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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 군함의 살인 - 제33회 아유카와 데쓰야상 수상작
오카모토 요시키 지음, 김은모 옮김 / 톰캣 / 2025년 4월
평점 :
프랑스와 유럽동맹 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1795년, 임신한 아내를 둔 평범한 영국 남자 네빌 보우트는 납치당하듯 징병되어 범선 군함 헐버트호의 수병이 됩니다.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군사훈련이 시작되고 네빌은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가족과의 생이별에 절망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수병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범선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수사를 담당한 장교는 즉각 네빌을 용의자로 지목하는데, 첫 사건 땐 피살자의 바로 옆에 있었고, 두 번째 사건 땐 시신의 첫 발견자가 네빌이었기 때문입니다.

1795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선 영국 범선 군함 헐버트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른바 ‘움직이는 밀실’이라 할 수 있는 바다 위의 군함을 무대로 한 본격 미스터리인데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범선 군함의 살인’으로 제33회 아유카와 데쓰야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오카모토 요시키가 쓴 작품들 모두 빅토리아 시대 런던이나 영국 식민지의 농장 등 과거의 외국을 무대로 삼았다고 하니 무척 특이한 성향의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 위의 군함’ 자체도 거대한 밀실이지만, 헐버트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들은 범행 이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유유히 종적을 감춘 범인의 행각 때문에 밀실 미스터리의 맛을 더 강렬하게 풍깁니다. 범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의 갑판에서, 또는 온통 어둠뿐인 배 밑바닥에서 기괴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가 하면, 유일한 출구가 수병들에 의해 막힌 밀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수병과 장교들을 더욱 두렵게 만든 건 이른바 ‘프랑스 함장 유령의 저주’라는, 헐버트호에 전해 내려오는 괴담입니다. 과거 헐버트호의 영창에 갇혔던 프랑스 함장이 자살한 이래로, 그 영창에 감금됐던 자들이 저주에 휘말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는 괴담인데, 공교롭게도 이번 살인사건의 피살자들 역시 영창을 드나들었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메인 서사지만 ‘범선 군함의 살인’에는 흥미로운 서브 서사들도 포진해있습니다. 우선 18세기, 그것도 범선 군함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대한 묘사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끕니다. 승조원이 500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헐버트호의 외형도 신기했고, 범선의 항해 원리라든가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 역시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또한 죽음의 공포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던 네빌이 같은 신세인 수병들 일부와 함께 탈출을 도모하는 이야기는 액션 스릴러의 긴장감과 함께 과연 그들이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시대적 배경이나 사건의 성격상 다분히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빠른 전개와 세련된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인데, 사실 고전미나 서사 자체보다 아쉬웠던 건 망망대해의 군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공포심’이 기대보다 약했다는 점입니다. 500명에 달하는 승조원 가운데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거나 조금이라도 공포심을 느낀 건 용의자로 지목받은 주인공 네빌과 소수의 수병들, 그리고 수사를 지휘하는 일부 장교뿐이었고, 그래선지 독자 역시 헐버트호를 뒤덮은 살인사건의 공포에 깊게 몰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주인공 네빌은 대체로 수동적이고 유약한 캐릭터로 그려졌고, 탐정 역할을 맡은 장교 버넌은 두 번째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지향점이 모호해서 네빌과의 시너지를 발산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살해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헐버트호를 제대로 강타했더라면, 또 두 주인공이 좀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충돌했더라면 좀더 내실 있는 미스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장르물 독자라면 저절로 눈길이 끌릴 만큼 매력적인 설정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범선 군함의 살인’은 18세기 범선 군함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휴먼 드라마의 조합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꽤 흥미로운 텍스트가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