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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라지다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1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월
평점 :
앞서 읽은 작품들(‘용서할 수 없는’, ‘아들의 방’, ‘숲’)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출발합니다. 11년 전, 형 켄 클라인이 이웃의 줄리 밀러를 살해하고 종적을 감춘 뒤로 줄리의 가족은 물론 용의자 켄의 가족 역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특히 동생인 ‘나’ 윌 클라인은 피살된 줄리와 연인이었던 탓에, 또 존경하며 따랐던 형 켄이 용의자였던 탓에 황폐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줄리 이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실러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윌의 삶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더구나 죽은 것으로 여겼던 형 켄이 살아있으며 진심으로 사랑했던 실러에게 추악한 과거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윌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절친인 스퀘어즈의 도움을 받아 켄과 실러에 관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숱한 난관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데, FBI는 물론 정체불명의 괴한들까지 가세하여 곳곳에서 윌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동감하지 못할 독자들이 많겠지만, ‘영원히 사라지다’는 지금껏 읽은 할런 코벤의 작품 중 가장 몰입하기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호의적이거나 극찬을 남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어보면 충분히 공감되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모든 작품에서 그랬듯이 코벤의 ‘설정’은 정교하고 극적입니다. 마치 볼트 하나, 나사 하나까지 상세히 그려진 초고층 건물의 설계도처럼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한 줄까지 모조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집필을 한 느낌을 줍니다. 많은 독자들이 극찬하는 반전의 힘은 아마 이런 정교한 설계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번 코벤의 작품에서 아쉽게 느껴진 부분은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다가 이야기의 맥이 산만하게 흩어진다는 점입니다. 인물도, 사건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조연들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동료 스퀘어즈와 줄리의 여동생 케이티를 제외하곤 존재의 이유가 명확한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나마 FBI 멤버들이 돋보이긴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필요할 때만 등장하는 구원투수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윌과 스퀘어즈를 위협하는 인물들은 너무 멀리서 아스라한 모습으로만, 그것도 느닷없이 툭툭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지 못합니다. 또한 윌과 스퀘어즈에게 적절한 ‘맞춤형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캐릭터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비교적 존재감이 명확한 스퀘어즈마저도 리얼리티라는 면에서 보면 공감력이 떨어지는 캐릭터입니다. 평범한 시민 윌이 FBI에 맞서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스퀘어즈는 상식의 선을 넘어선 슈퍼맨이자 만병통치약입니다. 수사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적시에 물어오는 것은 물론 어떤 상황에서든 윌에게 필요한 인물들까지 찾아내는 ‘인맥의 제왕’입니다.
예전에 코벤의 작품을 읽고 작성한 서평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뜯어도 뜯어도 포장지만 계속 나오고 정작 선물은 보이지 않는..”(아들의 방), “이렇게까지 책이 두꺼울 필요는 없었다. (중략) ‘기-승-승-승-전-결’로 펼쳐진 느낌. 사족 또는 과다 설명된 부연 이야기가 좀 많았다는 느낌이랄까?”(숲)
이런 아쉬움들은 ‘영원히 사라지다’에서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여기저기서 인물과 사건은 쏟아지는데 중심 내용과의 연관성은 너무 부족하고, 쌓여가던 ‘포장지’에 지칠 때쯤이면 이미 책은 3/4 정도의 분량이 지나간 상태이고, 그러다가 전광석화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엔딩부가 시작되는 듯 하더니 이야기는 곧 끝이 나고 맙니다.
말하자면, 코벤의 뛰어난 필력이 엉뚱한 곳에서 에너지를 소진하느라 정작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 느낌입니다. 또한, 급격한 반전을 염두에 둔 나머지 (독자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초중반에 불필요한 포석들을 지나치게 많이 깔아놓았는데, 문제는 깔아놓기만 하고 금세 다른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다른 이야기를 전개시키다 보니 그 포석들의 의미가 제대로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고 휘발될 수밖에 없었고, 몇 챕터가 지나 그 포석이 다시 등장했을 때는 “아, 그게 복선이었군~”이라는 쾌감 대신 앞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야만 하는 피곤한 독서의 반복을 야기했습니다. 결국, 반전을 위한 애매한 포석들이 책읽기를 지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됐던 것입니다.
엔딩부에 가면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포석들이 한자리로 모이고, 그를 바탕으로 몇 차례에 걸쳐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몰아치지만, 이미 포석들에 지친 나머지 연이은 반전은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보이기만 했습니다. 캐릭터를 만드는 힘도, 상황을 묘사하는 힘도 여느 작품에 뒤지지 않지만 반전만을 위한 지루하고 피곤한 구성 덕분에 할런 코벤의 전작들에서 느낀 아쉬움을 이번에도 지워내지 못한, 그런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닮고 싶지 않은 굴곡진 삶을 살아온 인물들, 참혹하거나 안타깝게 벌어지는 사건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극적인 반전 등 재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코벤의 설계도 위에 잘 정렬돼있었지만, 그것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전개시켰어야 할 ‘구성’이 산만하고 일관되지 못했던 탓에 결국 불편하고 몰입하기 힘든 책읽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호감을 갖고 있던 할런 코벤의 작품에 대해 대다수 독자들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기가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대다수 독자들이 적잖은 서평을 통해 호평을 남긴 것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며 “내가 잘못 읽었나? 짬날 때마다 띄엄띄엄 읽다보니 맥락을 잘못 파악한 것인가?”라고 자문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끄적거려놓은 몇 장의 메모에 꽤 많은 ‘?’표시가 남겨져 있는 걸 보면 호의적이지 못한 장문의 독후감이 그저 오독의 결과만은 아닌 것 같아 더욱 더 아쉽게 느껴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