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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아일랜드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4월
평점 :
술집 ‘아일랜드’에서 “무인도에 딱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이란 주제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던 단골손님 여덟 명이 실제로 무인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낚싯대, 에어매트리스, 공기총, 술 등 제각각 세 가지 물건만 지닌 채 무인도에 도착한 일행은 낭만적인 첫날을 보내지만, 다음날 아침 그들 앞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타고 온 배가 사라진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으며 유일한 생존자는 10억엔의 상금을 받게 된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다 함께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 역할을 분담하며 협력하지만 얼마 안 가 첫 희생자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공포와 두려움 속에 섬은 이내 피비린내로 뒤덮이기 시작합니다.
(줄거리 요약 가운데 일행이 섬에 들어가게 된 ‘경위’와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된 ‘과정’을 생략했는데, 나름 이 작품의 첫 반전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과 뒤표지 카피에는 그 ‘경위’와 ‘과정’이 모두 공개되어 있는데, 가급적이면 아무 정보 없이 본편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소개된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을 모두 읽었는데, 한 번도 이런 장르를 다룬 적이 없는 작가라 반가움에 앞서 뜻밖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별 5개를 준 ‘성모’와 ‘암흑소녀’처럼 서스펜스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서사가 그녀의 ‘전공’이라고 단정해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기타노 타케시가 주연을 맡은 영화 ‘배틀 로얄’(2002)을 너무 좋아해서 아키요시 리카코가 그린 서바이벌 스릴러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는 영화 ‘배틀 로얄’이나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가운데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험난한 지형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같은 술집의 단골들로 늘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던 인물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진면목에 놀라기도 하고, 스스로도 서바이벌 스릴러의 인물답게 극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인상 좋은 아저씨 같던 인물은 실은 칼로 사람을 베는 손맛을 갈망하던 사이코패스였고, 유튜버로 성공하기를 꿈꾸는 청년은 살인이 난무하는 가운데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으며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습니다. 모두에게 민폐 캐릭터로 낙인찍힌 인물과 모두에게 호감과 안도감을 주던 인물 등 갖가지 군상들이 살아남기 위해 변신하는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매 챕터마다 화자가 바뀌는 가운데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작가는 매번 독자의 예상을 뒤집어가며 전략적 이합집산을 꾸미고 다음 희생자를 선정하곤 합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지만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이르는 과정에 연이어 반전이 벌어지곤 해서 끝까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서바이벌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속도감도 무척 빠르고 등장인물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다만 사건 위주로 급하게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으로 가볍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었던 점(특히 생존을 건 마지막 대결은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너무 가볍고 만화스러웠습니다), 다소 피상적으로만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좀더 깊고 디테일했더라면 좋았을 거란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300페이지가 살짝 넘는 짧은 분량인데 제가 아쉽게 느낀 부분들을 꾹꾹 눌러 담아 한 100페이지 정도 늘렸더라면 훨씬 더 인상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으로 아키요시 리카코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살짝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는데, ‘성모’와 ‘암흑동화’는 그녀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