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 살인사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박진범 북디자이너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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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락객들로 붐비는 긴자 거리에 난데없이 나비 떼가 나타난 직후 성경 구절을 새긴 팔찌를 찬 청년이 독극물로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청년의 신원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경찰은 1주일 후 또 다른 자살 사체와 마주치는데 이번에는 1주일 후의 자살을 예고하는 메시지 - “우리 동지가 항의하기 위해 분신자살을 할 것이다.” - 가 남겨져있어 초긴장상태에 빠집니다.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자들의 정체는 물론 누구에게 무엇을 항의하겠다는 건지도 알 수 없어 경시청 수사1과의 도쓰가와 경부를 포함한 경찰은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던 중 자살한 자들의 동료로 보이는 한 남자를 찾아내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지만 그들 배후에 사이비 종교단체가 자리하고 있는 걸 알게 된 도쓰가와 경부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묵시록 살인사건202292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무려 70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겨 일본의 국민 미스터리 작가로 불렸던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으로 1980년에 출간됐습니다. 한국에선 80~90년대에 소개된 작품까지 포함해도 출간작 자체가 10편도 되지 않아 미지의 작가나 다름없었는데, 요 몇 년 사이 살인의 쌍곡선’, ‘화려한 유괴에 이어 묵시록 살인사건까지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더는 낯선 이름의 작가로 여겨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연이은 자살 사체가 발견되는 와중에 도쓰가와 경부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죽은 자들이 남긴 미소입니다. 독극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웃으며 숨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타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건가? 이런 의문에 사로잡혀 고민을 거듭하던 도쓰가와 경부는 세 번째 자살 사체에서부터 사건성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운 좋게 포착한 자살자들의 동료 한 명을 조사하면서 조금씩 사건의 실체에 다가갑니다. 유일한 심증은 자살한 자들의 팔찌에 새겨진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입니다. 분명 특정 종교단체가 개입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자살하는지, 누구에게 항의하는 것인지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단체를 다룬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여러 편 읽었지만 묵시록 살인사건처럼 거의 돌직구 스타일로 서사를 전개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의 정신을 장악하고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죽음을 조종하는 사이비 교주의 행태라든지 교주와 교리에 세뇌된 채 세상의 상식과 등을 저버린,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까?”라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 신도들의 언행은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 서사의 교과서처럼 읽힐 정도입니다. 성경을 인용한 대목이나 교리를 설파하는 장면이 적지 않아서 가끔 머리가 무거워지곤 했지만 큰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단서 하나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사소한 조각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사를 벌이는 도쓰가와 경부와 그의 동료들 역시 아날로그 시대의 경찰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다른 벽에 수없이 부딪히면서도 그들의 탐문은 거듭되고, 상상에 불과한 추리라도 기어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밤낮없이 매진합니다. 물론 이런 수사 과정은 요즘의 독자에겐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98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며 읽다보면 각종 문명의 이기에 의지하며 수사를 벌이는 현대의 경찰이나 탐정에게선 느낄 수 없는 제대로 된 진정성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클래식 미스터리만의 정수라고 할까요?

 

사이비 종교문제를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진한 땀 냄새가 진동하는 경찰소설이면서 동시에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까지 품고 있는 묵시록 살인사건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고전만의 독특한 맛을 맛보려는 독자에게 잘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소재 자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리게 만드는 서사의 힘이 워낙 묵직해서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소재에 대한 우려나 비호감은 금세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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