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오츠이치의 작품들이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사쿠라바 가즈키는 가볍고 간결한 문장들을 통해 가공되지 않은 10대의 정서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주인공 오니시 아오이는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10대 소녀이고, 그녀의 친구들 역시 수다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시모노세키 인근의 섬은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고, 게임센터와 맥도널드를 즐겨 찾기도 하지만 동시에 버려진 구 일본군 요새와 등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하는 10대 소녀의 삶은 오히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오이의 평범했던 삶은 여름방학의 시작과 함께 시즈카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통제 불능에 빠진 10대들의 살인극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현실 반영물 또는 사회물로 여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만약 사쿠라바 가즈키가 어떤 주장을 강요했다면, 10대들의 삶을 망쳐놓은 기성세대를 비판하거나 반대로 철없고 과격한 10대들의 범법 행위를 비판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평범하고 상투적인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물론 딱 그런 이야기 아닌가?”라고 평가할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등 떠밀리듯 불행한 삶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두 소녀를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공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좀 비약일 수도 있지만, 영화 델마와 루이스소녀 버전이랄까요?

아오이와 시즈카의 관계는 거래라고도 할 수 있고 연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미묘한 차이가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표면상으로는 교차살인 내지는 알리바이 조작 등의 거래적 요소가 강하지만 두 소녀의 보이지 않는 감정적 교류에 주목하면 연대의 의미가 더 크게 보입니다.

 

한편, 물과 기름 같은 두 소녀의 연대를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원시인의 슬픔이라는 옛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원시인은 슬플 때는 가만히 있는대. 동굴 밖은 소중한 사람을 죽여 버린 커다란 곰이 있으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 숨죽인 채, 모든 욕구를 억누르며 그저 눈에 띄지 않도록 사는 거야.”

아오이에게는 철없는 엄마와 주정뱅이 새아빠가 동굴 밖의 곰이었고, 시즈카에게는 괴팍한 할아버지와 사촌오빠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어른들에게 속박당해야 하는 10대라는 생물학적 나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두 소녀가 숨어 사는 소극적인 삶 대신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아오이는 살인 이후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진 그날부터 (중략) 나는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둘이 있으면 위험한 놀이를 하는 기분... 그러면서도 맛들이면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은..”

딱히 어렵거나 현학적인 표현 없이도 아오이의 현실이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집니다. 맥락 없이 뚝 떼어놓은 문장들이라 잘 이해 안 될 수도 있지만,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에서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본인은 조금도 웃지 않으면서 남을 웃기는 개그맨의 연기가 최고의 웃음을 유발하듯, 간결하고 맑아 보이는 문장들로 표현된 깊이를 알 수 없는 살의와 그것의 실천은 작심하고 동원한 잔혹한 단어와 문장들보다 훨씬 더 깊게 각인됩니다.

 

급작스런 (그리고 조금은 안이해보였던) 엔딩이 무척 아쉬웠는데, 살아남은 자들의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런 내상과 트라우마를 지닌 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사족으로, 짧고 읽기 쉬운 문장들이라 성급하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인데, 혹시 이 작품을 읽을 독자라면 꼭꼭 씹어가며 찬찬히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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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고백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복창교 옮김 / 오후세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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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기가 사라진 채 참혹하게 훼손된 시체들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신장 이식이 필요한 어린 딸을 둔 경시청 수사1과의 이누카이 하야토는 관할서 파트너 고테가와와 함께 범행 동기조차 파악하기 힘든 이 연쇄살인 수사에 뛰어듭니다. 끈질긴 탐문으로 두 희생자의 공통점을 알아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이누카이의 수사가 장벽에 막혀있는 사이 결국 세 번째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얼마 후 다음 희생자로 예상된 자에게 진범의 전화가 걸려오자 이누카이와 담당 형사들이 총출동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충격적인 엔딩이었습니다.

 

“‘반전의 제왕이라 불릴 정도로 매 작품마다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아직은 낯선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출판사의 격찬, 아직 못 읽었지만 그의 한국 첫 출간작 안녕, 드뷔시가 제8'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수상작이란 점, 또 이 작품이 전설의 살인마 잭을 제목으로 차용할 만큼 잔혹한 연쇄살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늘 관심을 갖고 있는 메디컬 미스터리라는 점 등 작가의 이력과 장르의 성격 모두 개인적인 취향에 비춰볼 때 안 읽고는 못 넘어갈 정도의 화려한 유혹이 난무했던 작품입니다.

