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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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여름, 대규모 천연두 감염 사태로 곳곳에 격리병동이 설치된 상황에서 변질자 혹은 죽지 않는 시체라 불리는 괴물이 출현하자 폴란드 서부 대도시 브로츠와프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무차별로 산 사람을 잡아먹는 그 괴물은 곧 좀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경미한 접촉 혹은 체액을 묻히는 것만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변질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됩니다. 유력한 정치인들이 모조리 도망친 가운데 군부와 경찰이 수습에 나서지만 백약이 무효한 상태에서 브로츠와프의 좀비는 시시각각 늘어갈 뿐입니다.

 


좀비 이야기에 딱히 취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배경이 1960년대 폴란드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고 독재와 권위와 통제가 만연한 공산국가가 된 폴란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이 좀비 서사와 어떻게 결합됐을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등장할 리도 없고, 인민에게 강압적인 군대와 경찰이 정의의 사도처럼 좀비를 퇴치할 리도 만무한 상황에서 안 그래도 암울하고 폐쇄적인 1960년대의 폴란드를 덮친 세기말적 비극은 지금껏 읽은 좀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동료와 부하들을 잃어가면서 분투하는 군인과 경찰, 좀비 사태를 자신들의 정치적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젊은 야심가들, 감염자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선택을 강요받는 의사, 그리고 좀비의 공격에서 천신만고의 탈주극을 벌이는 간호학교 교장, 술집 주인, 일가족의 가장 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좀비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첫 12시간동안 브로츠와프가 어떻게 지옥으로 변해가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목숨을 보존하는 자는 극히 일부뿐입니다. 또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좀비의 공격 속에 생사의 갈림길을 걷게 된 수많은 인물들이 직조해낸 거대한 군상극이란 뜻입니다. 작가는 분() 단위로 쪼개진 짧은 챕터들을 속도감 있게 전개시키면서도, 독자들이 일말의 희망이나 기대를 품지 못하도록 군상극 속 인물들을 가차 없이 좀비의 희생양으로 전락시킵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비극의 무게는 한없이 무거워지기만 할뿐 어디에서도 잠깐의 안식이나 안도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시대적 상황은 좀비에게 점령당한 브로츠와프의 비극을 더욱 참혹하게 만듭니다. 사태를 은폐하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권력자들,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채 좀비 사태를 승진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예비 권력자들, 상식과 소통을 거부한 채 무모하고 강압적인 작전만 거듭하는 군인과 경찰은 거리 곳곳에 피와 살과 내장을 흩뿌리며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는 좀비 못잖게 위기감과 불안감만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용감하게 좀비에 맞서 싸우는 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독재와 권위와 통제를 당연시 여기는 공권력의 무기력하고 비합리적인 태도는 브로츠와프의 운명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디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찾아볼 수 없고 좀비의 공격은 날로 확산되는 가운데 브로츠와프를 덮친 첫 12시간의 비극이 마무리됩니다. ‘카오스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760여 페이지의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브로츠와프 3부작가운데 첫 편이라고 합니다. 아마 나머지 두 편 역시 이만한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극히 일부인 걸 보면 2편과 3편도 거의 새 인물들이 이끌어갈 군상극이 아닐까 예상됩니다.

