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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기계산업이 활발해지고 공장에선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던 모더니즘 시절, 미술계도 뒤질세라 공장만큼이나 수많은 유파들을 생산해 낸다. 얼마나 많은 미술 유파들이 속속들이 출현했던지 전문가들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형도까지 만들어야 했고, 입체주의 전시회를 위해 엘프레드 바가 만든 지형도는 오랫동안 신뢰받는 현대미술의 길잡이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진중권의 미술사> 모더니즘편은 기존의 지형도를 따르지 않고 보다 역설적이고 도발적인 분류법에 의해 현대미술사를 엮어나간다. 그동안 난해하고, 어렵고, 그래서 견고했던 현대미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한계점과 모순점을 습격해 보는 것이다.

오늘날이나 모더니즘의 시대나 미술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워서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충격적이고 새로운 작품들에 감탄과 박수를 보낸다(와! 이것도 예술이야?). 하지만 이 대단한 현대미술에도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나보다.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는 현대미술을 향한 막연한 찬사에 한번쯤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충격적인 것을 표현하는 작품은 그것을 만든 예술적 능력에 감격의 소리밖에 낼 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그것에 화를 낼지라도 그 충격을 온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간파한다.(p.17)


현대미술의 목표가 '감성적 쾌감'이 아닌 '지성적 충격'에 있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이것이 갖는 논리적 모순을 잽싸게 간파해 낸다. 대표적인 예로 문화보수주의자 한스 제들마이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우리가 놀랍다고만 생각하는 현대미술에서 이것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한계성을 들추어 낸다. 이처럼 눈 앞에 보이는 현대미술은 정면에서는 경이롭고 도도하기 짝이 없지만 침착하게 그 뒷태를 응시하고 있으면 시대의 불안을 견뎌내려는 가련함과 무한한 형이상학의 경계를 넘지 못한 허무함이 어우러져 그렇게 넘지 못할 견고한 성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편은 위에서 언급한 한스 제들마이어의 분류법과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구성이다. 한편으로는 진중권만의 분류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서운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현대미술의 한계점으로부터 출발해 그 이면의 세계를 탐색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제들마이어는 현대미술의 흐름을 '순수성의 추구, 근원을 향한 열망, 광기에 대한 호기심, 기술적 구축의 의지'라는 4가지 근원적 충동으로 분류했다. 어느 시대보다 활발하게 생성되었던 다양한 사조들을 이렇게 간략히 구분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성찰력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그 어떤 사조도 미래의 미술을 향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순수성'을 지향는 절대주의의 경우 의미까지 배제하다가 단순한 비예술로 전락하며, '근원'을 찾는 표현주의의 경우 순결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가공의 순결을 만들어 더 큰 순결의 상실로 빠져들게 된다. 결국 그가 지적하는 것은 전통적 가치를 부정한 현대미술이 그들만의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며, 그 우상은 스스로 예술이기를 거부하기에 미적 허무주의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들마이어의 지적을 듣고 있으면 현대미술은 마치 세상을 향해 반항하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여겨진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걸맞게 시대적으로도 전쟁, 혁명, 기계의 출현과 같은 격변을 겪은 것이 그들, 현대 미술가들이 아니던가! 만일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되었다면, 그리고 산업에서의 기계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유파의 화가들은 인상주의 화풍을 답습하며 들판에 나가 풍경을 그리다가 미술계를 침체시켰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묵묵부답의 들판을 박차고 작업실로 들어가 자아를 찾아가는 내면 여행을 결심했다. 자연이 주는 구상을 등지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의 추상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반항의 대상이 된 것은 색채와 형태였다. 우리가 잘 아는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들은 내면의 색채를 원시적인 영감에 근거해 안에서 밖으로 분출해 냈고, 원근법에 의한 3차원의 세계를 철저하게 깨부쉈다. 색채와 형태에 대한 실험뿐만 아니라 때마침 출현한 기계를 예찬하며 자연을 거부하는 시도들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모두들 전통과 단절된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는데 고군분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의미와 인간성을 상실한 현대미술의 끝은 그저 메마르고 건조할 뿐이었다.

한편 전쟁과 정치적 혁명의 영향을 받아 보다 암울하고 질곡 많은 여정을 걷게 된 유파들도 있다. 전쟁의 공포와 정신적 충격이 스며있는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오히려 전쟁에 열광하고 대중 선동에 기여하다가 종국에는 전쟁터로 가버린 미래주의, 전후의 상실감으로 질서에 회귀했지만 냉소적일 수 밖에 없었던 신즉물주의가 그들이다. 물론 그들의 수많은 사연과 변천사를 이렇게 간단히 요약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 어느 유파보다 현실에서, 내면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갈등이 심했던 것이 두드러진다. 특히 신즉물주의의 작품들은 현대미술의 이상(理想)이 좌절된 모습을 너무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혼란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 다시 사실적인 구상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었나보다. 비록 옛 시절의 그 아름다운 구상은 아닐지라도.


격변의 시대에 태동한 현대미술은 결국 제들마이어가 예견한 대로 한계에 부딪혔다. 공장의 제품 만큼이나 많이, 빠르게 출현했는가 싶더니 결국 소모되고 폐기되는 것에도 동일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현대미술의 자취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점을 긋고 역행하는 방식으로 짚어나가다 보니 그 허무한 발자취가 더욱 역력히 드러나는 듯 하다. 이처럼 난해해 보였던 현대 미술의 추상 세계를 뒷모습으로 바라니, 여기에는 역사의 시련을 헤쳐나가려는 의지와 진보를 향해 내딛는 열정을 가진 '인간'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한계에 부딪힌 것도 다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제들마이어의 예언(?)대로 이후의 미술은 '실재로 귀환'하고 '과거로 회귀'하지만 한 번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창조에 도전했던 현대미술가들의 시도는 다시 바로 그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2000년대에 70년대의 패션이 유행한다 해도 70년대 그때의 똑같은 패션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상처 가득한 현대미술의 뒷모습을 읽는다해도 여전히 새로운 미술에 대한 희망은 있다고 주장해도 좋지 않을까?

* 덧붙임 : 절대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다다이즘 등 모더니즘의 주요 미술사조를 살펴보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것은 상세한 설명도 설명이지만 풍부한 도판도 한 몫한다. 그리고 그리드, 콜라주, 오브제, 엑소노메트리와 같은 주요 용어를 별도 페이지에 담아 심도있는 보충설명을 더해주고 있어 예기치 않은 지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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