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죄자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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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인 1990, C시에서 끔찍하고 엽기적인 연쇄 강간 토막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네 명의 피해자의 신체를 훼손한 뒤 검은 비닐에 담아 시내 곳곳에 유기했습니다. 경찰 상부는 물론 언론과 여론의 압박에 시달리던 수사팀은 악전고투 끝에 범인을 체포했지만 범인은 법정에서 내내 무죄를 주장했고 수사팀 내에서도 진범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온 탓에 사형집행이 이뤄진 뒤에도 사건은 여러 사람의 뇌리 속에 불쾌한 앙금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현재, 당시 수사팀 중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했던 인물을 비롯하여 평생을 복수심으로 살아온 피해자의 유족, 우연히 진실 찾기에 가세한 법대생 등 여러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분투를 시작합니다.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그에 걸맞은 묵직한 서사가 담긴 레이미의 작품입니다. 레이미는 천재적 프로파일러 팡무가 활약하는 심리죄 시리즈두 편으로 만난 적 있는데, 엽기적인 범죄, 복잡다단한 구성, 매력적인 프로파일링 등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 작가라서 (‘심리죄 시리즈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 순죄자의 출간소식이 무척 반갑게 들렸습니다.

 

요약하면, 23년 전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는 자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자들, 그리고 진범이 벌이는 ‘3각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건도 사건이지만 진실 찾기를 둘러싼 각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함께 지독하기 짝이 없는 운명의 장난 같은 게 더 짙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원죄(冤罪), 증오, 후회, 복수 등 23년이 지났어도 조금도 변치 않은 각 인물들의 감정은 뒤늦게 발동이 걸린 진실 찾기과정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비난을 무릅쓰고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들과 등을 돌리고 만 두청, 뒤늦게 진범의 정체를 알고도 자신과 동료들의 파멸이 두려워 진실을 은폐한 뤄사오화, 압박에 시달리던 끝에 신빙성 없는 증거에 눈이 뒤집혀 억울한 자를 사형대로 보낸 마졘 등 톄둥 분국 소속인 세 명의 경찰이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됩니다.

이제 편안한 삶을 바랄 수 있는 60대에 이르러 옛 사건 때문에 다시 충돌한 이들의 애증은 조사가 진척될수록 23년 전보다 더 깊고 싸늘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데, 어느 쪽이 정의인지는 명백해도 정의롭지 못한 자들의 딜레마도 충분히 이해되는 설정이어서 독자는 이들 사이의 무저갱 같은 운명에 긴장감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두청을 비롯한 경찰들의 진실 찾기가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아내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 사고까지 당해 평생 양로원에 갇혀온 지쳰쿤과 봉사활동을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법대생 커플 웨이중, 웨샤오후이가 이끌어갑니다. 두청과 마찬가지로 진범이 따로 있다고 확신했던 지쳰쿤은 양로원에서 무력한 삶을 살던 중 웨이중, 웨샤오후이 덕분에 삶의 의지를 되찾곤 아내를 살해한 진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관계자들 대부분이 60대라서 독자들에게 더 주목을 받게 되는 젊은 두 주인공은 당초 관찰자 입장에서 23년 전 사건을 접하게 되지만, 점차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데 평범한 법대생 웨이중이 지쳰쿤을 돕는 과정에서 진실과 정의를 깨달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도, 무슨 이유에선지 웨이중 못잖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웨샤오후이의 비극적인 사연도 경찰 쪽 이야기나 엽기적인 사건 못잖게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고백하자면, 읽기 전에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때문에 주저했던 게 사실이고, 읽기 시작한 뒤론 다소 지루하고 동어반복적인 초반 상황들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각자의 목표를 확실히 정립하는 대목이 꽤 늦게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론 대략 100페이지 정도만 정리됐다면 긴장감과 속도감이 배가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작가가 왜 초반에 지루할 만큼 기초공사를 거듭 다졌는지 알게 되지만, 초반의 느슨함은 자칫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기도 전에 질리게 만들 여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내용은 물론 분위기조차 공개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과한 우연들(인물들 간의 관계라든가 사건 모두)과 막판의 억지스럽고 공감하기 어려운 마무리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찬호께이의 ‘13.67’에 버금가는 묵직한 작품이지만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순죄자심리죄 시리즈보다 매력적으로 읽힌 작품입니다. ‘심리죄 시리즈가 사건의 엽기성과 천재 프로파일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라면, ‘순죄자는 그에 덧붙여 무겁고 비극적인 감정들을 충실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심리죄 시리즈도 기대하고 있지만 레이미의 또 다른 작품들 역시 한국에 좀더 많이, 자주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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