전혀 새로운 좀비 이야기라고 할 순 없지만 ‘1960년대의 공산주의 체제 폴란드라는 특수한 배경 덕분에 나름 색다른 서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살짝 부담되는 분량이긴 하지만 워낙 긴장감과 속도감이 충만해서 주말 하루를 꼬박 투자한다면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좀비 마니아가 아닌 어중간한 스탠스의 독자라도 공포와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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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의 길
메도루마 슌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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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출신의 '행동하는 작가'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혼백의 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4월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가 8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긴 비극과 트라우마를 그린 작품입니다. 나라와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그린 문학작품에 관심이 있다 보니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띠지 카피에 저절로 눈길이 끌렸고, 그동안 어설프게만 알고 있던 그 전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금은 유명 여행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오키나와의 역사는 눈대중으로만 훑어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참혹합니다. 류큐국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일본 영토에 강제로 병합됐지만 본토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았고, 이 작품의 한국어판 서문대로라면 “1920~30년대 일본 본토에서는 식당 앞에 '조선인, 류큐인 사절'이라는 벽보가 붙기 일쑤였습니다. 패전의 기운이 명확해진 1945년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연합군과 일본군의 희생도 컸지만 오키나와 주민 네 명 중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엄청난 참극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오키나와는 본섬의 20%를 주일미군의 기지에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 가운데 대부분은 이제 80~90대에 이른, 즉 당시 10대 소년소녀였던 인물들이 주인공입니다. 80년이 흐른 뒤에도 전쟁이 남긴 악몽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년의 주인공들이 우연 또는 필연처럼 과거와 조우하곤 잊고 싶지만 결코 잊히지 않을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공습을 당해 후퇴하던 도중 중상을 입은 채 죽여 줘라며 매달리는 한 여성의 간청을 외면하지 못해 칼을 빼들었던 남자(‘혼백의 길’),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일들을 회상하는 남자들(‘이슬’),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스파이로 오인당해 살해된 아버지를 둔 남자가 40년 만에 아버지 살해범과 마주친 이야기(‘() 뱀장어’), 미군기지 건설현장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80대 여성이 전쟁의 와중에 남동생을 잃었던 그날을 떠올리는 이야기(‘버들붕어’), 15살에 전쟁에 동원됐다가 이웃남자를 스파이로 고발한 일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90살 남자(‘척후’) 등 애초 전쟁 따위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잔혹한 운명을 그린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예외 없이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읽는 내내 한국전쟁과 제주 4.3항쟁을 다룬 우리 소설과 2차 대전을 다룬 외국소설이 자연스레 생각이 났는데, 그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전쟁의 비극은 실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겁에 질려 숨거나 도망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터전에서 더 잔인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혼백의 길역시 같은 궤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키나와 전쟁을 둘러싼 다섯 가지 이야기가 조금 더 특별하게 읽힌 건 8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기지에게 점령당한 채 과거의 상흔을 반강제로 되새김질해야만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역설적인 처지 때문입니다. 작가 메도루마 슌은 미군기지 건설현장에서 해상 시위를 벌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오키나와의 비극을 정면으로 그려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출판사 소개글대로 오키나와 안팎의 폭력을 겨냥한 결연한 문학적 응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오키나와의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은 독자라면 메도루마 슌의 혼백의 길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한국전쟁을 무대로 한 비슷한 서사를 맛보고 싶다면 (이제는 고전이라고 해도 괜찮을)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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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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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2063,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로 불리던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사망한 후 조카인 는 저작권을 물려받아 그녀의 유고인 거울 나라의 출간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교코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편집자가 뜻밖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에 따르면 거울 나라원고에 삭제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 나라40년 전인 2020년대를 배경으로 한 교코의 자전적 소설로 일러두기에 따르면 논픽션에 가까운, 그러니까 실존인물들이 등장한 소설입니다. 외모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을 비롯하여 모두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일그러뜨린 과거사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가 펼쳐집니다.

 


형식, 소재, 캐릭터 등 여러 면에서 독특함을 풍기는 미스터리입니다. 또한 애증, 죄책감, 자기혐오, 이기심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갖가지 어둡고 불온한 감정들을 집요하게 그려낸 안타까운 비극 서사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미스터리와 비극의 중심에 루키즘(외모지상주의) 또는 외모와 관련된 질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액자소설 거울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 네 명의 남녀입니다. 아이돌로 데뷔할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지만 신체이형장애(평균보다 외모가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특정 부위에 대한 불만족 또는 혐오감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을 추하거나 못났다고 여기며 극심한 콤플렉스에 빠지는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웹 미디어 편집자 히비키, 어린 시절 화재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지금은 카메라 필터로 상처를 가린 채 라이브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는 사토네, 안면인식장애 때문에 연인과 직장을 잃은 적 있는 셰프 이오리, 그리고 히비키의 직장선배이자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고 있는 다쿠미가 그들입니다.

15년 전,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가 일으킨 화재 때문에 사토네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히비키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왔습니다. 극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 당시 잠시 이웃에 머물렀던 동갑내기 소년 이오리와도 우연히 만나는데, 이들은 15년 전의 화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것이 히비키가 선물한 향초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히비키의 직장선배 다쿠미까지 가세하여 조사에 나선 가운데 네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5년 전의 진실과 마주칩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네 사람에 의한 진상 추적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못잖게 눈길을 끄는 건 신체이형장애, 얼굴에 입은 화상, 안면인식장애 등 형태는 달라도 하나같이 외모와 관련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세 인물 사이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들입니다. 15년 전부터 서로를 알아온 히비키와 사토네와 이오리는 죄책감, 애증, 의심, 고마움 등 엇갈린 감정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아슬아슬한 삼각관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거기에 히비키에게 특별한 관심을 품은 다쿠미까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와 비극 외에 치정의 분위기까지 풍깁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뒤섞였던 서사들은 미스터리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일제히 한 방향으로 치달으며 독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칩니다.

