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없는 검사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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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지만 단기간에 너무 많은 작품을 읽은 탓에 조금은 피로감이 느껴진 나머지 한동안은 멀리 해야겠다고 여긴 게 나카야마 시치리였습니다. 5월 초쯤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4악덕의 윤무곡을 읽은 뒤의 결심이었는데, 그 결심은 채 두 달도 안 돼 비웃는 숙녀 시리즈덕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표정 없는 검사는 애초 그에 대한 피로감 같은 게 왜 들었던 건지 의심될 정도로 나카야마 시치리에게 중독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인 能面檢事能面’(노멘)은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뜻하지만 동시에 표정 없는 얼굴을 가리키는 비유어이기도 합니다. 일본 여행 때 박물관이나 지역 문화관에서 본 能面은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해 보였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검사 후와 슌타로는 바로 이런 얼굴로 24시간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오사카 지검의 에이스이자 30대 후반의 1급 검사인 후와 슌타로는 그 상대가 피의자든 피해자든 동료 검사나 경찰이든 심지어 까마득한 상관이든 관계없이 늘 얼음장 같은 표정 없는 얼굴과 그에 딱 어울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합니다.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로는 결코 검사의 직무를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게 이유인데, 문제는 얼굴뿐 아니라 태도 자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싸늘한 기계에 가까운 탓에 에이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경찰 곳곳에 무수한 적들을 만들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타고난 반골 기질이란 뜻은 아닙니다. 애초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은 누군가를 향한 저항의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독립된 사법기관인 검사로서의 그의 업무수행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후와 슌타로에게 얼굴 자체가 리트머스 시험지같은 신참 여성사무관이 배속됩니다. 장래 검사를 꿈꾸는 소료 미하루는 후와와는 180도 다른 인물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전에 뭘 했는지, 어떤 상대를 만났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주 인간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탓에 후와에게 첫날부터 그만두라는 소리까지 들은 미하루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지만 실제로 후와와 함께 행동하면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큰 충격에 빠지곤 합니다. 표정 하나 없이 조금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화법을 태연히 구사하는가 하면, 웃지도 화내지도 동요하지도 않는 일관된 리액션엔 그저 기가 찰 따름입니다.

 

완전무결체 사법기계가 오사카 경찰청을 폭격하다!”라는 홍보카피대로 시리즈 첫 편의 데뷔 무대에서 후와의 주 공격대상은 오사카 경찰청입니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살인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가 잘못된 것을 포착한 후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사카 경찰청이 오랫동안 은폐해온 치명적인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경찰은 물론 검찰 내부에서까지 지탄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후와는 그에 아랑곳 않고 거침없는 행보와 함께 살인사건의 진실 찾기에 몰두합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미하루의 심장은 하루하루 위태롭게 쪼그라들 뿐이지만, 때론 반발하고 때론 공감하며 조금씩 후와의 진심과 검사가 가야할 길을 배우기도 합니다. 물론 사무관은 뇌(검사)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팔다리나 그림자일 뿐이라는 후와의 차갑고 가차 없는 독설엔 여전히 격분하면서도 말입니다.

 

표정 없는 기계 같은 검사라는 캐릭터 못잖게 현장을 뛰는 검사라는 점도 무척 매력적인데 후와의 행보는 사실 검사라기보다는 경찰이나 형사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경찰의 수사자료를 검토하여 기소 여부를 결정하거나 법정에서 변호사와 다투는 것보다는 사건 현장을 일일이 탐문하며 직접 정보를 얻고 추리를 하는 일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현장 스타일은 장르물 속 검사에게선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캐릭터라 앞으로도 그의 위험천만한 활약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검찰과 경찰을 둘러싼 시끄러운 말들이 많이 나오는 와중이라 이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조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검찰과 경찰의 태도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꽤 클 것 같습니다. 동시에, 후와 슌타로라는 검사가 분명 픽션 속 판타지 캐릭터이긴 하지만 현실 속에 저런 검사가 한 명쯤 있다면 참 좋겠다는, 허황된(?)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후속작인 표정 없는 검사의 분투가 연재를 마쳤다고 합니다. 빠르면 2021년엔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벌써부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다려집니다. ,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생각만 해도 기대감에 들뜨게 만드는 뉴스가 있는데, 그건 바로 표정 없는 검사후와 슌타로와 악덕 변호사미코시바 레이지가 언젠가 한 번 제대로 맞붙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입니다. 서평엔 언급 안 했지만 후와 슌타로에겐 표정을 없애야만 했던 비극적인 과거가 있습니다. 어릴 적 참혹한 토막 살인을 저질렀던 악덕 변호사미코시바 레이지와 마찬가지로 후와에게도 속죄라는 큰 화두가 인생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속죄라는 접점을 가진 두 괴물이 만난다면 그야말로 불꽃 정도가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데 나카야마 시치리가 과연 어떤 사건으로 그들을 만나게 할지, 또 그들의 진검승부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엄청 기대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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