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탑의 라푼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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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공업과 유흥의 도시로 성장했지만 빈곤과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위험하고 더러운 곳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된 다마가와남부. 아동상담소의 마쓰모토 유이치는 아동가정 지원센터의 마에조노 시호와 함께 문제 있는 가정들을 방문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성실한 공무원입니다. 유이치와 시호가 특히 주목한 건 6살 아들 소타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시이 집안. 한편 화려한 전망탑 아래 폐창고가 늘어선 부둣가의 빈촌에는 언젠가 이곳을 떠날 결심을 한 필리피노카이,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는 재일한국인야스나리, 그리고 어려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해온 나기사 등 18살 청춘들이 막장 같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들 앞에 말문을 닫아버린 어린 소년 하레가 나타납니다.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된 단편집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와 개인적으로 ‘2020년 미스터리&스릴러 베스트 11’으로 꼽은 어리석은 자의 독등 앞서 만난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들은 모두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겨줬습니다. 덕분에 그녀의 신작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는데, 독특하고 깊이 있는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인지 신작의 제목과 표지를 보곤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다만 아이들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라는 홍보카피 때문에 피해자가 어린이인 음울한 미스터리가 아닐까 예상했는데, 결과부터 말하면 그 예상은 절반쯤만 들어맞았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전개됩니다. 우선, 학대받는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가정 내에서 해결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가진 아동상담소 공무원 유이치와 사회가 좀더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가정에 개입해야 되며 필요하다면 아이와 부모를 분리하는 게 최선책이라 믿는 시호가 서로의 생각 차이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여러 케이스의 아동학대사건을 다룹니다. 학대, 방치, 성폭력 등 다양한 케이스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6살 소년 이시이 소타의 학대와 방치가 유이치와 시호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도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전망탑 인근에 사는 18살 청춘들의 이야기는 더욱 암울합니다.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낸 다마가와시의 10대들에게 밝고 희망찬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여전히 개망나니 같고, 또래들은 일찌감치 잔인한 먹이사슬 구조에 편입될 수밖에 없으며, 다마가와시를 떠나지 않는 한 내일은 오늘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암담함 그 자체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성노예로 살아온 나기사가 전망탑을 바라보며 동화 속 라푼젤의 구원만을 고대하는 모습은 그저 안타깝고 서글플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임 때문에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30대 부부 이쿠미와 게이고의 삶이 그려지는데, 특히 어떻게든 아이를 낳고 싶어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이쿠미가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이웃의 부모를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되긴 했지만 전망탑의 라푼젤은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르포 혹은 그 와중에도 사소한 관심에서 구원이 탄생할 수 있다. 좌절과 절망뿐인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야말로 인간의 삶을 기적으로 이끄는 첫걸음이다.”라는 주제를 앞세운 휴먼 드라마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 이야기가 한줄기로 엮이는 대목은 미스터리 못잖은 반전과 트릭을 선보이긴 하지만 역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희망 가득한 메시지로 읽힙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전망탑의 라푼젤 따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구원과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누구나 쉽게 써내려갈 수 있겠지만, 우사미 마코토는 서로 다른 결의 세 개의 이야기와 절묘한 트릭과 막판 반전을 통해 그저 막연하고 현실감 없는 희망 판타지가 아니라 더욱 더 설득력 있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자아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앞으로도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들을 계속 출간할 예정이라는데, 독특한 서사와 깊이 있는 이야기에 빠진 저로서는 그녀의 신작 소식을 늘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자의 독과 같은 특별한 미스터리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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