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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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속의 미녀공연을 코앞에 둔 명문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연이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발레리나 하루코는 사무실에 난입한 정체불명의 남자를 죽인 뒤 정당방위를 주장하지만 경찰에 체포됐고, 이어 발레단의 중추적 인물이 연습 도중 살해되는가 하면, 독살 미수 사건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까지 연달아 일어납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가가는 선임파트너인 오타와 함께 관할서 수사에 파견돼 수사에 나서지만 각각의 사건들이 연관돼있긴 한 건지, 동일범에 의한 소행인지조차 쉽사리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습니다. 수사가 난항을 거듭하는 와중에 가가는 발레리나 아사오카 미오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 시작합니다.

 

잠자는 숲가가 형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 첫 작품인 졸업에서 20대 초중반의 대학졸업반이었던 가가는 이 작품에서 30세 전후로 등장합니다. 대학졸업 후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는 본인의 짧은 설명 외에 그 사이 가가의 행적이 그려지진 않았지만 이른 나이에 경시청 수사1과에 소속된 걸 보면 경찰로서도 유능한 경력을 쌓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명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따온 제목 잠자는 숲은 폐쇄적이고 엄격한 발레단의 속성과 발레인들의 삶을 대변합니다. 외부인들 눈에 화려하고 부유한 이미지로 각인된 발레는 실은 혹독한 훈련과 필사적인 자기관리를 요구하면서도 (일부 톱클래스를 제외하곤) 경제적인 여유와는 거리가 먼 배고프고 힘든 예술입니다. 더불어 비중 있는 역할을 따내기 위해 단원들 간에 필사적으로 경쟁하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호흡을 이뤄내기 위한 결속력도 필요하기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미녀가 갇힌 잠자는 숲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폐쇄적이고 엄격한 분위기가 감도는 발레단에서 벌어진 연이은 사건은 초반부터 경찰의 수사를 난관에 빠뜨립니다. 피해자의 신분 파악부터 벽에 부딪힌 첫 살인, 알리바이 파악 자체가 불가능한 극장 한복판의 살인, 의도가 모호한 독살사건에 유력 용의자의 의문의 자살 등 무엇 하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러 사건들 사이에 접점이 있는지 자체가 불확실한데다 어느 하나 범행동기가 불명확하다는 사실은 가가에게 있어 가장 곤혹스러운 점입니다.

 

발레단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만큼 다양한 트릭도 쉴 새 없이 등장해서 안 그래도 길지 않은 분량을 순식간에 읽게 만드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마력이 더없이 발휘된 작품입니다. 더구나 미스터리 못잖게 가가와 발레리나 미오 사이의 로맨스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그래서인지 역자 후기에 따르면 “‘잠자는 숲(가가 형사 시리즈 중) 가장 로맨틱한 추리소설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읽은 지도 2년이 넘어서 가가에게 아내 혹은 연인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잠자는 숲에서 만난 미오가 이후 가가와 어떤 인연을 이어나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은 충격적인 반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발레의 이면과 그것이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어놓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통쾌함이나 시원함 대신 씁쓸함과 애틋함을 진하게 남겨놓습니다. 개인적으로 가가 형사 시리즈중 가장 좋아하는 붉은 손가락도 이와 비슷한 인상을 남긴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고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장르를 불문하고 베스트로 꼽는 작품 대부분이 닮은꼴의 엔딩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가 형사 다시 읽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점도 바로 이런 씁쓸함과 애틋함이었는데 남은 작품들에서도 그런 엔딩들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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