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달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4호텔 로열로 사쿠라기 시노를 처음 만난 이후

유리갈대’(2016), ‘빙평선’(2018) 2년마다 한 편씩 그녀의 작품을 읽어왔는데,

올해는 욕심을 좀 내서 빙평선에 이어 2015년에 출간된 굽이치는 달까지 읽게 됐습니다.

 

모두 6편의 단편이 연작 형태로 수록된 작품집인데,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의 주 무대는 훗카이도 동부의 작은 항구도시 구시로입니다.

작가 본인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한 구시로는 무척 특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곳입니다.

넓은 습원(濕原)이 자리 잡은 탓에 신비함, 스산함, 애틋함이 녹아있는 것 같고

마치 안개 속의 풍경처럼 아스라한 느낌까지 주는 곳입니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해무 때문에 도시 전체가 갯내에 휘감겨 있었다.”

빙평선의 수록작 중 한 편에서 언급된 구시로에 대한 압축적인 묘사인데,

이런 분위기는 사쿠라기 시노의 모든 작품에 전반적으로 녹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굽이치는 달은 구시로의 독특한 분위기가 덜 배어있는 편인데,

그것은 이야기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이 도쿄 변두리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들은 모두 구시로에 위치한 도립 습원고등학교 독서부 멤버들입니다.

이들이 20대 초반이었던 1984년부터 약 25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인물은 단편 하나하나의 주인공을 맡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시에

1984년 스무살 연상의 유부남과 야반도주한 한 친구와의 인연을 담담히 그리고 있습니다.

 

스가 준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삿포로에서 화과자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중

사장이자 유부남인 교이치로와 불륜에 빠진 뒤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도쿄로 야반도주합니다.

1984년의 주인공 기요미는 준코가 야반도주 직전 마지막으로 연락한 친구였고,

1990년의 주인공 모모코는 과거의 준코처럼 유부남과 불륜에 빠진 상태에서

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준코의 편지를 받곤 그 행복을 확인하려고 도쿄로 찾아갑니다.

1993년의 주인공 야요이는 준코에게 남편을 빼앗긴 삿포로 화과자집 주인으로,

7년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 남편과 준코가 있는 도쿄로 향합니다.

2000년의 주인공 미나에는 학생 때부터 흠모했던 국어선생 다니카와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는 학창시절의 준코가 푹 빠져 있던 상대이기도 합니다.

2005년의 주인공 시즈에는 준코의 엄마로, 평생 여러 남자에게 전전하느라 준코를 방치했다가

60대가 돼서야 자신의 미래가 두려운 나머지 준코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2009년의 주인공 나오코는 독서부 멤버 중 유일한 미혼으로,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고 있던 중 준코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렇듯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준코가 놓여있지만, 정작 준코가 화자인 작품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화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동시에 준코에 대해, 준코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보다 2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이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과 인연이란 것이

얼마나 짙고, 깊고, 되돌리기 어렵고, 잊기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설정입니다.

그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과 인연이란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숱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애()든 증()이든 한 방향으로만 치닫지도 않습니다.

 

이런 관계와 감정과 인연을 지켜보는 일은 설령 소설이라 하더라도 만감을 교차하게 만드는데

정곡을 콕콕 찌르면서도 담백하고 알싸한 사쿠라기 시노의 문장으로 그것들을 읽다 보면

어느 새 독자 스스로 준코가 되거나 그 친구들, 엄마, 남편을 빼앗긴 여자가 되어

한없이 깊게 감정이입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쿠라기 시노가 그려낸 구시로의 아련한 모습을 맛보지 못한 건 무척 아쉽지만,

6명의 화자와 1명의 중심인물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분위기의 굽이치는 달

개인적으론 호텔 로열다음으로 그녀의 베스트로 꼽고 싶은 작품입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순수의 영역만 못 읽었는데,

특히 (국내출간작 중) 유일한 장편인 순수의 영역이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언제쯤 또 그녀의 신간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껴 읽어야 할 형편인 건 분명한데,

마음 같아선 당장 두 작품 모두 장바구니에 넣고 싶은 심정이니, 참 난감할 따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