 

현재의 는 교정지를 거듭 읽으면서도 편집자가 주장한 삭제된 내용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는데, 독자 역시 삭제된 내용이 과연 있긴 있는 건지, 만약 있다면 미스터리를 뒤집는 반전일지 혹은 네 사람의 운명에 관한 내용일지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에 뜻밖의 방식으로 공개된 삭제된 내용은 미스터리의 여왕 무로미 교코가 유고 거울 나라를 통해 감추려고 했던 또는 드러내려고 했던 진실을 찬찬히 설명하는데,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교코와 소설 속 인물들과 현재의 가 품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거울 나라는 치밀하고 정교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외모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인물들이 어떻게든 각자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비극의 기운이 더 강한 작품입니다.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느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워낙 감정선들이 세고 독한데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사회파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만끽할 수 있어서 신선한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오카자키 다쿠마의 대표작인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시리즈는 라이트한 일상 미스터리 같아서 읽을 생각을 안 했는데, ‘거울 나라를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 편쯤은 찾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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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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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7살 소녀 시시 래들리를 죽이고 살인죄로 수감됐던 빈센트 킹이 30년 만에 출소한다는 소식에 해안도시 케이프 헤이븐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집니다. 하지만 당시 15살 동갑으로 빈센트와 단짝이었던 경찰서장 워크는 그의 출소와 귀향을 누구보다 반기고 기뻐합니다. 다만 죽은 시시의 언니이자 자신과 빈센트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던 스타 래들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스타는 어린 남매 더치스와 로빈을 두고도 술과 약에 중독돼 툭하면 응급실에 실려 가곤 했고, 워크는 그런 스타 가족을 각별하게 지켜보며 도움을 줘왔기 때문입니다. 빈센트의 귀향이 스타 가족에게 미칠 영향 때문에 고심하던 워크는 별 풍파 없이 시간이 흐르자 안심하지만 어느 날 빈센트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이 스타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무법자는 작은 해안도시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30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서사이자, 3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범죄소설이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비극에 휘말린 13살 소녀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과거에 매달린 채 고통스런 30년을 살아온 경찰서장 워크와 스스로 무법자임을 자처하며 자신 앞에 놓인 지독한 현실에 저항하는 13살 소녀 더치스입니다.