 

참혹한 연쇄살인과 그 진범 찾기가 주된 내용인 군더더기 없는 정통 미스터리지만 이 작품이 사회파+메디컬 미스터리로 정의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참혹한 연쇄살인이 쾌락을 즐기는 소시오패스의 만행이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개인의 무자비한 살인극이 아니라 뇌사자의 장기 기증이라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사회적 이슈와 밀접하게 연관돼있기 때문입니다.

장기 이식에 관련된 여러 주체들(기증자, 수혜자, 의료관계자 등)의 딜레마 혹은 탐욕과 함께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경직된 경찰의 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가미된 덕분에 장기 적출 연쇄살인이라는 다분히 자극적인 사건은 기대 이상의 볼륨감을 갖추게 됩니다. 거기에다 주인공인 이누카이 하야토에게 신장 이식이 필요한 딸이 있다는 설정까지 곁들여지면서 독자는 장기 이식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좀더 깊은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됩니다.

 

뇌사자는 뇌는 죽어 있지만 피가 흐르고 살도 따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며 살아남을 자격은 누구한테 있는 거야?” 등 본문 곳곳에서 뇌사와 장기 이식에 관한 무거운 논쟁이 벌어집니다. 또 일반인이 뉴스를 통해 접하는 장기 이식의 전후 사정은 대부분 미담으로 포장돼있지만 실상 기증자 가족에게 장기 적출이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과 다름 아닌 일이란 점도 여러 차례 강조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장기가 뿔뿔이 흩어진 채 누군가의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잊을 수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흔히 미화되듯 기증자의 가족은 자신의 혈육이 누군가를 살리고 떠났다는 보람과 행복감만으로 남은 삶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런 극렬한 갈등과 고통을 디테일하게 그리면서 그것들이 끔찍한 연쇄살인의 기폭제로 작동하게 된 과정을 생생한 리얼리티와 함께 묘사합니다.

 

반전을 위해 다소 뜬금없이 급선회한 엔딩의 위화감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그저 훈훈한 미담으로만 여겨졌던 장기 이식의 이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점이나 그 이면의 문제들을 연쇄살인 미스터리와 엮어낸 작가의 필력은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더불어,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누카이와 (관할서 형사) 고테가와 콤비가 눈길을 끌었는데, 전혀 극단적이지도, 억지스럽게 포장되지도 않은 캐릭터들이지만 두 사람의 조합은 적절한 긴장과 휴식을 제공하며 묘한 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선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기대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직 한국에는 두 편밖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왠지 앞으로 꽤 주목하게 될 것 같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후속작이 이누카이&고테가와 시리즈라면 더욱 반가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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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라지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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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작품들(‘용서할 수 없는’, ‘아들의 방’, ‘’)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출발합니다. 11년 전, 형 켄 클라인이 이웃의 줄리 밀러를 살해하고 종적을 감춘 뒤로 줄리의 가족은 물론 용의자 켄의 가족 역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특히 동생인 윌 클라인은 피살된 줄리와 연인이었던 탓에, 또 존경하며 따랐던 형 켄이 용의자였던 탓에 황폐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줄리 이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실러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윌의 삶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더구나 죽은 것으로 여겼던 형 켄이 살아있으며 진심으로 사랑했던 실러에게 추악한 과거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윌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절친인 스퀘어즈의 도움을 받아 켄과 실러에 관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숱한 난관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데, FBI는 물론 정체불명의 괴한들까지 가세하여 곳곳에서 윌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동감하지 못할 독자들이 많겠지만, ‘영원히 사라지다는 지금껏 읽은 할런 코벤의 작품 중 가장 몰입하기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호의적이거나 극찬을 남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어보면 충분히 공감되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모든 작품에서 그랬듯이 코벤의 설정은 정교하고 극적입니다. 마치 볼트 하나, 나사 하나까지 상세히 그려진 초고층 건물의 설계도처럼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한 줄까지 모조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집필을 한 느낌을 줍니다. 많은 독자들이 극찬하는 반전의 힘은 아마 이런 정교한 설계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번 코벤의 작품에서 아쉽게 느껴진 부분은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다가 이야기의 맥이 산만하게 흩어진다는 점입니다. 인물도, 사건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조연들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동료 스퀘어즈와 줄리의 여동생 케이티를 제외하곤 존재의 이유가 명확한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나마 FBI 멤버들이 돋보이긴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필요할 때만 등장하는 구원투수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윌과 스퀘어즈를 위협하는 인물들은 너무 멀리서 아스라한 모습으로만, 그것도 느닷없이 툭툭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지 못합니다. 또한 윌과 스퀘어즈에게 적절한 맞춤형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캐릭터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비교적 존재감이 명확한 스퀘어즈마저도 리얼리티라는 면에서 보면 공감력이 떨어지는 캐릭터입니다. 평범한 시민 윌이 FBI에 맞서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스퀘어즈는 상식의 선을 넘어선 슈퍼맨이자 만병통치약입니다. 수사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적시에 물어오는 것은 물론 어떤 상황에서든 윌에게 필요한 인물들까지 찾아내는 인맥의 제왕입니다.

