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몽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허몽, 사실과 다른 꿈.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을 꿈으로 꾸는 것.

책의 머리말로 쓰인 문구에서 '백일몽(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떠올렸다. 만일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하였더라면 일어날 법한 일이기는 하구나싶었을텐데,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단정지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이 책의 띠지와 뒷면에 적시된 스토리 소개에서 알 수 있듯 <허몽>은 심실상실자나 심실모약자가 저지른 살인으로 고통받는 가족의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앞서, '허몽'은 아마 피해자 가족의 바람이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즉, 가해자의 정신이 온전치 않더라도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기를, 아니 이런 비참한 살인조차 흉몽에 불과하기를말이다.. 하지만 '허몽'은 다른 데있었다.

왜 루미가, 사와코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범인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대체 어떤 인간이 왜 이런 짓을-.
그런 생각을 텔레비전 화면을 노려보았다. 열두 명을 살상한 유례없는 대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21세의 전문학교 학생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름을 비롯한 다른 사항은 보도되지 않았다_24쪽

첫눈이 내린 온화한 마을 정경을 묘사한 서장에서는 돌연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야쿠마루 가쿠 작가님의 책은 이번에 처음 접했데 이처럼 급격한 장면을 전환하면서도 독자의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노련한 필력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온몸에 전율이 돋는 잔인한 사건 이래 4년이 지난 현재. 미카미 코이치는 이혼한 하시다 사와코로부터 대뜸 연락을 받았다. 사랑하는 딸, 루미를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 살인한 후지카시 히로유키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것.
 
'형법 39조'라는 법률에 의해
심신상실자의 행위는, 이를 벌하지 않는다.
심신모약자의 행위는, 그 형을 감경한다_31쪽

다만 신문기사 등을 읽으면서 항상 드는 생각은, 사람을 죽이려 한 시점에서 그 인간의 정신은 이미 병들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범행 시의 순간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정상적인 정신이 아니기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일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상냥하고 친절하던 사와코는 환각을 보는 등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고 전업작가였던 미카미는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사회는 2년 반 후인 2005년 9월에 '심신실조자 등 의료관찰법'을 시행하였고, 히로유키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다. 그는 불기소 처분되어 입원이 결정된 상태였다. 즉,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만일 <허몽>의 시점이 부조리한 법률에 좌절하는 유가족의 마음에만 머물렀다면, 그리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책은 루미를 죽인 히로유키의 관점도 교대로 제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읽은 대니얼 키스의 실화를 다룬 소설, <빌리 밀리건>이 떠올랐다. 그는 최초로 법원에서 다중인격장애를 인정받아 무죄 협의를 받은 자였다. 주 인격의 통제를 벗어난 타 인격이 저지른 죄를 무고한 인격이 대신 치르는 장면에서 든 감정이, <허몽>에서 되살아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허몽>이 피해자의 관점도 아울러 제시했다는 점에서 갈대처럼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답답한 마음만 들뿐이다. 

<허몽>을 읽기로 한 데에는 그 소재가 주목할만하다는 점도 있지만, '과연 미스터리 소설의 묘미를 잘 살릴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심과 호기심에 있었다. 사건과 범인, 피해자가 위를 향한 손바닥처럼 속시원히 펼쳐진 상태에서 독자를 전율케하는 트릭과 반전을 은밀히 숨길 수 있을지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사치라고, 책은 복잡하고 난해한 트릭을 이용하지 않고도 기본 전제를 한순간에 뒤집어버리는 대범함이 있었다. 특히 인물들의 신상을 이용한 서술트릭이 돋보였는데 사와코라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허몽>은 예민한 소재를 흥밋거리로 삼은 책에 불과했을 것이다. 가해자의 정신 상태에 따라 달리 처벌하는 제도의 양면성을 미스터리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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