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은 여자의 일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김도일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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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기미코와의 만남은 2011년 출간된 변호 측 증인이후 오랜만의 일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지만 당시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뒤 구매를 고려했던 걸 기억하는데

무척 흥미롭고 새로운 설정의 이야기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1934년생이며 1985년에 이미 작고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 역시 1973~1982년의 작품들을 모아 1984년에 출간됐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고전까지는 아니어도 세미 고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제작 살인은 여자의 일8편 가운데 첫 번째로 수록된 작품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목 자체가 나머지 작품들의 성향을 잘 대변하고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여자의 살의 또는 욕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죽음 또는 살인이 끼어드는데,

한두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 어둡고 무겁고 비극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서

5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호감을 느낀 남자의 천박한아내에게 강한 시기심과 살의를 느끼는 베테랑 여자 편집자,

한때 동거했던 남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낡은 아파트에 사는 50살 목전의 전직 매춘부,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남편과의 불륜을 자랑하는 유한부인에게 살의를 품는 평범한 주부 등

그야말로 부적절한 욕망으로 똘똘 뭉친 여성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지식한 남편 몰래 1년에 한두 번 하룻밤의 화려한 외도를 저지르는 여자,

딸에 이어 손녀까지 똑같은 운명에 빠지자 기가 막힐 뿐인 노파,

도둑질하던 자신을 체포한 보안요원에게 연정을 품은 끝에 새 출발을 결심하는 여자 등

이런저런 특별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집필 시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나 사건 모두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드는데

빠르고 복잡한 이야기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기교나 작위적인 설정 없이 돌직구처럼 살의와 욕망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말초적 흥미만 노리는 듯한 요즘의 일부 작품들보다 훨씬 더 품격 있어 보입니다.

 

책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다가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P.D. 제임스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번역을 고이즈미 기미코가 맡았다는 점인데,

어쩌면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인 탐정을 그린 작품을 번역하던 그녀가

역설적이게도 살인은 여자의 일이라는 제목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찾아보니 고이즈미 기미코의 작품은 모두 세 작품뿐입니다.

변호 측 증인과 이 작품 외에 여러 작가가 참여한 기묘한 신혼여행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10년도 전에 읽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새삼 고이즈미 기미코가 집필한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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