30년 전의 사건은 워크에게 가혹한 운명을 강요했습니다. 단짝 빈센트는 살인죄로 성인 교도소에 수감됐고, 소꿉친구였던 스타는 동생을 잃은 뒤 엄마마저 자살한 여파로 삶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워크는 오랜 시간 동안 가해자인 빈센트와 피해자인 스타 모두에게 진심을 다해왔지만, 30년 만에 출소한 빈센트가 스타를 살해하고 자수하자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치스는 불과 13살이란 나이에 세상의 막장과 마주한 소녀입니다. 술과 약에 찌든 엄마 대신 5살 동생 로빈을 지켜야 하는데다, 비열한 방식으로 자신과 동생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는 게 일상이다 보니 결코 평범한 13살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라 자칭하며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무장한 채 힘든 나날들을 견뎌내지만 엄마 스타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외할아버지 핼의 농장에 머무는 동안 더치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본문에 종종 등장하는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대사를 의미하는 ‘We Begin at the End’지만, 개인적으론 13살 소녀 더치스를 강조한 나의 작은 무법자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30년의 망령에 집착한 채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담당한 워크의 이야기보다 스스로 무법자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가 더 강렬하고 매력적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난 무법자 더치스 데이 래들리다. 네놈은 겁쟁이 놈팡이고, 내가 네놈 목을 깔끔하게 날려주마.”라는 무자비한 대사와 함께 자신을 공격하는 자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더치스는 말 그대로 야생마 같은 날것의 힘을 폭발시키곤 합니다. 또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비극의 무게에 짓눌려 평범한 13살로 살아갈 길을 빼앗긴 더치스가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목에선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애틋함마저 느낄 수 있는데, 그래선지 마지막 반전과 함께 더치스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을 읽을 땐 가슴 한쪽이 시려올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그 관계도 복잡하고 운명적으로 설정된 데다 사건의 비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고, 각 인물들이 속에 품은 감정들 역시 하나같이 지독하거나 극단적이어서 결코 쉽고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완만하고 묵직한 편인데, 속독에 익숙하거나 성격 급한 독자라면 단선적인 구도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진행되는 미스터리와 집요하고도 때론 넘쳐 보이는 풍경 및 심리 묘사 때문에 중반부쯤 살짝 느슨함과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들은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에 이르러 수십 배는 거뜬히 넘을 만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왜 그토록 복잡하고 느리고 완만한 서사를 쌓아왔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단순한 범죄스릴러나 미스터리 이상의 문학성 짙은 장르물을 찾는 독자라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 휘타커의 나의 작은 무법자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13살 소녀 더치스가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하는 지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을 다른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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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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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 연향으로 돌아와 역 앞 매점을 떠맡게 된 24살의 김하임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사랑 때문에 마음이 늘 신산합니다. 그러던 중 우유식빵 같은 역무원 윤지완에게 반하게 됐고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 윤지완이 역 앞에서 피부가 가무잡잡한 한 여자와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10대 때 염희태에게 겁탈을 당한 뒤 임신까지 하자 집을 나왔던 이무영은 10년 만에 그와 우연히 만나 살림을 합칩니다. 하지만 염희태의 악마성은 여전했고 이무영과 딸 민아는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이무영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나 연고도 없는 연향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거의 황홀한 순간사랑이 태어나서 죽는 자리라는 사연 많은 지명을 가진 서울 근교의 소도시 연향을 무대로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1월 김하임’, ‘1월 이무영으로 이어지다 마지막 챕터 ‘12월 김하임에 이르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끌었지만, 전혀 다른 결을 지닌 두 여자의 삶을 전혀 다른 장르를 통해 풀어내다가 서술트릭의 반전과 함께 극적인 엔딩에 이르게 만드는 신선한 서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운명과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20대의 달달한 로맨스이자 통일호와 홍익매점이 남아있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아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무영의 챕터는 10대 시절부터 폭력과 강간에 시달린 한 여성의 비극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한 엄마의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하임의 챕터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리게 했다면, 이무영의 챕터는 덴도 아라타의 젠더 크라임을 연상시켰다고 할까요?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두 여자의 삶은 이무영이 가족과 함께 연향에 머물게 되면서, 그리고 우유식빵 같은 매력적인 역무원 윤지완으로 인해 미묘한 접점을 갖게 됩니다. 곁을 주는 듯 하면서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윤지완에게 서운해 하던 김하임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자 때문에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는 건 아닌가, 불안해집니다. 한편 윤지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감자탕 집에 몸을 의탁한 이무영은 한편으론 염희태의 폭력 속에 딸 민아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윤지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로맨스와 스릴러가 묘하게 뒤섞인 가운데 정체불명의 불안감을 뿜어내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뜻밖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독자에게 여러 감정이 혼재된 짙은 여운을 전달합니다.

 

이무영의 챕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갖춘 몰입도 높은 스릴러인 반면, 김하임의 챕터는 다소 가벼운 20대의 로맨스에다 엉뚱한 가족 이야기(번개를 맞고 우주신이 된 할아버지, 단역에서 출발하여 유명 스타가 된 엄마, 그런 엄마의 로드매니저를 자청하는 아빠)가 곁들여져 있어서 마치 두 발을 냉탕과 온탕에 하나씩 담근 듯한 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두 여자의 본격적인 접점이 언제쯤, 어떻게 이뤄질까 궁금하면서도 거의 종반부까지 눈에 띄지 않아서 살짝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래선지 2/3쯤까지만 해도 별 4개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려니, 생각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단 한두 줄에 의해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 잠시 멍해지며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을 찬찬히 되새기게 되는데, 그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자마자 반전의 짜릿함과 함께 이 작품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작가는 군데군데 눈에 보일 듯 말 듯 단서와 복선을 숨겨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을 기억해두며 페이지를 넘긴다면 막판 반전과 트릭의 쾌감을 좀더 진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통해 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지영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서술트릭이라는 의외의 방식으로 전혀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낸 필력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이상의 탄탄하고 농도 짙은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구미가 당기는 독자라면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의 줄거리를 너무 상세하게 공개해놓았습니다. 가급적이면 표지 앞뒷면의 카피 정도만 훑어본 뒤 본편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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