 

예전에 코벤의 작품을 읽고 작성한 서평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뜯어도 뜯어도 포장지만 계속 나오고 정작 선물은 보이지 않는..”(아들의 방), “이렇게까지 책이 두꺼울 필요는 없었다. (중략) ‘-----로 펼쳐진 느낌. 사족 또는 과다 설명된 부연 이야기가 좀 많았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아쉬움들은 영원히 사라지다에서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여기저기서 인물과 사건은 쏟아지는데 중심 내용과의 연관성은 너무 부족하고, 쌓여가던 포장지에 지칠 때쯤이면 이미 책은 3/4 정도의 분량이 지나간 상태이고, 그러다가 전광석화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엔딩부가 시작되는 듯 하더니 이야기는 곧 끝이 나고 맙니다.

 

말하자면, 코벤의 뛰어난 필력이 엉뚱한 곳에서 에너지를 소진하느라 정작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 느낌입니다. 또한, 급격한 반전을 염두에 둔 나머지 (독자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초중반에 불필요한 포석들을 지나치게 많이 깔아놓았는데, 문제는 깔아놓기만 하고 금세 다른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다른 이야기를 전개시키다 보니 그 포석들의 의미가 제대로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고 휘발될 수밖에 없었고, 몇 챕터가 지나 그 포석이 다시 등장했을 때는 , 그게 복선이었군~”이라는 쾌감 대신 앞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야만 하는 피곤한 독서의 반복을 야기했습니다. 결국, 반전을 위한 애매한 포석들이 책읽기를 지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됐던 것입니다.

 

엔딩부에 가면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포석들이 한자리로 모이고, 그를 바탕으로 몇 차례에 걸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몰아치지만, 이미 포석들에 지친 나머지 연이은 반전은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보이기만 했습니다. 캐릭터를 만드는 힘도, 상황을 묘사하는 힘도 여느 작품에 뒤지지 않지만 반전만을 위한 지루하고 피곤한 구성 덕분에 할런 코벤의 전작들에서 느낀 아쉬움을 이번에도 지워내지 못한, 그런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닮고 싶지 않은 굴곡진 삶을 살아온 인물들, 참혹하거나 안타깝게 벌어지는 사건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극적인 반전 등 재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코벤의 설계도 위에 잘 정렬돼있었지만, 그것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전개시켰어야 할 구성이 산만하고 일관되지 못했던 탓에 결국 불편하고 몰입하기 힘든 책읽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호감을 갖고 있던 할런 코벤의 작품에 대해 대다수 독자들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기가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대다수 독자들이 적잖은 서평을 통해 호평을 남긴 것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며 내가 잘못 읽었나? 짬날 때마다 띄엄띄엄 읽다보니 맥락을 잘못 파악한 것인가?”라고 자문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끄적거려놓은 몇 장의 메모에 꽤 많은 ‘?’표시가 남겨져 있는 걸 보면 호의적이지 못한 장문의 독후감이 그저 오독의 결과만은 아닌 것 같아 더욱 더 아쉽게 느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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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계량스푼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줄거리와 캐릭터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계량스푼은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독특한 작품입니다. 동시에 죄와 벌, 복수와 악의 등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츠나구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특별한 능력을 소재로 삼았다면, ‘나의 계량스푼에는 말을 통해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즉 내 뜻대로 상대의 행동을 좌우할 수 있는 판타지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주인공 2년 전 우연히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나를 사랑해줘. 그렇지 않으면 넌 내일 죽게 돼.” 식입니다. 물론 그 주문은 상대방을 속박하여 조건을 따르든(나를 사랑하든), 그러지 않을 경우 반드시 벌을 받게 되는(내일 죽게 되는) 상황을 야기합니다. ‘의 특별한 능력은 가문의 내력이기도 한데, 현존하는 유일한 능력자는 외숙부 아키야마 교수입니다.

