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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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스무 살에 술집 손님이던 거친 뱃사람과의 하룻밤 정사로 나를 가졌어.

난 엄마에게 매를 맞으며 자랐고, 엄마의 강요로 술집 손님들을 상대로 매춘에 내몰렸지.

사랑 따위, 마음 따위, 웃음이나 눈물 따위는 애초부터 내 인생에 없었던 것 같아.

러브호텔 호텔 로열의 사장이자 엄마의 애인이던 30년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것 역시

단지 그가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고 프로포즈 했기 때문이야.

그는 좋아하니 어쩌니 하는 말도, 마음을 시험하지도,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어.

 

무색무취한 날들이지만, 딱히 싫지도, 심심하지도 않았어.

그런 날들에서 도망치거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고...

그냥 이렇게, 중력이든 인력이든 나를 끌어당기는 쪽으로 흘러가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일까?

내가 쓴 유리 갈대라는 단가(短歌)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 처럼, 어쩌면 내 몸에 흐르는 것은

빨간 피가 아니라 마른 모래가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어.

누군가 내 마음을 흔드는 것도 싫고,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더 싫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속박당하는 것도 싫은 나...

 

그래도 내 어느 한구석엔가 마음의 조각이란 게 남아있기 때문이었을까?

러브호텔의 세무를 맡은 사와키와 간간이 몸을 섞으며 절정과 위안을 얻기도 하고,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매 맞는 소녀를 만난 뒤론 냉정한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어.

엄마가 여전히 내 남편과 몸을 섞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나답지 않게 폭발하기도 했고,

전적으로 내 의지에 의해 몇 번이고 손에 피를 묻히기도 했지...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역시 나는 유리 갈대이거나, 그 안을 흘러가는 가슬가슬한 모래야.

깨지기 쉬운 유리이거나, 절대 꺾이지 않고 출렁대기만 할 뿐인 갈대거나,

또는 모든 것을 타인의 의지나 무정한 세상에 내맡긴 채 이리저리 떠다니는 모래...

이런 삶은 무슨 색일까? 의미란 게 있을까? 더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여름조차 서늘한 훗카이도 동부의 대기와 호텔 로열앞에 펼쳐진 광대한 습원의 습기,

그리고 바다에서 무시로 몰려오는 축축한 안개 속에서

유리 갈대이자 그 대롱 속을 흐르는 모래인 나는 그럭저럭 오늘을 살아가고 있어...

 

● ● ●

 

어떻게 서평을 시작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느닷없이 주인공 세쓰코의 독백 같은 것을 쓰고 말았습니다.

사실 유리 갈대에는 여러 가지 파격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이 묘사되지만,

결국 이야기의 중심은 세쓰코라는 한 여자의 유리 같거나, 갈대 같거나 모래 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상투적인 줄거리 정리보다는 멋대로 세쓰코가 되어 멋대로 독백해보기

서평의 오프닝을 삼고 말았습니다.

 

작품 내내 세쓰코를 지켜보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타고난 허무주의자 같기도 하고, 학습된 냉소주의자 같기도 한 세쓰코의 캐릭터도 그렇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일이나 그 엄마의 피를 물려받아불륜을 저지르는 일도 그렇고,

끝내 몇 번씩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기구한 운명도 모두 안쓰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쓰코의 유리 갈대 또는 모래 같은 삶은 도대체 어디에서 종장을 맞이할지,

또 그 종장은 얼마나 비극적이거나 허망할지를 떠올려보는 일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세쓰코의 많은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간간이 몸을 섞는 중년남자 사와키는

독자들의 이런 편치 않은 감정들을 대신 발산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세쓰코와 인연을 맺어온 사와키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서도

결국 자신은 그녀에게 버스정류장이나 주유소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언제나 위성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지켜볼 뿐입니다.

살은 섞지만, 마음은 절대 섞지 않는 두 사람의 평행선 같은 관계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소재나 캐릭터, 사건만 놓고 보면 막장 드라마의 완결판처럼 느껴지지만,

사쿠라기 시노는 섬뜩할 정도의 담담한 문장들로 이 난감한 막장의 요소들을 요리합니다.

무엇보다 간결한 표현으로 인물들의 심리를 세밀하고 적확하게 묘사한 대목들은

막장마저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연작단편집 호텔 로열’ (149회 나오키상 수상작)에서도 비슷한 대목들을 여러 번 목격했는데,

이런 묘사의 힘이야말로 사쿠라기 시노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스산하게만 느껴지던 구시로 습원의 이미지와 호텔 로열의 풍경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여운처럼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의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돼있는 광대한 습원이었습니다만,

잠깐이라면 모를까, 낮밤으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면,

(더구나 바다에서 몰려온 안개까지 곁든 풍경이라면)

누구나 세쓰코처럼 자신을 유리 갈대나 모래처럼 여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집 호텔 로열과의 접점을 찾아보려 했는데,

같은 무대이되 전혀 다른 히스토리를 지닌 것으로 설정되어 무척 아쉬웠습니다.

다만 기시감 같은 묘한 공통점이 일부 있는데,

호텔 로열을 세운 남자가 모두 간판과 관련 있는 일을 했다든가,

본처와 이혼한 뒤 자신의 절반밖에 안 되는 나이의 젊은 여자와 재혼했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유리 갈대를 인상 깊게 읽은 독자라면

호텔 로열을 통해 사쿠라기 시노의 단편의 매력을 꼭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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