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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마일 ㅣ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평점 :
(이 작품은 시리즈 4편 ‘가라, 아이야 가라’의 12년 후 이야기를 다룹니다. 내용 소개 중에 ‘가라, 아이야 가라’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2년 전, 켄지와 제나로는 납치된 4살 소녀 아만다를 찾아내 세간의 주목을 끈 바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최종 해결책(아만다를 ‘좋은 양부모’와 ‘나쁜 친모’ 중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을 놓고 큰 갈등을 벌인 탓에 두 사람은 1년 가까이 결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두 사람은 4살 딸 개비와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지독한 생활고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던 중 아만다의 숙모 베아트리체가 나타나 16살이 된 아만다가 또다시 사라졌다며 도움을 청합니다. 여전히 개망나니인 친모 헬렌은 경찰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사라진 아만다에 대해 아무 조치도 안 취한다는 사실까지 폭로합니다. 그동안 아만다 사건을 금기시하며 살아온 켄지와 제나로는 격론 끝에 일단 아만다 찾기에 나서기로 합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자 최종편인 ‘문라이트 마일’이 출간된 건 (미국 기준으로) 전작인 ‘비를 바라는 기도’ 이후 11년만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팬들이 후속작에 대한 미련을 접은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뜻밖의 선물처럼 출간된 셈인데, 그래선지 새로운 이야기 대신 12년 전 사건, 즉 시리즈 4편인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다뤘던 아만다 납치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만다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켄지와 제나로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제나로는 아기를 갖고 싶다는 뜻을 켄지에게 밝혔지만 우회적으로 거부당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아만다 사건을 맡게 됐고, 아만다를 찾은 뒤엔 개차반인 친모 헬렌에게 보낼 건지, 아만다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좋은 양부모’에게 맡길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갈등을 벌인 바 있습니다. 결국 켄지의 뜻대로 친모 헬렌에게 보내진 아만다는 또다시 불행의 늪에 빠져들었고, 그로 인해 제나로는 켄지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 또다시 아만다가 사라지자 켄지와 제나로는 갈등에 휩싸입니다. 켄지가 아만다 찾기를 주저하는 반면, 제나로는 속죄의 기회라며 의뢰를 받아들일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아만다와 같은 나이인 4살 딸 개비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두 사람의 심정은 좀더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시작과 동시에 독자를 서글프게 만드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린 개비를 키우는 부부의 곤란한 상황과, 40대라는 신체 나이에 굴복한 채 근근이 일감을 따내는 프리랜서 탐정 켄지의 안쓰러운 처지가 그것입니다. 아무래도 11년 만에 출간되는 시리즈 최종편을 위한 극적인 설정으로 보였는데, 그래선지 전작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탐정이자 부모의 심정으로 아만다를 찾는 켄지와 제나로의 여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만다의 실종 배후에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극악스러운 악당들이 패륜에 가까운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면,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인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혹한 액션’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틈만 나면 사건과 사건 사이마다 ‘탐정이자 부모인 켄지와 제나로’의 복잡한 심경을 그려 넣었고, 그래서 독자는 사건 자체보다 두 사람의 절박함과 두려움에 더 눈길이 끌리게 됩니다. 특히 12년 전 아만다를 개차반인 친모에게 돌려보낸 일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자책을 품어온 켄지가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폭주하는 모습은 안타까움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만다를 찾는 일 자체가 엄청난 액션과 위기일발의 상황을 필요로 하지 않다 보니 켄지와 제나로의 주된 일은 지루한 탐문 위주로 전개됩니다. 탐문의 대상이나 내용 역시 다분히 의도적으로 ‘가족’ 혹은 ‘부모와 자식’에 초점이 맞춰져서 살짝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만다를 찾아내고 배후의 악당을 제거하는 과정은 좀 맥이 빠진다 싶을 정도로 단순했고, 켄지와 제나로의 노력과 분투 덕분이라기보다는 뜻밖의 행운과 ‘우군’에 의지한 느낌이 강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아쉬움은 전적으로 데니스 루헤인의 계산된 노림수라는 생각입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더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탐정이 아니라 중년에 접어든 채 어린 딸을 키우는 연약한 부모가 되어 그동안 자신들이 활약해온 무대를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읽는 동안 느꼈던 이런저런 아쉬움이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느닷없는 울컥함으로 돌변했는데,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아마 비슷한 경험을 겪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문라이트 마일’이 2010년에 출간됐으니 이제 켄지와 제나로는 50대 후반에 이르렀을 나이입니다. 어쩌면 부모를 능가하는 탐정이 된 딸 개비를 앞세운 스핀오프가 출간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막연한 기대보다는 단 여섯 편의 작품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켄지와 제나로를 회상하며 롤러코스터보다 더 아슬아슬했던 그들의 전성기를 곱씹어보는 게 팬으로서 더 흐뭇하고 보람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