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평선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호텔 로열’, ‘유리갈대에 이어 세 번째 만난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입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빙평선역시 훗카이도 동부 작은 항구도시 구시로가 주된 배경입니다.

전작들이 구시로 외곽의 습지가 주 무대였다면, ‘빙평선은 구시로 곳곳의 사계절을 비롯

겨울이면 유빙으로 둘러싸이는 오호츠크해의 작은 포구마을에까지 무대를 확장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밝힌대로 사쿠라기 시노는 인물풍경을 무척 중요시 여기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만큼 인물풍경이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경우는 무척 보기 드물다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됩니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해무 때문에 도시 전체가 갯내에 휘감겨 있었다.”

이 도시의 안개는 바닷물을 머금고 여름 거리를 바다 밑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야기의 무대이자 작가의 삶의 터전인 소도시 구시로의 풍경에 대한 묘사는

극적이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침잠하는 느낌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불온한 기운도 느껴지는가 하면,

어딘가 서정적이거나 애틋한 감상에 젖게 만들기도 하고,

, 짙은 해무 속에 무엇이든 감출 수 있을 것 같은 관능적인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이런 풍경속에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구시로의 인물들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온갖 감정에 휩싸인 채 살아갑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그들의 삶은 마치 짙은 해무 속에 갇힌 것처럼 보입니다.

대도시로 도망쳤지만 결국 구시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젊은 남자,

내일이 없는 구시로에서의 삶이 답답하지만 타협과 자기 위로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여자,

도쿄 며느리라는 비아냥과 내리막길 뿐인 구시로에서 적극적으로 도망치려는 여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이발사가 되어 박제 같은 삶을 살다가 뜻밖의 구원을 만난 남자 등

마치 구시로에게 발목을 잡힌 채 허우적대는 인물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뒷표지의 한 줄 카피는 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얽매이고, 무언가에 짓눌린 채 살아간다.”

황량한 대지만큼이나 척박한 삶 속에서 저항과 순응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

 

그렇다고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불행하거나 피폐한 삶을 산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주연 또는 조연을 맡은 여성들은 남성이나 풍경에 비해 아주 단단하고 든든합니다.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은 남성이, 세 편은 여성이 화자를 맡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어느 쪽이든 작가의 메시지를 발산하는 것은 모두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여성 화자의 경우 대부분 부당하게 구속된 삶을 깨뜨리는 능동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고,

남성이 화자로 등장하더라도 독자의 시선은 어느 새 저절로 조연 여성을 향하게 됩니다.

대도시에서 실패하고 귀향한 뒤에도 그저 철없고 이기적일 뿐인 남자를 다독여 성장시키거나,

퇴폐적이고 관능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누구에게도 사육당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오랜 기다림 속에 작은 행복을 얻었지만 끝내 자기 손으로 그 파국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남성들은 왜소해 보이고, 본능에만 충실하거나 아직 미숙한 캐릭터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소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바다까지 얼려버리는 혹독한 겨울, 짙은 해무로 휩싸이는 축축한 여름,

그리고 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배지의 분위기를 내뿜는 몰락 직전의 소도시의 암울함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든 파괴하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설계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가 은은하고 깊은 심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족 같지만, 때로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에 관능’, ‘성적 욕망이라는 포장을 씌우곤 하는데,

실제로 매 작품마다 그런 부분이 강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뭔가 야릇한 냄새를 풍길 거라고 기대(?)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 속의 성적 욕망은 서글프거나 애틋한 정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빙평선의 경우 전작들에 비해 그 정서가 좀더 진하고 깊게 배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서글픈 욕망 때문에 인물풍경이 훨씬 마음 아프게 읽혔습니다.

 

빙평선은 사쿠라기 시노의 데뷔작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이후에 출간된 호텔 로열이나 유리갈대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사쿠라기 시노의 일관성 있고 힘 있는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밝고 빛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감히 권하기 어렵지만,

이 투박한 서평의 분위기에 호기심이 이는 독자라면,

해무와 유빙으로 포위된 채 침잠한 듯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라면,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들을 찬찬히 음미해볼 것을 조심스레 권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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