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빌려 드릴까요
사토 아유코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보디 렌털포르노 소설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가와데 문예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고백하자면, 출판사 소개글의 첫 줄을 보고 호기심이 동한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동시에, 지독한 성애 묘사가 노골적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묵직하고 애틋한 여운을 남겼던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국내에선 19금 출간)의 좋은 기억이 떠올라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이 작품을 읽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특별히 줄거리라고 정리할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 후지노 마야는 뭇 남성들에게 자신의 몸을 대여해주는 20살의 명문대 재학생입니다.

이야기는 그녀와 뭇 남성들의 만남, 그녀와 그녀 친구들과의 소소한 일상들이 전부입니다.

성장소설이라고 하기도, 파괴소설(?)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튼, 특별히 포르노 소설이라고 못 박을 만한 장면은 별로 없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과 육체와 두뇌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어둡고 무겁지 않다는, 오히려 가볍고 밝은 장난 같다는 점에서

마야는 자신의 보디 렌탈을 매춘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목적이 거액의 렌탈료, 부의 축적인 것도 아닙니다.

작품 여기저기서 독백이나 대화를 통해 그녀는 보디 렌탈의 동기와 목적을 설명합니다.

 

사랑은 무겁고 답답하다.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비일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다는 동경심, 완전한 오브제가 되어 버리는데 대한 동경심.

인간이 아닌 물건이 되고 싶다.

자학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다. 구태여 말한다면 가벼워지기 위해 하는 일이다.

나 자신을 텅 비워 버리고 싶다.

나는 이를테면 하나의 무형의 물질이다.

나의 육체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빌려주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여러 페이지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내용입니다)

 

독자에 따라 마야의 행위는 자기 파괴로 보일 수도 있고, 치유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라고 딱 꼬집을 수 없을 만큼 마야의 행동이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론 텅 빈 그릇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허무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위악적인 치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서 성장소설이라고 하기도, 파괴소설(?)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고 한 건 이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솔직하게 평하자면, ‘?’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마야를 보면서

읽는 내내 답답함과 궁금함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텅 빈 그릇이 된다는 게 도대체 뭘까?

사막처럼 메마르고 싶다는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래서 그녀가 도착하고 싶은 종착지는 어디일까?

 

두 편의 해설(일본편, 한국편)과 옮긴이의 말까지 샅샅이 읽어봐도 그 답을 찾진 못했습니다.

제 이해력의 부족이 원인인지, 그런 답을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작품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디 렌탈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도입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정체는 책을 덮을 때까지 제겐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마음과 육체와 두뇌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허무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마야의 주장과는 반대로

마지막에 제게 남은 이미지는 망가진 관절 인형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자기 파괴적인 캐릭터와 서사를 기대했던 탓에

어딘가 난해한 느낌까지 드는 이 작품에 깊이 심취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한 독자들에게도 쉽게 어필하긴 어려운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고,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갈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딱히 번역의 문제가 눈에 띄진 않았지만, 간혹 서걱거리는(?) 느낌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특히 마야의 심리 또는 생각에 관한 디테일한 묘사들이 그랬는데,

그 부분들이 매끄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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