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캡슐 -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윤수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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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관’(2015) 이후 무려 8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오리하라 이치의 신간입니다.(일본에서는 2018년에 출간됐습니다.) ‘15년 만에 도착한 편지라는 부제처럼 15년 만에 배달된 편지 한 통이 몰고 온 일곱 개의 사건을 묶은 연작소설입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주 무기인 서술트릭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고,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향연과 절묘하게 회수되는 복선의 쾌감 등 그야말로 미스터리의 다채로운 맛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15년 전의 과거가 집 안에 흙발로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 행복한 과거면 괜찮지만 (...) 불행한 과거가 쏟아져 들어오면 당연히 불행해진다. (...)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불행해지고, 불행하게 생활하던 사람은 한층 더 불행해진다.” (p353)

 

먼 훗날 열어보기로 작정하고 자발적으로 쓴 타임캡슐 속 편지와 달리 포스트 캡슐 속 편지들은 발신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송이 15년이나 지연된 것들입니다. 그 편지들은 하나같이 받은 사람이 황당해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청혼을 담은 고백편지, 어머니에게 보낸 아들의 유서, 전 직장상사에게 보낸 감사편지, 돈을 요구하는 협박편지, 소설 신인상 수상을 알리는 통보, 가출한 손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편지 등이 그것입니다.

 

일부는 편지의 소인이 15년 전임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불과 며칠 전에 발신된 편지로 오해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받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당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점차 다양한 감정을 품게 됩니다. 그중 반가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의문을 품거나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고백, 유서, 협박, 수상통보 등 받을 시기를 놓치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답장을 쓰지만 그 답장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초하거나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삶이 무너지는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편지의 당사자들은 편지를 주고받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나기까지 하는데, 바로 그 지점부터 예기치 못한 사고나 범죄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사건 당사자 외에 편집자라는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15년 전 포스트 캡슐을 기획한 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뭔가 의도를 갖고 사건 당사자들을 지켜보는 듯한 묘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사자들을 미행하거나 지켜보며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물론 사건이 종료되면 후기라는 것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 모든 기록들의 집합체가 바로 이 포스트 캡슐이라는 소설입니다. 독자는 미스터리뿐 아니라 이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일곱 개의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로 묶이는 순간 편집자의 정체와 의도가 드러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오리하라 이치 특유의 서술트릭의 진가를 맛볼 수 있습니다. 눈앞에 빤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단서들이 자동으로 맞춰지는 퍼즐처럼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는 쾌감도 짜릿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주 가끔 애매모호거나 찜찜함이 남는 순간들이 있는 게 사실인데, 대부분은 찬찬히 복기해보면 정교한 설계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 막판 총정리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 4.5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입니다.

 

평범한 한 통의 편지가 15년의 배송 지연으로 인해 위험천만한 흉기로 혹은 인간의 악의를 부추기는 불온한 촉매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기발한 발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지금까지 읽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하다는 게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물론 도착 시리즈시리즈를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 중 절반 가까이밖에 못 읽어서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직 오리하라 이치를 만나본 적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그에게 입문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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