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1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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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원 쓰레기통에서 젊은 여성의 오른팔이 발견된 사건으로 일본 전역이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범인은 언론사는 물론 피해자의 유족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희롱하듯 자신의 범죄를 폭로합니다. 연이어 동일범에게 살해당한 시신들이 발견되지만 경찰은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채 궁지에 몰립니다.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 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으로 인해 죄책감에 빠져있던 중 공원에서 잘린 오른팔을 발견한 고교생 쓰카다 신이치,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등 사건 관련자들은 제각각의 희망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일본에서 무려 5년에 걸쳐 연재됐으며 (2006년 번역판 기준으로)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2007년 가을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게 만든 작품이라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올해의 독서목표인 명품재독을 계획하면서 거의 17년 만에 모방범과 그 후속작인 낙원을 다시 읽을 생각에 무척 설렜는데, 사흘에 걸쳐 다시 읽은 모방범은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라 부를 만큼 서사와 여운 모두 압도적이었습니다.


전대미문의 연속 유괴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지만 모방범은 초반부터 진범은 물론 누명을 쓰게 되는 인물까지 공개하는데다 서사의 중심 자체가 추리나 반전보다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그리는 데 있기 때문에 단순한 미스터리 이상의 거대한 휴먼 드라마로 읽히는 작품입니다.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수사의 주체라기보다는 사건에 휩쓸린 대다수의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을 헤매는 조연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이야기를 견인하는 건 크게 세 그룹입니다. 하나는 유괴와 살인은 오로지 부차적인 수단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줌으로써 을 체현(體現)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와 그를 추종하면서 오로지 쾌락을 위해 피해자들을 유린하고 살해하는 잔혹한 살인마이고, 또 하나는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와 경찰로 대표되는 사건의 기록자들이자 방관자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그룹은 연속 유괴살인사건의 첫 목격자인 쓰카다 신이치와 범인에게 손녀를 잃은 70대 노인 아리마 요시오,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된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는 다카이 유미코 등 범죄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일반인들입니다.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독자는 수시로 몰입의 대상과 애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코 흥미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엔 불확실한 정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뿐인 르포라이터 시게코에게는 응원과 비아냥을 번갈이 보내게 되고, 살아있는 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피해자의 유족이나 범인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용의자의 가족에게도 챕터가 바뀔 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말하자면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그 구분 자체가 미묘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바로 이런 점 -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 - 모방범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인데다 등장인물도 많아서 상세한 내용이 없는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지만, ‘모방범은 축약한 줄거리만으로는 그 진가를 1/100도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이라 직접 읽어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마땅한 추천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분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단 1권만 읽어보자.”라는 심정으로 도전한다면 어느새 3권 막판까지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에 실망했던 독자라도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모방범만큼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손꼽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방범이후 9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 낙원을 읽으려고 합니다. 희미한 기억이긴 하지만 모방범보다는 다소 인상과 여운이 깊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역시 충분히 매력적인 책읽기의 시간을 제공해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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