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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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노모,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아내, 제멋대로인 중3 아들과 함께 사는 40대 가장 아키오는 퇴근 직후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마당 한쪽에 어린 소녀의 사체가 비닐에 덮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들의 소행이란 사실을 아내에게 듣곤 망연자실해집니다.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아내는 아들을 살인범으로 만들 수 없다며 목에 가위를 들이대면서까지 반대합니다. 결국 아키오는 소녀의 시신을 유기하지만 다음날부터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아키오와 아내는 끝내 아들의 살인을 은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경찰을 속이기 위해 누구도 떠올리기 어려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붉은 손가락가가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지만 시리즈 가운데 한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 2006년에 출간된 작품이 바로 다음 해 한국에 나왔으니 출판사가 최신간을 먼저 소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때까지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고 매력적인 작품이라 먼저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가정이라는 밀실과 가족애라는 굴레’, 그 어두운 초상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붉은 손가락은 어린 소녀가 살해된 사건을 통해 평범해 보이던 한 가족의 민낯과 고통,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그립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던 아키오의 가족은 중3 아들이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인해 벼랑 끝에 몰립니다. 이성과 상식이 남아있었다면 순리대로 처리했겠지만 부모의 그릇된 선택은 그나마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던 가족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현대화에 따른 가족의 해체, 고령화 사회의 노인 문제, 청소년 범죄 등 폭넓고 다양한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는 옮긴이의 말대로 붉은 손가락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아키오의 가족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힌트를 바탕으로 범행에 쓰인 도구와 방법을 밝혀내는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 가가는 탐문과정에서 느낀 위화감과 잠깐 목격했을 뿐인 평범한 풍경 때문에 아키오의 가족에 주목합니다. 대단한 추리나 번득이는 혜안이나 천재적인 직감이 아니라 그야말로 관찰력의 힘만으로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간다는 뜻인데,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 붉은 손가락에선 그 능력이 진짜 형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덕목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특성상 기계적으로 범인을 지목하기보다는 스스로 죄를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인상적인 태도를 취해서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듭니다.

 

사건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가가의 가족사입니다. 관할서 형사인 가가의 파트너가 된 경시청 수사1과의 마쓰미야 슈헤이는 가가의 외사촌동생입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자라면서 외삼촌, 즉 가가의 아버지 다카마사에게 큰 도움을 받은 마쓰미야는 그를 존경한 나머지 경찰까지 됐고, 현재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그를 극진히 간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가가가 아버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자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수사 도중에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가가의 불행한 가족사, 특히 어머니의 가출과 불행한 죽음을 알게 된 뒤론 다카마사를 향한 가가의 감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 마쓰미야는 가가와 함께 가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살인사건 수사를 벌입니다.)

 

살인사건에 휘말린 붕괴 직전의 아키오의 가족과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힌 나머지 뿔뿔이 흩어지고 만 가가 가족의 이야기는 미스터리 못잖게 독자에게 묵직한 인상을 남깁니다. 따뜻한 인성을 품었지만 냉철한 형사이기도 한 가가가 평소와 다른 태도로 사건에 임한 건 아마도 산산조각 난 아키오 가족에게서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가가는 네리마 경찰서를 떠나 니혼바시 경찰서에 몸담습니다. 그 첫 이야기가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인 신참자인데, 역시 붉은 손가락못잖게 매력적인 작품이라 오랜만에 다시 읽을 생각만으로도 기대감에 들뜨게 됩니다. 물론 가가 형사 시리즈가 이제 세 편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그만큼 커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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