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프랑스 중앙 산악지대의 한 마을에서 큰 소동이 벌어집니다. 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한 남자가 내연녀와 함께 도주극을 벌이는 와중에 102세 할머니 베르트 가비뇰이 경찰에게 총탄을 퍼부으며 두 남녀의 도주를 도왔기 때문입니다. 베테랑 수사반장인 앙드레 벤투라는 연행된 베르트의 심문을 맡곤 그녀가 불법 소지한 독일제 권총의 출처부터 묻습니다. 2차 대전 중 자신을 강간하려던 나치를 죽이고 손에 넣은 권총이란 말에 벤투라는 깜짝 놀라지만 정작 그를 엄청난 충격과 연민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게 만든 건 그 직후부터 베르트가 들려준 그녀의 연쇄살인 연대기입니다. 그 연대기는 25살이던 1939년에 저지른 첫 살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죽인 뒤 지하실에 묻은 수많은 남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2021년에 읽은 포커 플레이어 그녀에 반해 곧장 사들였지만 3년이 지나서야 읽게 된 브누아 필리퐁의 루거 총을 든 할머니입니다. 제목만 보면 할머니 탐정이 활약하는 코믹 장르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102세 연쇄살인마 할머니의 평생에 걸친 살인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무겁고 어두운 소재지만 포커 플레이어 그녀에서도 만끽했던 브누아 필리퐁 특유의 지독한 비틀기와 블랙 코미디 코드가 잔혹하면서도 연민을 품을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살인기록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서 그야말로 희비극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프랑스 문예지 리르는 이 작품에 대해 그녀의 인생은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육체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이 걸어온 단계들과 일치한다.”는 평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수많은 남자들(대부분은 남편들)을 총과 칼로 죽인 뒤 지하실에 묻어버린 비정한 연쇄살인마지만, 베르트는 자신의 행위를 분노와 복수 이상의 정의였다고 믿습니다. 자신을 강간하려던 나치, 여자를 말 잘 듣는 애완동물정도로 여기는 지독한 가부장제의 신봉자들, 아동학대범, 인종차별자 등 그녀의 지하실에 묻힌 남자들은 베르트 입장에서는 법과 사회가 방치한, 그래서 자신의 총과 칼이 아니면 응징할 수 없는 악이자 괴물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과 괴물들의 행위는 여성의 자유와 권리가 함부로 여겨지곤 했던 20세기 남성우월주의의 추악한 단면들과 꼭 닮아있는데 그래선지 베르트의 연쇄살인은 진술이 거듭될수록 사이다 이상의 통쾌함을 안겨주곤 합니다. 물론 살인이 반복될 때마다 베르트에게 찾아오는 심신을 갉아 먹는 고통과 악몽은 그저 안쓰럽고 안타까워 보이지만 말입니다.

 

다른 작가가 베르트의 이야기를 정색하고집필했다면 아마 이 작품은 한없이 무겁고 어두운 비극으로 포장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브누아 필리퐁은 심각한 상황에서마저 웃음을 유발하는 기막힌 단어와 문장으로 독자를 쥐락펴락 사로잡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절묘하게 단어와 문장을 비틀어대기도 하고, 재치 넘치는 비유와 인용으로 독자는 물론 작중 인물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영국식 블랙 유머와는 또 다른 맛을 풍기는 프랑스 스타일의 블랙 코미디 덕분에 베르트의 무겁고 어두운 비극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공감과 진정성을 획득합니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그야말로 희로애락을 쉴 틈 없이 맛보게 되는 진정한 롤러코스터 같은 작품이라고 할까요?

 

사족이지만, ‘루거 총을 든 할머니에는 성()에 관한 꽤 수위 높은 묘사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베르트를 함부로 짓밟는 남자들의 폭력인 경우도 있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베르트의 적극적이고도 자발적인 행위인 경우도 있습니다.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독자에 따라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장면들은 베르트가 갈망한 자유와 권리가 무엇인지, 그녀가 구현하려던 정의가 무엇인지를 좀더 생생하고 피부에 와 닿게 전해주는 장치들이란 생각입니다.

 

102세 할머니이자 페미니스트이자 연쇄살인범이며 가차 없는 독설가이기도 한 베르트의 일생을 다룬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연쇄살인 스릴러와 20세기를 배경으로 한 여성소설의 미덕을 골고루 갖춘 명품입니다.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끌진 못한 것 같은데 뒤늦게라도 많은 독자들이 이 명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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