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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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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는 인간이 되어버린 천사, 다니엘의 이야기가 있다. 다니엘은 타락한 것도, 징계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한 여인을 사랑해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결심해버렸다. 그가 날개를 잃고 인간이 되던 첫 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색깔'이었다. 단조로운 흑백인줄만 알았던 세상이 난생 처음 보는 색깔들로 가득한 것이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면 천사로서의 영생이나 특권도 포기할만 했다. 이때 커다란 스크린에서도 흑백이 물러가고 아름다운 색깔들이 침범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가 처음 경험했던 색깔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전달 받을 수 있으며 신기한 듯 세상을 둘러보는 다니엘의 맑은 눈동자를 통해 잠시나마 색깔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여기 또 다른 천사가 인간이 되었다. 그는 키도 작고 뚱뚱해 그다지 이상적인 천사의 형상은 아니지만 색깔을 향해 보내는 호기심 만큼은 다니엘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바로 이 책의 저자 미셸 파스투로이다. 보통 사람들은 너무 익숙해서 기억하지도 감동받지도 않는 색을 특별한 것인양 시시콜콜 수집해 늘어놓는 그는 분명 전생에라도 천사였다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가 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독자는 막연하고 사소했던 색깔의 추억을 조금씩 조금씩 회복한다.

저자는 1950년대부터 약 60년간 색에 관해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증언하고픈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 변천을 되새기고 다양한 방면으로 비평이나 논평을 가하고 싶었다 고백한다. 그의 간절한 욕구를 실행하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프랑스 문단의 악동 조르주 페레크인데, 저자는 페레크의 <나는 기억한다>라는 작품처럼 '평범하고 모두에게 공통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기억'(p.15)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 문장이다. "나는 기억한다. 드 골 장군에게 앙드레라 불리던 형제가 있었던 것을. 그가 다갈색 머리를 가졌고 파리국제박람회의 부책임자였던 것을."(p.16)

사실 페레크의 책에 쓰여진 문장은 "나는 기억한다. 드 골에게 피에르라는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파리국제박람회를 이끌었다."이다. 여기에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름과 색깔과 직위에 변화를 주어 묘한 뉘앙스(그의 표현에 따르면 '통속극')를 자아냈다.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평범하고 모두에게 공통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기억'에 상상과 은유를 보태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색깔 이야기를 만들어 간 것이다. 그렇기에 책 속의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으며 어떤 의도를 위해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왜곡을 위한 왜곡이 아니라 색에 관한 기억을 보다 명료히 하기 위한 기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문학적 상상과 학문적 사실의 중간지대에서 더 깊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다.

상상과 사실 간의 교묘한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저자는 절대 색깔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릴적 그토록 원했던 초록색 자전거도, 서구의 상징인 인디고 청바지도, 프랑스의 삼색 국기도 모두 하얀 종이 위에 글자로만 표현될 뿐 사진 한 장 삽입된 글이 없다. 또한 가급적 색이 가진 고유이름도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색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여 세분화된 색이름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하게 빨간색, 초록색, 회색 등이며 간혹 눈에 띈다고 해도 '인디고'나 '머룬' 정도이다. 이처럼 파랑이라도 네이비 블루, 로얄블루, 인디고 블루와 같이 구체화하지 않고 그냥 뭉뚱그려 '파랑'이라고 한 것도, 그것을 떠올리는 개인의 상상력에 커다란 자유를 부여하며 평범한 일상의 일부로 누구라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색에 관한 이야기가 저자의 유년시절을 매개로 펼쳐지는 것 또한 독자로 하여금 쉽게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하는 장치다. 그리고 색연구가로서 밝히는 사실적인 이야기에 상상과 함축의 여운을 남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장치때문이다. 프랑스인인 저자의 유년시절 이야기라 이국적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우리와 공통된 관념 또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빨강색이 가지고 있는 반항, 불온의 의미나 감색이 가지고 있는 무난함과 점잖음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초록색 신호등을 '파란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들이 보라색의 포도주를 '적포도주'라고 하는 것, 즉 '색의 상징성'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미테랑 베이지에 가서는 벽에 부딪힌다. 베이지는 베이지인데 '미테랑 베이지'라니? 그가 대체 어떤 베이지색의 옷을 입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색을 통한 저자의 정치적 견해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다양한 색을 묘사함에 있어 어떤 색에서는 고정관념을 풀어 자유를 주기도 하고, 어떤 색에서는 반발심을 표현하기도 하며 역사적인 서술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 또한 흥미롭게 반영해 내고 있다.

우리는 색이 갖는 다양한 상징성에 대해 사회적 관념이나 어떤 사건을 통해 습득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색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지배한다기 보다는 결국 사회인으로서 오랜 기억을 통해 각인된 색에 우리 사고를 지배당할 수 있다. 때로 이것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학자들을 비롯 많은 학자들이 이를 간과했다고 불평하며, 사회계층을 형성하고 구분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조차 색이 빠져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대목을 보면 이 책은 단순히 색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 힘으로서의 색을 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막 인간이 된) 천사의 눈으로 바라 본 색은 결국 (늘 인간이었던) 인간의 눈으로 바라 본 색과 마주치게 된다. 인간의 눈이란 역사의 현장을 목격해 왔던 눈들이다. 여기에는 금기와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권력으로서의 색도 있고, 특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따스함을 일으키는 개인으로서의 색도 있으며,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기능을 수행하는 규범으로서의 색도 있다. 모두 너무나 익숙해져서 깨닫지 못했던 색깔들이며 어떤 면에서는 길들여져서 딱딱하게 굳어진 색깔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천사의 눈과 인간의 눈이 교차하는 시점, 상상과 사실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장에서 우리는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색들이 의미로 다가옴을 느낀다. 비로서 진정한 색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기억 속의 색>은 진정한 색의 스펙트럼을 열어주는 지각의 빛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아마도 흰 종이와 검은 글씨라는 무채색의 효과가 커다란 힘을 발휘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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