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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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기관절개 호스를 꽂고 등뼈는 S자로 심하게 휜 미오튜뷸러 미오퍼시(근세관성 근병증)’, 흔히들 꼽추라 부르는 중증 척추 장애인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된 40대의 이자와 샤카.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과 함께 중증 장애인 그룹홈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그녀는 남들 앞에선 성실하며 과묵한 장애여성으로 지내지만 동시에 필명으로 포르노에 가까운 소설과 기사를 쓰는 익명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간절한 두 가지 소망은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입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는 간병인 다나카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

 

2023년 상반기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헌치백은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하나는 최초로 일반적인 글쓰기가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 수상자가 나온 점이고 또 하나는 작품 자체의 파격성입니다. 1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장애인 당사자가 쓴 충격적이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애인 서사의 묵직함과 애틋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쓴 장애인 서사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차별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짐작하겠지만, ‘헌치백은 그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어째서 2023년에 이르러서야 중증 장애인이 최초로 수상하게 됐는지 모두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라는 수상소감과 함께 종이책 중심의 출판계를 비판하면서 전자책과 오디오북 추가 보급 등 독서 배리어 프리를 호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 혹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성이 짙은 작품으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고급 창부가 되고 싶고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건 장애인인 자신의 처지를 자학하거나 비관해서도 아니고 일부러 꾸며낸 위악도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여자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샤카가 당연히 꿈꿀 수 있는 바람으로 보였습니다. 임신, 중절, 매춘 등 자신의 몸이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일들에 집중된 주인공 샤카의 욕망은 부도덕하거나 음탕하다는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안 되며 오히려 평생 인공호흡기와 담을 빼내는 흡인기를 끼고 살아야 하고 식사와 목욕도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며 섹스 자체는 아예 불가능한 그녀만의 소중하고 절실한 욕망으로 봐야합니다. 간병인에게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라고 제안하는 장면에선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겠지만 그와 함께 한없는 애잔함을,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절실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쉽지 않은 혼자만의 내밀한 욕망,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그런 욕망을 작가 역시 오랫동안 품어왔던 게 분명하고, 그것들을 파격적인 설정과 문장, 그리고 샤카라는 인물을 통해 풀어낸 것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책머리에 실린 이 작은 목소리, 삐딱한 주인공에 부디 큭큭큭 웃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공개석상에서라면 듣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게 분명한 작가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로 읽히진 않은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독자에 따라 헌치백은 무척이나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상대의 마음에 확실히 꽂히기를 바라고 쏘아댄 작가의 화살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금까지 비장애인이 창조했던 장애인 서사에만 익숙했던 탓에 정작 장애인인 당사자가 지나치게 솔직할 정도로 털어놓은 고백에 깜짝 놀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당사자성이야말로 헌치백이 품은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면서 중증 장애여성의 임신과 중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이지만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특별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그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사실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여운이 희미해질 때쯤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조금은 더 샤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치카와 사오가 비슷한 아류작을 낼 리는 없겠지만 언젠가 당사자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내놓는다면 꼭 찾아서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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