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간의 홍수 속에 오랜만에 공백이 생겨 책장 속에 갇혀 있던 책들을 지켜보다가

매번 특별한 이유도 없이 뒤로 미뤄오던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을 집어 들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지만 이름도, 작품 제목도, 표지도 무척 온화해 보여서

부드러운 일상 미스터리가 아닐까, 예단했다가 정말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말았습니다.

 

평범한 중산층 주택 마당에서 4살 소녀가 교살당한 후 매장된 사체로 발견됩니다.

유아살해라는 충격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사건은 이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소녀가 살해될 당시 집에 머물거나 드나들었던 7명의 인물을 통해

소녀의 죽음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간의 균열, 갈등, 복수심, 집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이들은 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관계라서

누가 범인이어도 그 결과는 참담할 것이 분명하기에 초반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4살 난 조카딸 나오코를 돌봐주기로 여동생 유키코와 약속했던 사코토는

본의 아니게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와 나오코만 집에 남겨두고 외출하게 됐는데,

그 사이 나오코가 살해당했고, 조사 결과 꽤 많은 인물이 범인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치매 환자인 시아버지, 사건 발생 시각에 회사에 없던 남편, 나오코를 방치한 사코토 본인,

자유분방한 삶을 구가하던 나오코의 엄마 유키코와 그녀의 불륜남,

그런 아내 유키코를 지켜보며 괴로워했던 남편 다케히코 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차례차례 심중에 감춰뒀던 자신만의 끔찍한 비밀들을 독백으로 털어놓거나

날선 대화를 통해 상대의 진실과 거짓을 캐는 모습을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의 1인칭은 물론 객관적인 3인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점을 활용하는데,

처음엔 그 이유도 잘 모르겠고 약간의 혼란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양한 시점 구성 자체가 작가의 고도의 전략이란 걸 깨닫게 됐습니다.

각 인물이 소녀살해와 관련된 은밀한 고백을 1인칭 화법으로 털어놓을 때마다

독자는 그럼 이 사람이 범인인가?’라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다음 챕터에 넘어가 또 다른 인물이 고백을 털어놓자마자

앞선 짐작이 온통 허사가 돼버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범인인 것 같지만, 또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닌 것 같은,

, 누구나 살해동기를 가진 것 같지만, 동시에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한 아이러니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쉴 새 없이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번갈아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모두가 소녀를 죽이고 싶었던 같기도 하고,

모두가 다른 사람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소설 속 인물들은 물론 독자마저 점점 패닉 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진실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죽하면 메인 화자인 사토코가 오히려 이 노인네만 정상이고 미친 건 우리 쪽이다.”라며

자신들이 처한 미스터리한 상황을 자탄하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등장인물간의 관계나 갈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내용대로 이 작품은 사건 중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각 인물의 고통스런 전사(前史), 비틀리고 일그러진 악연, 참아왔던 분노와 배신감의 폭발 등

심리적인 서사가 굉장히 강한 작품입니다.

그런 서사에 서술트릭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시점 변화가 끼어든 덕분에

꽤 집중력 있는 책읽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저는 출퇴근길에 띄엄띄엄 읽다 보니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사흘이나 걸렸고,

그래서인지 작품의 진짜배기 맛을 제대로 못 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가능하면 한 번에 집중해서 완독할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대담한 설정과 서정성 넘치는 문체로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출판사의 작가 소개글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직접 확인한데다,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들이 비슷한 미덕과 장점을 지녔다는 번역가 양윤옥 님의 후기 덕분에

회귀천 정사등 그의 다른 작품들도 조만간 찾아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먼지 쌓인 책장 속에서 보물을 찾아낸 기분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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