 

의 특별한 능력은 절친인 후미와 관련이 깊습니다. 2년 전, 후미로 인해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고, 지금은 후미를 돕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꺼운 안경, 입 안의 교정기, 평범함에 조금 못 미치는 미모를 가진 후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과 친화력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이면 모두로부터 따돌려지는 캐릭터입니다.

그런 후미를 늘 곁에서 지켜주던 는 어느 날 찾아온 비극 - 후미가 아끼던 토끼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사건 - 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자폐적으로 살아가게 된 후미를 정상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토끼살해범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학생들을 대표하여 토끼살해범에게 사과를 받기로 한 는 어떤 조건과 벌, ‘~하지 않으면, ~하게 될 것이다를 부과함으로써 토끼살해범에게 응징 또는 복수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능력이 무섭고 저주받은 것이라 믿는 엄마는 에게 같은 능력을 가진 외숙부 아키야마 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엄마의 목적은 아키야마를 통해 의 능력발휘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끼살해범과의 만남을 앞두고 와 아키야마 교수가 만나서 나누는 7일 간의 대화록이 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고, 그들의 대화는 앞서 언급한대로 죄와 벌, 복수와 악의 등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그에 합당하는 벌은 무엇인가? 복수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인간의 악의는 벌과 복수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인가? ‘와 아키야마의 논쟁은 한없이 깊고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독자들은 의 마지막 선택 토끼살해범에게 어떤 조건과 벌을 부과할 것인가? - 에 관심을 집중한 채 이들의 논쟁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진범 찾기라는 일반적인 미스터리와 달리 독자로 하여금 죄와 벌, 복수와 악의에 관한 여러 인물의 가치관적 판단 가운데 자신이 공감하는 부분을 찾게 만드는 구조를 띄게 됩니다.

 

- 남의 불행을 우스갯소리로 조롱하고 희롱하는 인간의 악의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 토끼살해범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상처받은 후미가 예전의 후미로 돌아올 수 있을까?

-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는 것은 그를 애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잃은 자기 자신이 불쌍해서 우는 것 아닌가?

- 그런 맥락에서, 실은 후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후미가 마음을 닫은 것이 때문이기에 그것을 견딜 수 없어서 토끼살해범에게 능력을 발휘하려는 것 아닌가?

 

다소 어렵고 골치 아픈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이런 주제를 다룬 철학서나 인문학 저서가 현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반면 나의 계량스푼은 픽션을 통해 좀더 피부에 와 닿는 주제의식을 던져줍니다. 내가 라면 토끼살해범에게 어떤 조건과 벌을 내걸 것인가? 평생 자신이 토막 낸 토끼들의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만들까? 후회와 반성을 이끌어냄으로써 그에게 제2의 삶을 살 기회를 줘볼까?

이런 복잡한 고민 끝에 도착한 엔딩에는 대단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의 선택은 50세의 교수 아키야마조차 전혀 예상 못한 것이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다시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키야마로 하여금 또다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일대 사건을 불러일으킵니다.

 

무겁고 칙칙한 고전적 소재를 픽션 속에서 딱딱하지 않게 풀어낸 필력, 흥미와 재미를 외면한 채 작정하고 써내려간 듯한 비상업적 구성,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에피소드 등 나의 계량스푼은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대중적인 독자 입장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을 몇 가지 들자면, 우선 초등학교 4학년으로 설정된 의 캐릭터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이 중학생들의 모의재판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비현실적이라는 서평을 적잖이 들었던 것처럼, ‘나의 계량스푼역시 10살이라는 나이가 자꾸만 책읽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아키야마 교수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라고 했을 때, 독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두세 번은 되읽어야 하는 상황을 10살의 는 이해는 물론 응용까지 해내고 있습니다. 딱히 문제 삼을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 이건 소설이지라는 생각이 끼어들어 몰입도를 무너뜨렸습니다.

 

또 한 가지, ‘비상업적 구성이라고 언급한 부분인데, 이 점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 ‘와 아키야마 교수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부분이 작품의 중심 내용이다 보니, 그것도 동어반복의 느낌이 들거나 지나치게 설명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보니 지루함과 동시에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을 읽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와 아키야마 교수의 3일 째 만남을 읽던 즈음에는 다 건너뛰고 엔딩만 읽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이 작품의 소중한 부분을 놓쳤겠지만 말입니다.

 

생각보다 긴 서평이 됐는데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그저 평탄한 진범 찾기가 아닌 탓에 이런저런 사감을 많이 적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은 아직 많이 만나보진 못 했지만, 독특하면서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그녀의 대표작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가 출간됐는데, 과연 어떤 모양의 책읽기가 될지 기대반 우려반으로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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