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오랫동안 욕심만 부려왔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가능하면 출간순서대로 읽고 싶지만 연재물인 경우가 많은데다 개정된 작품도 많았고

여기저기 찾아보는 자료마다 출간연도가 제각각이거나 아예 표기 안 된 경우도 적잖은 탓에

일단 임의로 제가 정한 순서대로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이 작품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 작품인 1946년 작 혼진 살인사건을 표제작으로

모두 두 편의 중편과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입니다.

고백하자면 표제작 혼진 살인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편은 읽는 내내

십여 년 전에 읽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전혀 기억이 안 나나?”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읽은 건 2003년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혼징 살인사건이었고,

그 작품에 실린 건 표제작 혼징 살인사건나비부인 살인사건으로

수록작 자체가 이번에 읽은 시공사의 혼진 살인사건과는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참고로 나비부인 살인사건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아닌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혼진 살인사건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 작품이란 기념비적인 위상과 함께

이후 이어지는 시리즈의 전반적인 특징들이 골고루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근대화의 물결과 봉건시대 잔재의 충돌이 몰고 온 비극적인 사건 설정,

어수룩해 보이지만 뛰어난 추리력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긴다이치의 매력,

그리고 그 시대의 미스터리를 풍미했던 각종 고전 트릭의 향연 등이 그것입니다.

오랜 역사와 명망을 지닌 여관 혼진을 지켜온 이치야나기 가문을 몰아친 참혹한 살인사건은

기괴함과 함께 이해 불가능한 밀실트릭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지만

피해자 유족과의 인연으로 사건에 뛰어든 긴다이치 덕분에 그 전말이 드러납니다.

 

이보다 뒤늦게 집필된 또 다른 수록작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흑묘정 사건

패전 이후 충격과 혼란에 빠진 일본 사회의 단면과 함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욕망과 의심과 증오에 빠진 개인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입니다.

20여 년 전 시작된 두 가문의 갈등과 대립이 낳은 참극을 그린 도르래 우물은 왜~’

긴다이치가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시리즈의 개성과 매력이 여전히 잘 살아있는 작품이고,

패전 후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악연 관계인 남녀의 비극을 다룬 흑묘정 사건

언제나처럼 뒤늦게 나타나고도 특유의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하는 긴다이치가

범인이 정교하게 설계한 복잡한 트릭을 보기 좋게 해결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작품에서 긴다이치의 추리는 독자로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비약적입니다.

긴다이치가 무심코 지나쳤거나 바라봤던 사소한 것들이 정교한 추리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때론 결과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과정 자체가 실종된 깜짝 결론에 이르기도 해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는 이런 특징은 시리즈의 대부분 작품에서 목격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설정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애정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긴다이치의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벅머리에 초라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옷차림과 흥분하면 말까지 더듬는 그는

언제나 뒤늦게 현장에 투입되고도 사건이나 수사 관련자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만드는데,

그 친밀감은 독자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듯 해보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가 내놓는 결과물은 유능하긴 해도 거만하고 재수 없는 명탐정의 성과라기보다는

겸손한 노력형 탐정이 근면하게 일궈낸 가치 있는 결론처럼 보이곤 합니다.

비약적 추리의 대명사인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기요시와는 사뭇 대조적이라고 할까요?

 

다만, 긴다이치의 비범한 능력과 비약적 추리는 독자에 따라 거부감을 느낄 여지가 많고

‘20세기 중반에 태어난 올드하고 아날로그적인 이야기의 한계와 함께

독자의 흥미를 반감시킬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애정하는 시리즈의 첫 편임에도 무난함을 뜻하는 별 4개에 그친 건 이런 이유 때문인데

아마도 앞으로 다시 읽을 작품 가운데 적잖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읽은 적이 있었음에도 마치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놀라웠던 사실은

미국 유학, 경미한 마약중독, 귀국 후 갑작스런 탐정으로의 변신 등 긴다이치의 이력이었는데

과거가 불분명한 모호한 인물이거나 혹은 평범한 소시민 출신 탐정이라고만 여겼던 탓인지

새삼 긴다이치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 흥미로운 사실들이었습니다.

또 긴다이치와의 교류를 통해 그가 다룬 사건을 소설로 옮기는 역할을 맡은 추리소설가 Y’

실은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 본인을 투영한 점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역시 재미있게 읽혔고

두 사람이 처음 맞대면 하는 장면은 마치 프리퀄을 읽는 듯한 신기함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다시 읽기를 이어가는 동안 이런 소소한 재미들을 재발견하게 될 것 같은데,

짧게는 7, 길게는 13~14년 만에 다시 만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참맛을 만끽하려면

어쩌면 모든 게 다 새롭게 보이기만 하는 부족한 기억력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었지만 기억 안 남순서대로 시리즈 다시 읽기의 가장 큰 동력이자 매력이라면 너무 억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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