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소녀들
스테이시 윌링햄 지음, 허진 옮김 / 세계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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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루이지애나 주의 작은 마을 브로브리지에서 여섯 명의 소녀를 납치 살해한 혐의로 딕 데이비스가 체포됐습니다. 당시 12살이던 딕의 딸 클로이는 끔찍한 시간들을 견뎌낸 뒤 지금은 심리상담사가 됐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시없을 인연이라고 확신한 대니얼과의 결혼을 앞두고 12살 이후 처음 맞이한 행복에 젖어있던 클로이에게 또 다시 악몽이 찾아옵니다. 아버지의 사건 2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즈의 기자 에런 잰슨이 취재를 요청해온데다 아버지의 범행과 판박이처럼 보이는 소녀 실종사건이 클로이 주변에서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희생자 중 한 명이 자신의 환자였기에 범인이 딕의 딸인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여긴 클로이는 대니얼 모르게 홀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그녀의 공포심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26년 전 아버지가 저지른 연쇄살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희생자의 손목을 자르는 범인이 나타나자 외과의사인 노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진실 찾기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룬 프리다 맥파든의 핸디맨과 큰 얼개가 비슷한 작품입니다. 다만 핸디맨이 주인공 노라가 범인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며 겪는 공포를 강조했다면, ‘깜빡이는 소녀들은 자신 안의 불안감과 싸워가며 직접 범인을 잡으려는 클로이의 분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연쇄살인마로 밝혀진 충격이 가장 컸지만 아버지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직접 발견하고 제 손으로 경찰에 넘겼던 일은 클로이의 트라우마를 더욱 깊고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비난과 호기심보다 클로이를 괴롭힌 건 죄책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인마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어쩌면 자신이 희생된 소녀들을 아버지에게 인도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후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어린 클로이에게 들러붙은 뒤 그녀로 하여금 세상을 경계하고 의심하게 만든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불법 처방한 약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직접 조사해야만 안심할 수 있는 불행한 습관도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아버지의 모방범은 클로이의 삶을 순식간에 패닉에 빠뜨렸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녀의 의심은 20년 전 과거 속 인물은 물론 현재 자기 주변의 인물들에게까지 미치는데, 어느 날 손에 넣게 된 결정적인 증거로 인해 클로이는 극도의 공포에 빠지고 맙니다.

 

연쇄살인마 아버지와 딸이라는 공식은 더는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 깜빡이는 소녀들은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흥미로운 구성, 과거와 현재의 클로이의 속내를 집요하고 디테일하게 그려낸 심리묘사, 여러 번 감탄을 자아내는 맛깔난 표현과 문장들, “이 지독하게 훌륭한 데뷔작에서는 누구도 믿지 마라는 피터 스완슨의 평가처럼 모두가 범인 같지만 누구도 범인 같지 않은 미스터리, 그리고 거의 마지막 장까지 거듭되는 반전 등 매력적인 요소가 다양해서 소재의 진부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작품입니다.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중반부에 심리스릴러 서사가 전개되면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5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 가운데 그 대목에서 딱 50페이지 정도만 슬림해졌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거란 생각입니다.

 

데뷔작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 높은 스릴러를 선보인 스테이시 윌링햄은 이미 세 번째 작품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후속작들이 한국에도 소개될지 알 수 없지만 깜빡이는 소녀들이 좋은 평가와 성과를 얻는다면 충분히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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