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된 여자 케이스릴러
김영주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확인한 날, 수완은 무대에 오를 날만 고대하며 버텨오던 극단에서 잘린 것은 물론 남자친구에게 전셋집 보증금을 사기 당한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수완 앞에 재벌가 며느리 경진이 나타나 놀라운 제안을 한다. “다시 행복하게 살게 해 줄게요. 대신 죽은 내 여동생 남경으로 살아줘요.”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수완은 남경으로 변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수완은 곧 경진의 요구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경진의 계획. 수완은 이 연극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버리고 다른 누군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자주 이용되던 설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독자(혹은 관객)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거짓 가면을 쓴 채 유유히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행보도 흥미롭고, 언제 그 가면이 벗겨질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스릴 넘치는 긴장감도 좀처럼 외면하기 힘든 관심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만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좀 심하게 말하면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때문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서 자세한 내용 언급이 어렵다 보니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겐 다소 두루뭉술한 서평이 될 수 있습니다.)

 

수완이 잠시의 갈등과 저항 끝에 경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초반부까지만 해도 과연 언제까지 수완이 거짓 가면을 쓰고 남경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가 이 작품의 기둥 이야기로 보였고, 덕분에 기대감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남경은 이미 죽은 인물이라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짠~ 하고 나타날 일도 없으니 수완의 새 인생은 그만큼 더 강렬하고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수완이 미처 새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야기는 전혀 다른 톤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중반부터 경진과 그녀의 남편을 둘러싼 (현재와 과거에 걸친) 불륜, 욕망, 시기, 질투가 전면에 포진되더니 이내 살인과 납치 등 서스펜스 스릴러가 이야기를 지배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수완 대신 경진이 주연 자리를 차지하면서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의 이야기라는 당초의 설정을 무색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까지 갖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결여되거나 안이하게 설정된 대목과 인물들이 너무 많았고 그저 이야기를 크고, 세고, 독하게 확대시키는 데만 열중한 듯한 작가의 과욕이 여러 차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에게 가짜 인생을 부여해놓곤 정작 중요한 사건은 그와는 별로 연관 없는 딴 이야기로 몰아간 느낌이랄까요? 앞서 언급한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라는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작품의 결정적인 출발점은 왜 경진은 수완을 콕 찝어 죽은 동생 역할을 하게 만들었나?”인데, 너무 빨리 읽었거나 명백히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수완이 남경과 닮았기 때문에? 단지 비슷한 또래라서?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떠오르는 동기도 없습니다. 중반 이후 경진이 가장 집착한 부분은 수완의 임신혹은 눈엣가시 같은 자들을 제거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하려는 욕망인데, 이 두 가지 모두 왜 남경의 대체인물이 필요했는가? 또 그것이 반드시 수완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경진이 필요에 의해 수완을 이용했다.”라고 묘사하는데, 필요가 뭔지는 지금도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매력적인 출발을 보인 초반부 전개와 수완의 캐릭터에 비해 엉뚱한 방향으로 확장돼버린 뜬금없는 서스펜스 스릴러는 너무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만만치 않아 보인 작가의 필력 때문에 아쉬움이 배가된 게 사실인데, 이야기의 볼륨감을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듯한 크고, 세고, 독한 설정들대신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에게 집중한 간결하고 선명한 설계에 충실했더라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제 나름의 확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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