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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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공중그네’, ‘면장선거에 이은 닥터 이라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출간 기준으로 면장선거이후 17년 만인 2023년에 출간됐는데, 세월이 적잖이 흘렀지만 정신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와 간호사 마유미 콤비는 여전히 17년 전 그 나이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물론 괴짜와 마녀라는 캐릭터도 여전합니다. “괜찮아, 괜찮아.”를 남발하며 환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이라부는 누구에게든 뒤룩뒤룩 살찐, 다리 짧은 중년 아저씨라는 첫인상을 남기고, 표정 없는 얼굴에 미니 원피스 간호복을 입고 특대형 비타민 주사를 들이미는 마유미 역시 예전의 그 카리스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라부의 17년 만의 복귀 이유에 대해 오쿠다 히데오는 코로나를 언급합니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황폐해진 현대인들을 지켜보며 정신과 의사 이라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절 외출 자제, 재택근무, 원격수업 등 사람들로 하여금 고립된 상황에서 불안과 혼란을 느끼게 만든 시스템들이 만들어졌고, 그 결과는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지겹도록 들은 바 있습니다. 우울증을 비롯하여 많은 정신적 질병들이 급증했고, 사람들은 낯설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라디오 체조속 다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환자들이 모두 팬데믹의 희생자들로 설정된 건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선 더는 낯설지 않은 정신적 상처들을 지니고 있어서 다만 일부 인물이라도 나도 조금은 그런 것 같은데...”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시청률에 목을 맨 나머지 의존증과 주의력 결핍에 걸린 뉴스쇼 PD, 부당한 일에 화가 나지만 제대로 화를 낼 줄 몰라 공황장애와 과호흡을 겪는 세일즈맨, 데이트레이더가 된 후 100억이란 큰돈을 벌었지만 히키코모리처럼 삶이 황폐해진 남자, 어느 날 갑자기 광장공포증에 빠져 대혼란을 겪게 된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 그리고 자의식이 강한 나머지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 대학생 등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지만 유독 그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난 인물들이 이라부의 진료실을 찾습니다.

 

망했다. 이 의사는 완전 미쳤다. 이라부는 원래부터 사고 회로가 이상한 것이다.” (p343)

 

창고 같은 진료실에 괴짜 같은 외모도 놀랍지만 이라부의 기이한 처방은 환자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피하고 싶은 상황과 직접 대면하게 만들기도 하고, 도저히 치료라고 볼 수 없는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한 적당히 힘을 빼라고, 너무 힘주고 살지 말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며 부지불식간에 환자의 마음을 풀어주곤 합니다. 반신반의하던 환자들은 어느 샌가 이라부의 황당한 처방이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편하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실은 이라부의 처방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하는 치료라기보다는 환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게 거드는 일종의 위약(플라시보)이나 다름없습니다. 지시하는대로 따라오라는 권위적인 의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거울을 내밀고 스스로를 지켜봐라.”라고 권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선지 이라부의 캐릭터도, 그가 내리는 처방도 모두 현실에선 절대 만나볼 수 없는 판타지라는 걸 잘 알면서도 독자는 어딘가 그런 의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기행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괴짜 콤비 이라부와 마유미를 통해 웃음과 온기를 전파하는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유머와 힐링 메시지는 오래 전에 읽은 시리즈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어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전작들을 순서대로 한 편씩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마음이 팍팍해질 때, 황당한 처방을 남발하는 이라부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명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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