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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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대가 중 한 명이지만 한국에 소개된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은 여섯 편에 불과합니다. 데뷔작인 문신살인사건’(1948)이 패전 직후의 혼란을 배경으로 고전 트릭과 함께 주술적인 문신의 세계를 다뤘다면, ‘대낮의 사각’(1960)은 천재적인 경제 사기범을 그린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였고, 그 외에 파계재판’(1961), ‘유괴’(1961), ‘법정의 마녀’(1965)로 이어지는 이른바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는 법정물에 본격 미스터리가 가미된 작품들입니다.

아직 못 읽은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명탐정 가미즈 교스케 시리즈중 유일하게 한국에 소개된 작품인데, 제목이나 주인공 캐릭터로 보아 본격 미스터리 계열로 추정됩니다. 1950~6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작가라 마니아 외에는 그다지 어필하기 어렵지만 방대한 그의 작품 수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고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유괴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중 한 작품이지만 정작 주인공 햐쿠타니가 등장하는 분량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카메오처럼 초반에 잠깐 등장했다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후반부 막판에야 제대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비중과 분량을 차지하는 건 진범인 의 범행 과정과 그를 쫓는 경찰들의 고된 수사기록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와 경찰소설의 향기는 물론 논픽션 혹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색깔까지 깃들어있는데, 그런 면에서 다양한 장르들이 믹스된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범인 는 희대의 아동 유괴살인사건 재판을 지켜보면서 자신만의 유괴범행 계획을 면밀히 수립합니다. 범행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퇴로는 어떻게 확보해야 할지를 재판을 통해 꼼꼼하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운까지 따라준 덕분에 의 범죄는 완벽하게 실행되고 경찰은 엉뚱한 곳만 조사하며 허송세월을 보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면서 변호사 햐쿠타니가 개입하게 됩니다. 놀라울 정도의 직감과 추진력을 지닌 그의 아내 아키코는 전대미문의 범인추격전을 제안하는데, 과연 베일에 싸인 범인이 그 추격전의 그물망에 걸려들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요즘 독자의 눈높이로 보면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조금은 답답할 정도의 느린 전개가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진범인 의 범행계획은 꼼꼼하긴 해도 다소 어수룩해 보였고, 경찰의 탐문과 범인 추격은 일지를 기록한 듯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유괴된 아동의 가족들 사이에 벌어지는 추하고 탐욕스런 이전투구 역시 관찰 기록처럼 자세히 묘사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디테일이야말로 고전의 맛과 매력중 한 가지라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막판에 등장한 주인공 햐쿠타니와 그의 아내 여전사아키코가 이끌어내는 급격하고 놀라운 반전의 효과는 분명 거북이걸음마냥 차곡차곡 쌓여온 미스터리 서사 덕분인데, 성격 급한 독자라 하더라도 초중반의 지루함과 느슨함을 잘 견뎌낸다면 고전 미스터리의 흥미로운 매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색해보니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는 모두 여덟 편이 출간된 걸로 나옵니다. 한국에는 단 세 편만 출간됐는데 2017법정의 마녀’(엘릭시르) 이후 4년이나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큰 기대를 하긴 어렵지만 (검은숲의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2015년에 개정판 형태로 출간된 문신 살인사건이후 통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한두 편 정도는 더 소개되지 않을까, 가망은 별로 없지만 나름 간절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현대 미스터리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투박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 고전이 때때로 그리워지는 건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누구나 갖는 로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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