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페어
하타 타케히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일본에서 2004년에 출간된 이 작품의 원제는 추리소설입니다.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제목인데, 하나는 연쇄살인범이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앞으로 저지를 살인을 소재로 집필한 소설 속 소설의 제목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기존 추리소설의 덕목에 대한 반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지어진 제목이란 점입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마치 무차별 살인처럼 보이는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유일한 단서라곤 불공정한 것은, 누구인가?”라는 선문답 같은 문장이 적힌 책갈피가 전부라 경찰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중 추리소설 이라는 제목의 원고와 함께 그 원고를 3,000만 엔 이상의 가격에 낙찰시키지 않으면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범인의 예고장이 날아듭니다. 터무니없는 요구에 대해 범인에게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의견과 살인을 막기 위해 거래를 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 충돌하지만 그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진 못합니다. 수사에 나선 경시청의 유키히라 나츠미는 대담하거나 냉정하거나 기상천외한 의견을 내놓으며 자신만의 감으로 수사를 진행합니다.

 

정리된 줄거리만 보면 언뜻 혼다 데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와 닮은꼴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읽기 전에 주인공 유키히라 나츠미의 캐릭터 소개글을 보곤 단번에 히메카와 레이코가 떠올라 남다른 기대를 하기도 했는데, 실은 언페어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와는 거리가 아주 먼 독특한 작품입니다. 물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쫓는 주인공 형사가 등장하므로 형식적으로는 미스터리, 즉 제목대로 추리소설로 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에서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와 페어플레이라고 하는, 판에 박힌 평어(評語) 자체의 어눌함에 들이대는 풍자의 칼날”(p317)이라는 해설처럼 이 작품은 추리소설을 이용하여 기존의 추리소설의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가령, “사건은 반드시 해결된다.”, “범인은 반드시 밝혀진다.”, “초반에 등장하는 수상한 인물은 항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기호거나 제2, 3의 피살자로 이미 정해져 있다.” 등 미스터리의 기본 공식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독자들은 보수적이라 항상 공정할 것을 요구한다. 공정하게 웃겨라. 공정하게 놀라게 하라.”, “대반전은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자는 말한다.”라며 불공정하거나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하는 독자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모두 범인의 것입니다. 일반적인 소시오패스가 광기와 사념에 사로잡혀있다면 이 작품의 범인은 리얼리티불공정에 집착하는 소시오패스라고 할까요? 동기, 범행, 협박, 살인예고 등 모든 과정에서 기존 미스터리 속 범인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범인은 그런 범행이야말로 진짜 리얼리티이며 독창적이고 공정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해진 공식대로, 독자가 원하는 대로 전개될 뿐인 미스터리는 전부 개나 주라는 듯이 말입니다.

범인의 행적이 이러하니 경시청 검거율 1위 유키히라 나츠미도 도무지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은 기존 미스터리와 반대로 공정한 게임을 위해 의도적으로 단서를 흘려놓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쉽게 눈치 챌 수 없는 고난이도의 단서였고, 유키히라 나츠미는 마지막 살인극을 앞두고 가까스로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읽기가 무척 불편합니다. 수시로 화자가 바뀌고, 시간적 배경도 아무 설명 없이 툭툭 뒤바뀝니다. 시나리오 지문 같은 단편적인 문장이 자주 등장하고, 앞뒤 상황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장면들도 수시로 눈에 띕니다. 그나마 필요한 대목에서 글씨체라도 바꿔준 건 최소한의 친절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불편함은 범인 친화적인(?) 이야기를 위한 의도적인 설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존의 추리소설 공식에 대입할 수도, 그 공식으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범인의 기이한 행동과 사고를 은연중에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설계라는 것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가장 기대한 건 주인공 유키히라 나츠미의 캐릭터였습니다. ‘쓸데없이 미인이란 별명에다 경시청 검거율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지만 동시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여형사. 그런데 워커홀릭에 냉정한 독설가에다,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취하기만 하면 알몸으로 잠든 채 전화마저 받지 않아 후배 남자형사에게 곤혹스러운 인간 알람을 떠맡기곤 하는 괴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아마 기존의 전형적인 추리소설이었다면 무척이나 눈길을 끌었을 인물인데 하필 범인이 워낙 튀는 캐릭터라 오히려 소외당한 주인공이 된 느낌입니다.

다행히도 이 작품의 후속작인 여형사 유키히라의 살인 보고서’(북스토리, 2010)가 출간돼있어서 기회가 되면 찾아보려고 하는데, 부디 유키히라의 매력적인 면모가 부각된, 아주 일반적이고 뻔한추리소설이기를 바랄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