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곰 꼬리가 보이는 그림책 7
이기훈 글.그림 / 리잼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땅은 아름드리 이야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조금 딱딱한 정식 명칭으로 말하자면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에는 우리가 익히 알듯 곰이 등장한다. 어둠 속에서 백 일 동안 쑥과 마늘로 견디며 마침내 사람, 즉 웅녀가 되었던 곰은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어머니이자 은근과 끈기의 표상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상상의 미래를 그린 동화 <양철곰>을 두고 단군신화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다소 뜬금없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의 양철곰과 신화 속의 웅녀는 '오랫동안 참아내며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점에서 참 많이 닮았다. 더불어 그림의 배경도 낯설고 기이한 먼 나라 풍경이 아니라 달동네와 판자촌 철거를 연상시키는 우리네 풍경을 담고 있기에 양철곰은 그 옛날 그 곰의 마음을 더욱 연상시킨다. 지금은 4천년 전과 같은 '시작'은 아니지만 나날이 병들고 무너져가는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시작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양철곰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양철곰은 비록 차갑고 무감각한 쇠붙이로 만들어졌지만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작은 마을을 지키려는 뜨거운 마음의 소유자이다. 날카로운 톱날 기계와 포크레인, 성난 사람들이 밀려와도 그저 묵묵히 버텨내기만 한다. 작은 마을이 양철곰에게 그토록 중요한 까닭은 이곳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녹색 지대이자 순박하고 선량한 이웃들과 함께 사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새들이 서둘러 양철곰의 몸 속에 열매 같은 것을 숨기는 걸 보니 아주 긴박한 상황인가보다. 점점 침식당하는 자연인 듯, 고갈되는 자원인 듯, 먼 발치에 보이는 작은 녹색 동그라미가 안타깝기만 하다.

 

 

 

사람들이 떠나간다.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모두 다 써버리고, 더 이상은 얻을 게 없는 황폐한 땅이라고 그렇게 버리고 떠나간다. 살만한 새 별을 찾아 떠나는 발 빠른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양철말에게 기차를 메우고 서둘러 우주정거장을 날아오른다. 힘차게 하늘 위로 솟는 양철말들은 욕심을 채우는데 빠르고 강한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 이들의 모습은 우리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들 중 누구라고 황폐해진 지구에서 더 살고 싶을 것인가! 그리고 황폐해질 앞날을 위해 최첨단 과학이 새 별을 찾아주리라 기대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이 아니던가! 강하고 빠른 사람들은 떠나가고 약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황폐한 이 땅에 남겨질 수 밖에 없는 비정한 세상. 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들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양철곰은...이 긴박한 순간에 웬 목욕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양철곰은 참으로 정성스레 목욕을 한다. 강물을 바가지에 담아 제 몸에 붓고 강가에 앉아 기다리고, 또 붓고 기다리고,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서 머리에 눈이 하얗게 쌓여도, 양철곰은 이 이상한 목욕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이 찾아와 황금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년은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 다 함께 황금별에 가자. 거기 가면 너도 반짝이는 황금곰이 될 수 있어. 그러면 낡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거야." 판자촌 지붕처럼 낡아빠진 양철곰에게 멋진 황금곰은 커다란 유혹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소년은 양철곰을 유혹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친구로서, 희망을 불어 넣어주려 했을 뿐. 어린 소년에겐 새롭고 멋진 것이 행복한 것이었고, 강하고 오래 가는 것이 영원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양철곰이 생각하는 행복과 영원은 황금 속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말없이 빙그레 웃음짓는 양철곰의 얼굴에서 인자한 현자(賢者)의 모습이 떠오른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양철곰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길, 그리고 외침. 양철은 쇠붙이라 물을 부으면 안 되는데, 양철곰은 왜 이리 고집스레 목욕을 하는 것일까? <양철곰>은 글자 없는 그림책이라 읽는 이가 하고픈 말을 한껏 담아 읽어 내릴 수 있다. 대체적으로 글자 없는 그림책들은 상상력을 북돋우도록 신비스럽거나 잔잔한 그림들이 많은 편인데, 이 책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상상력 보다는 그림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하고픈 말을 한껏 하고 양철곰이며 소년,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공감하며 느낌을 표현해 보기에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러기에 충분할 만큼 소년의 표정은 생생하며 곰의 몸짓도 묵묵하지만 깊이가 있다.

 

 

끝내 목욕을 멈추지 않았던 양철곰이 드디어 최후를 맞는다. '이 낡고, 힘없고, 미련하고, 느려터진 곰아! 그러나, 그러나, 끝까지 우리들을 지키려 했던 용감하고 사랑스런 나의 곰아! 제발, 이렇게 죽으면 안돼!' 소년이 목놓아 외쳤을 말들이 소리 없이 내 마음을 크게 두드린다. 무너져버린 양철곰에 꼭 붙어서 소년이 가슴으로 끌어안은 것은 희망으로 세상과 미래를 바라다 봤을 양철곰의 창문 같은 눈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소통의 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양철곰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한다. 황금의 별은 커녕 눈 앞의 소년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 것만 같다.

 

 

소년의 슬픔을 알기라도 하듯 비가 내린다. 아니, 여기서 이 비를 슬픔의 비로 읽고 싶지 않다. 이것은 양철곰이 남기고 간 선물을 빨리 확인하라고 재촉하는 기쁨의 비, 환희의 비다. 빗방울에 정신을 차린 소년이 눈을 떴을 때, 양철곰의 선물인 새싹들이 생명의 고개를 바짝 세운다. 이제 이 황폐한 땅에 초록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서 우리는 양철곰의 고집스런 목욕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양철곰은 제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정작 양철곰 자신은 그가 품었던 초록 새싹 한 잎도 다시 볼 수 없었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이 사랑에 대한 보상인 듯 자연은 양철곰을 생명이 가득한 숲의 시작으로 삼았다. 단군신화의 웅녀처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이가 된 것이다. 생명 없이 반짝이기만 하는 황금곰보다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초록곰이 된 것이다. 한낱 양철덩어리 기계에 불과한 양철곰에게 펄떡이는 심장을 가진 인간들이 배울 것이 더 많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중 하나가 양철곰처럼 큰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오래 참으며 희생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보다는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사랑의 마음을 넓혀 누군가의 오랜 견딤을 나눠 하길 바랄 뿐이다. 우리 모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그루의 나무로 다시 살자.


* 상기 이미지들은 리뷰를 위해 재조합되었으므로 본 도서의 이미지와는 크기와 순서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3-01-0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왜이리 슬픈거죠? 무엇이진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거꾸로 가는 나라의 현실과 이를 바로잡지 못하는 더딘 세상 때문인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분홍신님. 건강하시구요. 자주 들려서 더욱 많이 배우도록 할게요.

탄하 2013-01-01 11:52   좋아요 0 | URL
트란님 댓글 보니까 더 슬퍼요.
멀리서도 이 나라를 애틋하게 생각해 주시는데 어찌 이렇게 흘러가는지..ㅠ.ㅠ

허걱, 제게 배울건 별거 없을텐데..그래도 새해엔 더 자주뵙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나머지 얘기는 건너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